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무레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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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이라는 게 굉장히 빠르구나 싶을 때가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디어 쪽에서 걸핏하면 나오던 말인데 요샌 듣기도 힘든 말이 있다. 바로 힐링이라는 말이다. 힐링을 하도 해서 이제 모든 것들이 다 치유라도 된 것인지, 아니면 힐링이라는 말 자체가 벌써 촌스러워졌는지 이 말을 쓰는 것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이렇게 힐링은 끝이 났지만 잔잔하게 사람을 치유해 주는 것은 여전히 많다. 그것이 좋은 날이건, 좋은 장소이건, 좋은 음식이건, 좋은 동물이건 말이다. 잘 알려진 『카모메 식당』의 무레 요코는 이런 이야기들을 제대로 만들어낼 줄 아는 작가다. 특히 여성의 소소한 일상을 잔잔하게 잘 그려내는데 작가의 이야기를 음미하다 보면 제대로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마구잡이로 유행했던 싸구려 힐링이 아니다. 제목부터 살짝 느슨하게 만들어주는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이라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오십대의 여성 아키코는 회사의 부당한 인사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회사를 퇴사하고 어머니가 경영했던 시끄러운 술집을 개조해 자신만의 가게를 만들고 빵과 수프가 있는 작은 가게를 연다. 주위를 떠돌던 길고양이도 가게에 눌러앉게 되고 타로라 이름지어준다. 작고 조용한 가게지만 살다 보면 자신을 둘러싸고 여러 일들이 일어나지만 아키코는 여전히 하루하루를 빵과 수프를 만들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가끔 별것 아닌 것에 기쁘기도 하고 편안해지기도 한다. 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아니 무레 요코의 이야기가 마찬가지라고 해야겠다. 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흔하디흔한 이야기에 문장 역시 이야기만큼이나 느긋하다. 흔해빠진 이야기지만 흔하지 않다. 오십대 중년 여성의 이야기, 특히 소설이라면 가정의 갈등, 자아를 찾기 위한 필사적인 이야기, 중년의 삶의 문제들 같은 빡빡한 이야기를 생각하기 쉽다. 문제를 제기하고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어야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스님이고 자신은 사생아였고, 어머니는 술을 파는 가게를 했다면 대부분의 소설은 주인공의 그런 삶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잔잔하고 평범한 삶의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삶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중년이 된 아키코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직장에서 해고된 것도 아니고 자신을 버린 스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아니고 자신의 이복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아닌 자신과 함께한 길고양이 타로의 죽음뿐이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다. 소설로 쓰일 만한 이야기 대신 그냥 일상을 덤덤하게 그려내는 것. 일본 작가 특유의 감성인지 이런 이야기들이 일본 소설에는 많이 등장하는 편이고 그게 우리나라 소설과는 꽤 다르다. 특히 여성작가라면 더 그렇다. 참고로 『카모메 식당』은 영화로,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은 드라마로 제작되어 있으니 책을 보시고 드라마도 즐기시길 바란다. 두 작품에서 출연하는 배우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그 느슨한 느낌을 영상으로 보는 것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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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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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철학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은 ‘멋진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평범한 눈으로 본다면 그의 삶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 삶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루트비히 자신은 그의 철학처럼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왔다. 그에게 정신이상, 광기 같은 병들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침묵해야 할 것이었는지 모른다. 루트비히와는 달리 파울은 광기로 가득 찬 정신병을 앓고 있던 천재였다. 파울 역시 글을 썼으나 실제로 발표하지 못한 말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던 천재였다.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며 입원해 있던 파울과 폐병으로 입원해 있던 화자이자 관찰자인 베른하르트의 우정은 이렇게 병원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파울은 태어날 때부터 있던 광기 어린 정신병자로 이미 죽어가는 상태였고 늘 죽음을 생각하던 폐병 환자는 서로의 삶에 영향을 준다.

“내 메모가 지금 말해 주듯이 지난 십이 년간 나는 그의 죽음의 과정을 추적해 온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죽음을 이용했다. 그의 죽음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이용해 먹었다. 사실 나는 그의 죽음을 십이 년 동안 지켜본 증인에 지나지 않으며, 십이 년 동안 죽어가는 친구로부터 나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에너지를 빨아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p.138~139


베른하르트는 자기 생존을 위해 친구가 죽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설혹 파울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 하더라도 광기 어린 파울은 웃고 넘겼으리라. “내가 땅에 묻히는 날 이백 명의 친구들이 모일 거야. 그날 자네가 내 무덤에서 연설을 해주었으면 해.” 파울은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였을 베른하르트에게 연설을 부탁하지만 그의 장례식장에는 여덟 내지는 아홉 명만이 참가했을 뿐이고 베른하르트 역시 가지 않았으며 지금까지 그의 무덤을 찾지 않고 있다.

