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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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그리 낭만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가능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첫눈에 볼 수 있는 것은 고작 외모뿐이다. 외모에 이끌려 어떤 감정이 순간적으로 들끓는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감정이 상대가 가진 외모로 필연코 품게 마련인 착각 혹은 환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오해는 위태롭다. 환상 속 그대는 언제든 실망스러운 현실로 추락할 수 있다. 내가 그대를 세워놓은 환상과 그대가 진짜 서 있는 현실의 간극이 적을수록 일시적인 감정은 ‘추락’ 속도를 늦춰 진정한 사랑으로 견고하게 ‘안착’할 수 있다. 외모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려면 시간을 들여 그가 어떤 인격과 성품과 취향 등등을 가진 사람인지 알고 그에 민감하게 조응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설령 그 시작이 외모였더라도 외모는 상관없어져야 사랑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스 에리히 노삭은 『늦어도 11월에는』(1955년)에서 첫눈에 서로의 영혼까지 들여다봤다고 확신하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미 죽어버린 여자의 시점으로 서술함으로써, 운명적인 상대라는 것을 첫눈에 감지한 그 사랑의 결말이 죽음임을 아예 처음부터 설정해 놓고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로 시작하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1998년)처럼 서술자인 ‘나’가 사자(死者)임을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 대해 아무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독자는 책장을 거의 모두 넘긴 후 네다섯 장 남겨두고서야 지금껏 내내 이야기한 여자가 이미 죽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나는 노삭의 의도를 어떻게 처음부터 알았을까? 어쩌면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의 김을 새게 만들 수도 있는 폭로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 내용은 출판사 보도자료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나 말고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내가 추리소설의 중요한 반전을 떠벌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디 화내지 마시길!

『늦어도 11월에는』의 첫 문장은 “우리는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이다. 부유한 유부녀 마리안네가 이혼남인 희곡작가 베르톨트 묀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러고 나서 곧이어 “아니지, 차근차근 얘기해 나가야 한다”는 문장으로 이어져 마리안네는 베르톨트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떠올린다. 그들은 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처음 만난다. 마리안네는 그 문학상을 제정한 기업가 남편 대신 참여한 아내로, 베르톨트는 그 문학상을 받는 작가로. 그들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베르톨트가 곧장 마리안네에게 다가와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쏟아놓은 고백이 그들 사이의 첫마디였다. 그리고 마리안네는 베르톨트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그 고백을 듣자마자 과감하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우연히 같은 공간에 머물게 됐을 뿐인 그들의 첫 만남과 베르톨트의 고백과 마리안네의 행동 사이에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연결 고리가 없다. 마리안네가 수상식에 참여하기 전에 베르톨트의 작품을 미리 읽어보긴 했다. 하지만 그 작품을 읽으면서 영혼의 깊은 교감을 느꼈다든가 하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이고 숙명적인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베르톨트는 수상식장에서 마리안네를 보기 전까지 그녀의 존재 자체에 대해 까맣게 몰랐다. 그러나 노삭은 이다지도 턱없어 보이는 사랑, 이해받지 못하는(도덕적 혹은 윤리적인 측면이 아니라 이성적 혹은 논리적으로! 서로 사랑이라는데 이성이나 논리, 상식이 웬 말이야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사랑에도 다른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하는 뭔가가 분명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입으로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수상 강연을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탁자 아래로는 다리를 잠시도 가만두지 못한 채 발 장난을 하는 베르톨트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마리안네는 직감한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가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금방 눈에 띄는” “좀 드문 사람”, “품위 있는 귀부인”임을 첫눈에 알아본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의 특별한 ‘품위’에 대해 줄곧 상기시키는데, 초면에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고백까지 하게 만든 그 품위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 단지 그들은 ‘문학상 수상식장’이라는 공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둘만 억지로 끌려 나온 이질적인 존재임을 서로 단박에 알아차렸다고 짐작할 뿐이다. 속마음을 숨긴 채 적당히 섞여드는 척하지만, 그 ‘적당히’를 잘 견디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배겨내지 못하는 사람은 들뜨게 되어 있고 또한 동류를 금세 알아본다.

