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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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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명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인간이란 기억마저도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좋았던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오래가며 여러 번 곱씹게 된다. 자신이 준 피해보다는 받은 피해가 더 사무치게 기억나며 반대로 타인에게 받은 도움은 금새 잊지만 남을 도운 기억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다. 하지만 강렬한 기쁨 역시 사무치는 기억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와는 별개로 평범했던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잊어간다. 강렬한 기억은 오래가지만 평범한 기억들은 의외로 쉽게 잊혀지는 존재 역시 인간이다. 그래서 오래된 추리소설 같은 것도 다시 읽을 수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강렬한 기억이 희미해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갑자기 누군가의 이름이 기억이 날 듯 말 듯 아른거리는 느낌 같은 것이 아닐는지.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The Buried Giant』은 이런 기억의 망각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했던 기억, 참혹했던 기억들 모두 안개에 사로잡혀 잊혀져 함께 어울려 사는 존재들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고대 잉글랜드의 안개로 가득한 평원, 토끼굴 언덕에 사는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서로 깊이 사랑하지만 정작 서로에 대한 기억은 없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한 기억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이들 부부 뿐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사람들이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마을에 뿌옇게 내려앉은 안개가 기억을 앗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노부부에게 희미하게 남은 아이에 대한 기억으로 아들을 보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둘의 여행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아들 대신 괴이한 모험담으로 전개가 된다. 젊은 색슨족 전사 위스틴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늙은 기사 가웨인 경이 합류하게 되고 이들은 망각의 안개의 원인을 찾아 여행을 함께 떠나게 된다. 결국 그 원인은 마법에 걸린 용 케리그가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고 이들은 망각으로 알 수 없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또한 덕분에 함께 덮여 있던 아픈 상처들도 되살아나게 된다.

망각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망각은 나쁜 기억들 뿐 아니라 아름답고 행복했던 기억마저 덮는다. 하지만 망각은 마찬가지로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마저 덮어둔다. 망각의 안개를 걷어내는 것은 행복한 기억, 사랑했던 상대를 바로 볼 수 있게 해주지만 참혹했던 기억도 함께 끄집어낸다. 사랑했던 노부부, 젊은 전사과 그의 전우가 된 늙은 기사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참혹한 기억은 끝까지 끄집어내지 않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아무리 참혹한 기억이라도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좋을까. 기억하려는 자와 잊으려는 자, 그리고 잊게 하려는 자. 우리는 현실 역시 소설과 다르지 않다. 잊지 않았는데도 기억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많은 지금 우리의 삶이 더 가혹한 것이 아닌가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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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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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항상 인간에게 시련을 안겨준다.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와 앞날이 창창한 극히 일부의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좌절을 맛본다. 어떤 사람은 곧 포기하고, 어떤 사람은 좌절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삶 속의 좌절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불행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리고 인위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상황과 신체적 능력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방식으로 이를 극복하려 한다.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Nemesis』는 자신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스스로 자신에게 벌을 주고 무너져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애비뉴 놀이터의 감독관인 버키 캔터는 작지만 다부지고 운동신경이 뛰어난 남자다. 자신을 낳다가 죽은 어머니와 범죄자인 아버지 대신 조부와 자랐다. 그는 군인이 되어 참전하기를 원했지만 형편없는 시력 탓에 불가능하게 되자 이것을 자신의 큰 수치로 여긴다.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고 놀이터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고 이런 놀이터의 아이들과 부모들은 친절하고 듬직한 버키 선생을 매우 따르며 좋아한다. 그러던 중 폴리오 유행병이 지역에 번지게 된다. 놀이터의 아이들도 병에 걸려 병원에 실려가고 죽었다. 당신 폴리오는 치료약이나 백신이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했다. 캔터 역시 심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면서도 아이들이 그렇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인지 자책한다. 인디언 힐에 가 있던 여자친구인 마샤는 전염병을 염려해 캔터를 오라고 하지만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캔터는 거부한다. 결국 캔터는 아이들을 두고 인디언 힐에 가지만 아이들을 두고 온 것에 대해, 공포에 사로잡힌 자신을 자책한다.