파울만큼 광기 어린 사람은 아니었지만 베른하르트 역시 국외자였고 두려움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파울이 죽어가는 과정을 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 죽어가는 파울을 두고 온 것, 마침내 파울이 죽은 것, 그의 무덤에 찾지 않은 것이 그것이다. 항상 죽음만을 생각하던 베른하르트는 실제로 죽어가는 친구 파울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무덤을 찾지 않았다. 이것은 감성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자신이 항상 생각해 왔던 죽음에 대한 실체적인 모습을 대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죽음과 동일시되던 파울을 거부하는 것은 베른하르트가 갖게 된 삶에 대한 욕망이다. 그래서 그가 결국 할 수 있었던 것은 무덤덤한 척 자기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그에 대한 기록으로 무덤에서 할 수 없었던 연설을 대신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문단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이야기는 파울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화자인 베른하르트 자신의 이야기이며 목소리이기도 하다. 실제 죽음을 앞둔 파울과 늘 죽음을 생각하던 화자는 병원을 오가며 광기 어린 우정을 나누었다. 베른하르트는 파울과의 우정을 통해 삶의 방향과 삶 자체에 대한 욕망을 가지게 되고 그의 죽음은 자신에게는 삶을 가져다주었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의 삶에 동조했지만 죽음에 이르게 되자 어쩌면 무관심해졌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이 부탁했던 이백 명 앞에서의 연설도 하지 않았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파울의 무덤을 찾지 않겠지만 그에 대한 이 기록들은 파울에게 바치는 뒤늦은 연설문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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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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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갑자기 죽으면 어쩔 도리 없이 속수무책으로 남게 되는 것들을 생각해 본다. 엄마와 오빠가 나를 대신해 지워야 할 물건들, 내가 한때 살아 있었다는 온갖 자질구레한 흔적들, 평생을 애면글면 살아내면서 겨우 남긴 욕망들. 살아서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공유했던 것들은 아무래도 좋은데 그 외에 다른 것들을 끌어안고 있을까 봐 겁난다. 그 사이에서 예기치 못했던 것들이 발견되면 그것들이 나에 관한 다른 기억들을 전부 제압할지 모른다. 도대체 그이가 왜 이렇게 꽁꽁 쟁여뒀는지 알 수 없는 것들, 엄청난 약봉지, 사탕 봉지, 로또 뭉치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아닌 것 같은 것들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겨지고 싶지 않다.

김중혁의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에는 사후에 그런 것들을 아무도 몰래 감쪽같이 지워주는 ‘딜리터(deleter)’라는 직업이 나온다. 딜리터는 생전의 의뢰인과 계약한 대로 의뢰인이 지정해 놓은 온갖 물건들을 사후에 ‘딜리팅(deleting)’한다. 이 소설에는 전직 경찰이자 딜리터인 구동치가 딜리팅 과정에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으로 등장한다. 딜리터니 딜리팅이니 하는 직업과 일도 신기하고 재미있지만, 더욱 흥미로운 점은 딜리터에게 딜리팅을 의뢰하는 물건들을 의뢰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부재하는 자리에 남겨지는 것은 싫지만 자신이 존재하는 한은 소유해야 하는 것, 그것을 김중혁은 ‘비밀’이라고 말한다. 그 비밀들 중에는 세상에 공개되면 지금까지의 나를 무너뜨릴 약점뿐만 아니라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 상대와 협상하여 거액을 챙길 수 있는 약점도 포함된다.