베르톨트가 받은 ‘문학상’ 이름은 ‘상공인협회’ 문학상이다. ‘상공(商工)’과 ‘문학’이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말하는 것은 편견일지 모르지만 왠지 내게는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이 문학상을 제안하고 거액의 상금을 후원한 사업가는 마리안네의 남편 막스 헬데겐이다. 막스에게 문학을 향한 열정이나 애정, 혹은 사명 같은 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문학상 제정이 자기 명성을 높여주고 자기 기업을 좋은 이미지로 광고하는 기회가 되어줄 수 있다는 계산이 섰을 뿐이다. 그가 익명으로 남겠다고 면치레했던 것도 수상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상공인협회 문학상이 막스의 작품임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막스는 돈을 투자해 자신이 얻고 싶었던 것을 모두 얻었다. 누구의 어떤 작품이 수상했는지는 자기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사업상 중요한 일을 밀쳐두고 수상식장에 참석하는 것은 더더욱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막스는 대신 아내 마리안네를 밀어 넣었다.

수상식장에서 남편을 대신하는 마리안네는 결코 ‘마리안네’ 자신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마리안네에게 궁금해 하는 것은 ‘마리안네’가 아니라 ‘막스’이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마리안네의 생각이 아니라 막스의 의견이다. 베르톨트 역시 당분간의 생활비가 아쉬워 마지못해 수상식을 참고 있을 뿐, 자신이 그들만의 성대한 교양 잔치에 근사한 들러리가 되어주는 역할이라는 것쯤은 잘 알았다. 마리안네는 뜨거웠으나 불안정했던 첫사랑의 상처에서 도망치기 위해 성공한 기업가이자 막대한 자산가인 막스의 견고한 성채에 안착해 물리적인 안정을 얻은 대신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그만두었다. 마리안네가 베르톨트의 갑작스러운 고백을 경계하지 않고 100퍼센트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그 말이 그녀조차도 억누르느라 한동안 잊었던 자신을 화들짝 일깨웠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 말이 그녀에게는 이제껏 숨죽이며 기다려온,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버리고 다르게 살아보라는 일종의 신호였을지도.

그리하여 그날 밤, 마리안네는 자신을 다시 발견해 준 베르톨트와 함께 훌쩍 떠나버린다. 마리안네가 가정을 순식간에 버리는 과정(평범하지 않다!)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과연 그들은 황홀한 고백과 사랑에 대한 확신만큼 행복하기만 할까? 그들은 알아가면서 사랑하게 되는 보통 연인들과 달리 먼저 사랑하고 나서 뒤늦게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를 밟는다. 커피에 설탕을 넣는지, 안 넣는지부터 지나간 사람, 어린 시절부터 마리안네가 좋아한 자장가,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베르톨트의 어머니, 그리고…… 서로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에 대해 불안해지는지, 그리하여 결국 무엇을 원하는지까지. 그 단계는 별로 달콤하지 않다. 오히려 당황스럽고 불안하고 괴로우며 이내 슬퍼진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영혼이 교감하는 듯했던 마법의 효력은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졌을 뿐 아니라 자기 마음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자신으로 인해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서로 숨기는 ‘배려’는 상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자괴감으로 이어진다.