김중혁은 자신이 죽은 이후까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딜리팅을 의뢰하는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 (328쪽)


그래, 어쩌면,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살아 있는 한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욕망” 자체는 아직은 살아 있어서 죽음 이후를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자만이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질 수 있는 욕망이 아닌가. 그 욕망에, 같은 한계를 지닌 동류로서 연민을 느낄지언정 추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 그리하여 자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을, 알 수 없다는 것조차 모를 세상의 일까지 전전긍긍하는 신경이라니……. 만약 그 애처로운 욕망이 추해진다면, 그건 추한 사람이 추하게 욕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구동치가 본의 아니게 살인 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추한 사람이 추한 욕망으로 딜리팅을 이용하고, 구동치가 의뢰자의 본심을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대 엔터테인먼트 회장(천일수, 악당), 그를 무너뜨릴 수 있는 동영상이 담긴 태블릿 PC, 그 동영상으로 그의 재력을 탐하다가 살해된 사람(배동훈)과 계속 탐하는 사람(이영민, 악당이나 마찬가지) 사이에 휘말리는 것은 태블릿 PC를 딜리팅해 달라고 배동훈에게 의뢰받은 구동치뿐만이 아니다. 배동훈의 석연찮은 죽음을 파고드는 과격하지만 정 많은 열혈 형사와 원수도장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천일수에게 고용되어 궂은일에 나서는 사람들도, 명예와 부를 지키려는 자와 그것을 무너뜨려 빼앗으려는 자의 추악한 욕망에 휩쓸린다. (‘원수도장’, 인터넷 검색도 안 되는 낯설고 신기한 소재이다. 소설 속에 제공된 정보를 간단히 언급하자면, ‘무공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내세의 삶까지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하루 종일 무공만 연마하는 일종의 종교, 그러나 1980년대에 간첩 조작 사건에 휘말려 궤멸됐음.’)

소설은 단숨에 아주 잘 읽힌다. 딜리팅을 하는 탐정과 살해당한 의뢰인,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음모는 작가가 감질나게 조금씩 던져주는 단서를 좇아 책장을 쉼 없이 넘기게 한다. 그런데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한껏 증폭됐던 궁금증만큼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소설의 커다란 뼈대와 별 상관 없는 곁가지 에피소드들이 많이 나와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한다. 특히 정소윤, 그녀는 이 소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꽤 비중 있게 다뤄지고 뭔가 활약할 것 같은 기대감을 주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흥미로운 소재들을 많이 가져왔지만 꼭 그 소재들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졌다는 점이다. 소설 초반에는 구동치가 딜리터였을지 모르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딜리터이기보다는 탐정이었고, 원수도장 사람들은 처음에 정체 묘연한 무공의 고수들로 카리스마 넘치게 등장해 그에 걸맞게 행동할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실수투성이 오합지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애꿎게 사람이 하나 더 희생됐다. 나는 아직도 왜 그를 죽이기까지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잘 이해가 안 되긴 제목도 마찬가지이다. 제목과 연관된 문장들을 소설 속에서 발견했지만 말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알라딘 신간평가단으로 이 책을 받기 전에 이미 읽었지만, 리뷰는 신간평가단이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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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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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섬노예 사건에 관한 뉴스를 보다 보면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노예제도가 남아 있던 봉건시대나 미국의 남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실제로 아직도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곳이 허다한 것을 보면, 어쩌면 인간은 내면 깊숙이 악마적 심성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노예 하면 당장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다. 미국의 예를 들어 보자면, 가정부 복을 입은 퉁퉁하게 살이 오른 하녀, 웃통을 벗고 뙤약볕에서 일을 하고 있는 젊거나 혹은 나이가 든 노예들. 이들의 공통점은 흑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고,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았다. 이후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자유가 주어진 것은 노예 해방이라는, 어찌 되었건 명목상의 이유로 일어났던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부터이다. 전쟁이라고 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악의 행위 이후에야 노예 제도는 어떤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노예제에 관한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이야기라면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일 텐데, 이것이 백인의 눈으로, 관찰자의 입장에서 쓰인 이야기라면 지금 볼 이 책은 자유인에서 노예가 된 한 흑인 지식인의 눈으로, 삶으로 경험한 생생한 기록이다.

솔로몬 노섭의 『노예 12년』은 뉴욕의 자유 시민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솔로몬 노섭이 납치당해 루이지애나의 한 목화 농장에서 구출되기까지의 12년 동안의 노예 생활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자유민에서 노예가 되었다는 극단적인 대비와, 실화라는 충격까지 더해져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특이한 점은 자유민이자 지식인이기도 했던 흑인이 노예제를 경험하면서 느꼈던 그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료로의 가치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자유 시민 ‘노섭’은 노예 상인에 의해 ‘플랫’으로 그 바뀐 이름만큼이나 험난하고 고된 삶을 경험하게 되는, 노예로의 삶뿐만이 아니라 미국 남부 지역의 생활상과 단면들도 독특한 느낌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이것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세계를 직접 경험한 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현재에도 분명히 노예들은 존재한다. 현재의 노예들의 모습은 과거에 못지않다. 잔혹하고, 악랄하며, 비인간적이다. 사람을 납치하고, 폭행해서 죽지 않기 위해 자발적 노예가 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자유로웠다가 강제로 빼앗긴 사람들이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과거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비인간적이고 부조리한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쉬운 말처럼 이야기하는 개인의 저항과 같은 것과 같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와 같은, 보다 큰 힘밖에 없다. 그럴 의지가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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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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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그리 낭만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가능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첫눈에 볼 수 있는 것은 고작 외모뿐이다. 외모에 이끌려 어떤 감정이 순간적으로 들끓는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감정이 상대가 가진 외모로 필연코 품게 마련인 착각 혹은 환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오해는 위태롭다. 환상 속 그대는 언제든 실망스러운 현실로 추락할 수 있다. 내가 그대를 세워놓은 환상과 그대가 진짜 서 있는 현실의 간극이 적을수록 일시적인 감정은 ‘추락’ 속도를 늦춰 진정한 사랑으로 견고하게 ‘안착’할 수 있다. 외모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려면 시간을 들여 그가 어떤 인격과 성품과 취향 등등을 가진 사람인지 알고 그에 민감하게 조응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설령 그 시작이 외모였더라도 외모는 상관없어져야 사랑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스 에리히 노삭은 『늦어도 11월에는』(1955년)에서 첫눈에 서로의 영혼까지 들여다봤다고 확신하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미 죽어버린 여자의 시점으로 서술함으로써, 운명적인 상대라는 것을 첫눈에 감지한 그 사랑의 결말이 죽음임을 아예 처음부터 설정해 놓고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로 시작하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1998년)처럼 서술자인 ‘나’가 사자(死者)임을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 대해 아무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독자는 책장을 거의 모두 넘긴 후 네다섯 장 남겨두고서야 지금껏 내내 이야기한 여자가 이미 죽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나는 노삭의 의도를 어떻게 처음부터 알았을까? 어쩌면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의 김을 새게 만들 수도 있는 폭로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 내용은 출판사 보도자료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나 말고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내가 추리소설의 중요한 반전을 떠벌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디 화내지 마시길!

『늦어도 11월에는』의 첫 문장은 “우리는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이다. 부유한 유부녀 마리안네가 이혼남인 희곡작가 베르톨트 묀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러고 나서 곧이어 “아니지, 차근차근 얘기해 나가야 한다”는 문장으로 이어져 마리안네는 베르톨트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떠올린다. 그들은 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처음 만난다. 마리안네는 그 문학상을 제정한 기업가 남편 대신 참여한 아내로, 베르톨트는 그 문학상을 받는 작가로. 그들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베르톨트가 곧장 마리안네에게 다가와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쏟아놓은 고백이 그들 사이의 첫마디였다. 그리고 마리안네는 베르톨트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그 고백을 듣자마자 과감하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우연히 같은 공간에 머물게 됐을 뿐인 그들의 첫 만남과 베르톨트의 고백과 마리안네의 행동 사이에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연결 고리가 없다. 마리안네가 수상식에 참여하기 전에 베르톨트의 작품을 미리 읽어보긴 했다. 하지만 그 작품을 읽으면서 영혼의 깊은 교감을 느꼈다든가 하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이고 숙명적인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베르톨트는 수상식장에서 마리안네를 보기 전까지 그녀의 존재 자체에 대해 까맣게 몰랐다. 그러나 노삭은 이다지도 턱없어 보이는 사랑, 이해받지 못하는(도덕적 혹은 윤리적인 측면이 아니라 이성적 혹은 논리적으로! 서로 사랑이라는데 이성이나 논리, 상식이 웬 말이야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사랑에도 다른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하는 뭔가가 분명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입으로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수상 강연을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탁자 아래로는 다리를 잠시도 가만두지 못한 채 발 장난을 하는 베르톨트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마리안네는 직감한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가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금방 눈에 띄는” “좀 드문 사람”, “품위 있는 귀부인”임을 첫눈에 알아본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의 특별한 ‘품위’에 대해 줄곧 상기시키는데, 초면에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고백까지 하게 만든 그 품위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 단지 그들은 ‘문학상 수상식장’이라는 공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둘만 억지로 끌려 나온 이질적인 존재임을 서로 단박에 알아차렸다고 짐작할 뿐이다. 속마음을 숨긴 채 적당히 섞여드는 척하지만, 그 ‘적당히’를 잘 견디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배겨내지 못하는 사람은 들뜨게 되어 있고 또한 동류를 금세 알아본다.