가령 마리안네는 다만 베르톨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서 그가 쓴 글이라도 읽으려 했을 뿐인데 베르톨트는 질색한다. 베르톨트가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을 증오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글을 완성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라는 것을 마리안네는 몰랐다. 게다가 그는 자기 일에 대해서는 마리안네의 관심조차 거부한다. 그가 마리안네와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일을 마치고 나면 “늦어도 11월에는……” 일종의 대가로 주어질 미래이다.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지만, 약간의 돈과 낡은 폭스바겐 한 대로 자유를 꿈꿀 수 있는 미래만 말이다. 마리안네는 앞뒤 재지 않고 충동적으로 대담한 고백도 서슴지 않는 남자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힐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남자가 약속하는 11월은 멀었고, 마리안네는 지금 그의 곁에서도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불행해진다. 마리안네가 스스로를 위해 그의 곁에서 존재하려 했다면 그를 떠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마리안네는 그를 위해 존재하고 싶었고, 그를 떠올리면 자신은 ‘방해, 속박, 구속, 짐, 잘못’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리안네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다. 때마침 시아버지가 그녀를 회유하러 찾아왔고 그것은 그녀에게, 막스를 떠나올 때처럼 가방 하나 달랑 싸는 것으로 베르톨트를 버리고 막스에게 돌아가도 된다는 신호가 되어준다. 베르톨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였다고 말하지만 마리안네는 처음에는 그를 버린 게 분명하다. 하지만 마리안네가 베르톨트 곁에서 더는 불행하지 않기 위해 되돌아온 자리는 더더욱 끔찍했다. 그녀의 외도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가짜로 행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리안네는 더욱 움츠러든 채 저들이 마음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할까 두려워하면서 자신이 ‘극복’했음을 증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모욕감 속에 질식해 간다. 드디어 11월, 베르톨트가 마리안네를 막스에게 잠깐 맡겨둔 것처럼 그녀를 당당하게 찾아왔을 때, 그녀는 그를 버렸다는 것을 망각한 채 그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잠깐 떠나 있었다고, 그가 자기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생각한다. 베르톨트가 찾아왔고, 마리안네는 이번에는 가방조차 쌀 필요 없이 막스 앞에서 두 번째로 미련 없이 베르톨트를 따라나선다.

어쩌면 마리안네가 막스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제멋대로 편리하게 떠났다가 돌아왔다가 떠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남편을, 다른 남자를 기다리는 간이역으로 취급하다니! 마리안네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막스도 마리안네를 사랑하지 않았다. 도대체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막스에게 마리안네는 ‘완전한 가정’이라는 평판을 완성해 주는 역할이다. 마리안네가 처음 집을 떠났을 때 막스가 취한 행동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의 분노라고 할 수 없다. 가정이라는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발생한 불의의 사고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였을 뿐이다. 마리안네의 귀가를 환영한 것도 아내의 외도까지 감싸주는 남편의 넉넉한 품이 아니었다. 아내의 부재를 요양으로 눈속임해 둔 임시방편이 들통 나서 자신이 쌓아온 명성에 흠결이라도 생길까 봐 초조해 하던 막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단지 마리안네와 막스의 셈이 맞았다가 어긋나는 일이 반복됐을 뿐이다. 막스의 억울한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막 집을 나선 마리안네와 베르톨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나서 그가 침착하게 발휘한 사업가 기질은 정나미가 떨어지게 만든다.

마리안네처럼 사랑해 보지 않는 이상 ‘그게 정말 사랑이라고?’ 의심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겠지만, 그들이 사랑이라고 하니까 일단 그렇게 믿기로 한다. 『늦어도 11월에는』를 처음 읽어나갈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들의 사랑이 끝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폭로는 황홀한 고백에 죽음의 씨앗부터 심어놓은 노삭이 먼저 했음을 알겠다. 마리안네는 자신과 함께라면 죽어도 괜찮다는 베르톨트를 데리고 수상식장을 빠져나와 자기 집으로 향하다가 “죽음은 영원하다”는 위험 표지판에 문득 눈길을 둔다.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될까? 그리하여 사랑은 죽음처럼 영원해질까? 어쩌면 베르톨트가 낡은 폭스바겐을 사기 위해 무대에 올린 희곡(프란체스카, 파올로, 말라테스타, 단테 이야기)에 노삭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겨 있을 수도 있지만 노삭이 왜 그들 연인을 위해 죽음을 미리 예비해 두었는지 잘 모르겠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결국 하나의 욕구에서 잉태한 것이라지만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다. 죽음이 영원할지라도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이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사랑하는 순간 죽었기 때문에 사랑의 기억만 남더라도, ‘그때 죽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이 통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때 마리안네와 베르톨트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사랑도 남루해졌을 것이다. 곧 낡은 폭스바겐은 고장 날 테고 약간의 돈도 바닥나겠지. 진짜 사랑이든 더는 아니든, 사랑의 과정이 뒤바뀌든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행복해지기 위해 행동할 용기가 되어주고, 그로 인해 좀더 불행했을지라도 행복했다면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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