베르톨트가 받은 ‘문학상’ 이름은 ‘상공인협회’ 문학상이다. ‘상공(商工)’과 ‘문학’이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말하는 것은 편견일지 모르지만 왠지 내게는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이 문학상을 제안하고 거액의 상금을 후원한 사업가는 마리안네의 남편 막스 헬데겐이다. 막스에게 문학을 향한 열정이나 애정, 혹은 사명 같은 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문학상 제정이 자기 명성을 높여주고 자기 기업을 좋은 이미지로 광고하는 기회가 되어줄 수 있다는 계산이 섰을 뿐이다. 그가 익명으로 남겠다고 면치레했던 것도 수상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상공인협회 문학상이 막스의 작품임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막스는 돈을 투자해 자신이 얻고 싶었던 것을 모두 얻었다. 누구의 어떤 작품이 수상했는지는 자기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사업상 중요한 일을 밀쳐두고 수상식장에 참석하는 것은 더더욱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막스는 대신 아내 마리안네를 밀어 넣었다.

수상식장에서 남편을 대신하는 마리안네는 결코 ‘마리안네’ 자신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마리안네에게 궁금해 하는 것은 ‘마리안네’가 아니라 ‘막스’이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마리안네의 생각이 아니라 막스의 의견이다. 베르톨트 역시 당분간의 생활비가 아쉬워 마지못해 수상식을 참고 있을 뿐, 자신이 그들만의 성대한 교양 잔치에 근사한 들러리가 되어주는 역할이라는 것쯤은 잘 알았다. 마리안네는 뜨거웠으나 불안정했던 첫사랑의 상처에서 도망치기 위해 성공한 기업가이자 막대한 자산가인 막스의 견고한 성채에 안착해 물리적인 안정을 얻은 대신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그만두었다. 마리안네가 베르톨트의 갑작스러운 고백을 경계하지 않고 100퍼센트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그 말이 그녀조차도 억누르느라 한동안 잊었던 자신을 화들짝 일깨웠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 말이 그녀에게는 이제껏 숨죽이며 기다려온,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버리고 다르게 살아보라는 일종의 신호였을지도.

그리하여 그날 밤, 마리안네는 자신을 다시 발견해 준 베르톨트와 함께 훌쩍 떠나버린다. 마리안네가 가정을 순식간에 버리는 과정(평범하지 않다!)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과연 그들은 황홀한 고백과 사랑에 대한 확신만큼 행복하기만 할까? 그들은 알아가면서 사랑하게 되는 보통 연인들과 달리 먼저 사랑하고 나서 뒤늦게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를 밟는다. 커피에 설탕을 넣는지, 안 넣는지부터 지나간 사람, 어린 시절부터 마리안네가 좋아한 자장가,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베르톨트의 어머니, 그리고…… 서로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에 대해 불안해지는지, 그리하여 결국 무엇을 원하는지까지. 그 단계는 별로 달콤하지 않다. 오히려 당황스럽고 불안하고 괴로우며 이내 슬퍼진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영혼이 교감하는 듯했던 마법의 효력은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졌을 뿐 아니라 자기 마음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자신으로 인해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서로 숨기는 ‘배려’는 상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자괴감으로 이어진다.

가령 마리안네는 다만 베르톨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서 그가 쓴 글이라도 읽으려 했을 뿐인데 베르톨트는 질색한다. 베르톨트가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을 증오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글을 완성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라는 것을 마리안네는 몰랐다. 게다가 그는 자기 일에 대해서는 마리안네의 관심조차 거부한다. 그가 마리안네와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일을 마치고 나면 “늦어도 11월에는……” 일종의 대가로 주어질 미래이다.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지만, 약간의 돈과 낡은 폭스바겐 한 대로 자유를 꿈꿀 수 있는 미래만 말이다. 마리안네는 앞뒤 재지 않고 충동적으로 대담한 고백도 서슴지 않는 남자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힐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남자가 약속하는 11월은 멀었고, 마리안네는 지금 그의 곁에서도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불행해진다. 마리안네가 스스로를 위해 그의 곁에서 존재하려 했다면 그를 떠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마리안네는 그를 위해 존재하고 싶었고, 그를 떠올리면 자신은 ‘방해, 속박, 구속, 짐, 잘못’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리안네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다. 때마침 시아버지가 그녀를 회유하러 찾아왔고 그것은 그녀에게, 막스를 떠나올 때처럼 가방 하나 달랑 싸는 것으로 베르톨트를 버리고 막스에게 돌아가도 된다는 신호가 되어준다. 베르톨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였다고 말하지만 마리안네는 처음에는 그를 버린 게 분명하다. 하지만 마리안네가 베르톨트 곁에서 더는 불행하지 않기 위해 되돌아온 자리는 더더욱 끔찍했다. 그녀의 외도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가짜로 행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리안네는 더욱 움츠러든 채 저들이 마음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할까 두려워하면서 자신이 ‘극복’했음을 증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모욕감 속에 질식해 간다. 드디어 11월, 베르톨트가 마리안네를 막스에게 잠깐 맡겨둔 것처럼 그녀를 당당하게 찾아왔을 때, 그녀는 그를 버렸다는 것을 망각한 채 그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잠깐 떠나 있었다고, 그가 자기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생각한다. 베르톨트가 찾아왔고, 마리안네는 이번에는 가방조차 쌀 필요 없이 막스 앞에서 두 번째로 미련 없이 베르톨트를 따라나선다.

어쩌면 마리안네가 막스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제멋대로 편리하게 떠났다가 돌아왔다가 떠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남편을, 다른 남자를 기다리는 간이역으로 취급하다니! 마리안네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막스도 마리안네를 사랑하지 않았다. 도대체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막스에게 마리안네는 ‘완전한 가정’이라는 평판을 완성해 주는 역할이다. 마리안네가 처음 집을 떠났을 때 막스가 취한 행동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의 분노라고 할 수 없다. 가정이라는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발생한 불의의 사고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였을 뿐이다. 마리안네의 귀가를 환영한 것도 아내의 외도까지 감싸주는 남편의 넉넉한 품이 아니었다. 아내의 부재를 요양으로 눈속임해 둔 임시방편이 들통 나서 자신이 쌓아온 명성에 흠결이라도 생길까 봐 초조해 하던 막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단지 마리안네와 막스의 셈이 맞았다가 어긋나는 일이 반복됐을 뿐이다. 막스의 억울한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막 집을 나선 마리안네와 베르톨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나서 그가 침착하게 발휘한 사업가 기질은 정나미가 떨어지게 만든다.

마리안네처럼 사랑해 보지 않는 이상 ‘그게 정말 사랑이라고?’ 의심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겠지만, 그들이 사랑이라고 하니까 일단 그렇게 믿기로 한다. 『늦어도 11월에는』를 처음 읽어나갈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들의 사랑이 끝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폭로는 황홀한 고백에 죽음의 씨앗부터 심어놓은 노삭이 먼저 했음을 알겠다. 마리안네는 자신과 함께라면 죽어도 괜찮다는 베르톨트를 데리고 수상식장을 빠져나와 자기 집으로 향하다가 “죽음은 영원하다”는 위험 표지판에 문득 눈길을 둔다.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될까? 그리하여 사랑은 죽음처럼 영원해질까? 어쩌면 베르톨트가 낡은 폭스바겐을 사기 위해 무대에 올린 희곡(프란체스카, 파올로, 말라테스타, 단테 이야기)에 노삭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겨 있을 수도 있지만 노삭이 왜 그들 연인을 위해 죽음을 미리 예비해 두었는지 잘 모르겠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결국 하나의 욕구에서 잉태한 것이라지만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다. 죽음이 영원할지라도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이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사랑하는 순간 죽었기 때문에 사랑의 기억만 남더라도, ‘그때 죽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이 통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때 마리안네와 베르톨트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사랑도 남루해졌을 것이다. 곧 낡은 폭스바겐은 고장 날 테고 약간의 돈도 바닥나겠지. 진짜 사랑이든 더는 아니든, 사랑의 과정이 뒤바뀌든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행복해지기 위해 행동할 용기가 되어주고, 그로 인해 좀더 불행했을지라도 행복했다면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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