네메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복수의 여신이다. 필립 로스는 네메시스의 의미를 “운명, 불운, 어떤 이를 골라 희생자로 만드는 극복할 수 없는 힘”이라고 하였다. 버키 캔터는 책의 제목처럼 네메시스의 희생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화 속의 네메시스의 복수는 인간의 분수 넘친 행동이나 지나친 행운으로 성공해 오만해졌을 때에만 벌을 내렸다. 주인공 캔터의 삶은 자신의 첫 번째 불행을 잘못된 방법으로 극복하려 했던 잘못된 선택 때문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삶을 어머니에게 빚졌다고 생각했던 캔트는 자신의 꿈마저 이루지 못하고 전염병으로 무너져 가는 자신과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과 신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향한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무너져버린 삶, 캔터는 원인을 찾아야 했고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 캔터에게 있어서 네메시스는 자책감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분노해 버린 자기 자신일 뿐이었다. 결국 캔터는 자신을 학대하는 데서 위안을 찾았다. 여자친구의 청혼에 폴리오에 걸려 온전하지 못하게 된 자신의 몸을 보이며 더 좋은 남자를 찾아 결혼을 하라고며 거부했고 마지막까지 비참한 채로 남기를 원했다.


너는 늘 이런 식이었어. 너는 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지를 못해. 한 번도! 너는 늘 네 책임이 아닌 것까지 책임을 지려고 해. 끔찍한 하느님이 책임을 지거나 끔찍한 버키 캔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책임은 둘 중 누고에게도 있지 않아. <p.260>


메르스가 잠잠해졌다. 당국의 안일한 대처로 사람들이 죽어가도 비아냥거리던 인간이길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 메르스 보균자가 되어 바이러스를 퍼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을 탓했던 사람도 있었다. 소설 속의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을 때의 공포감, 그보다 더 지독한 현실이 우리 곁을 스쳐지나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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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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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대한민국에는 자발적 노예들이 많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어도 엄연한 사실이다. 자발적 노예들은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처한다. 옆집의 자그마한 행복에는 무시무시한 증오와 질투를 퍼붓다가도 거대한 부정에는 노예근성이 자연스럽게 발동해 주인님들의 편을 들어준다. 최저임금을 30원 올리는 것에는 치를 떨면서도 대기업이나 정치인의 부패에는 국가 경제에 해가 된다며 눈을 돌린다. 세상은 이렇게 대물림되었다. 젊은이들의 고통을 너희의 노력 부족 때문이라고 당연한 듯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뒤따라오는 말 ‘우리 때는 안 그랬어’ 그래, 그 때는 노력하면 조금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라도 있었겠지. 일본에 사토리 세대라는 것이 있다. ‘깨달음’의 세대라는 것인데 자동차는 운전하지 않고, 브랜드품은 관심이 없고, 연애에 대해서는 담백한 요즘의 젊은이들을 말한다. 한국에는 삼포세대라고 한다.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말한다. 아버지 세대들처럼 열심히 살면 그만큼 보상을 해주는 사회는 끝나고 무얼 해도 더 나아질게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냥 하루하루를 버티자는 깨달음을 얻은 젊은이들, 그런 세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간 주인공 계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대화 형식으로 들려주는 소설이다. 종합금융회사 신용카드팀 승인실에서 일을 하던 계나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전쟁과 같은 삶처럼 사는 현실에 절망하고 사표를 제출한다. 나름 좋은 학교를 나와 나름대로 대기업에서 일하며, 오래도록 만나온 남자친구까지 있는 삶이다. 그런 그녀는 왜 떠날 결심을 했을까. 스스로 한국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추운 날씨는 물론이거나와 치열한 삶으로 포장되는 경쟁구도, 그만큼 모든 것을 참아야 하는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반대를 무릎 쓰고 오히려 미래가 더 불안할 수도 있는 호주로 향한다. 가족과 남자친구는 눈물로 만류했고 주위의 사람들은 외국병이라며 비아냥거렸다.  국수 가게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학원을 수료했고 방학기간 동안 남자친구에게 청혼에 가까운 고백을 들었지만 계나는 다시 호주행을 택한다. 첫 번째 호주행이 한국이 싫어서였다면 두 번째의 출국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였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자기 손에 움켜쥐고 싶어서 한국을 떠났다.

계나는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성공한 삶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계나 정도만 되어도 살만하겠다라고 생각할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주인공 계나의 삶은 사토리 세대의 삶이나 삼포세대의 삶과도 다르다. 이런 젊은이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지쳐 온전히 떠날 생각조차 못한다. 낭만적으로만 보이는 호주의 삶 역시 사회의 톱니바퀴의 일부분일 뿐이고 낙원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저 ‘이민가고 싶다’를 내뱉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이 사토리 세대의 삶이고 한국의 삶이다. 그저 꿈만 꾸고 있을 뿐인 매일 똑같은 삶. 수많은 젊은 세대들은 이런 노예의 삶에서 자신의 반짝이는 족쇄를 자랑하는 지경까지 왔다. 대기업 직원은 중소기업 직원을 깔보고 더 나은 사람을 질투한다. 기성세대를 욕하면서 닮아가는 세대, 욕하면서 닮아가는 사회. 하지만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꼭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다. 최소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 미래가 두렵지 않은 나라를 바라는 것이 그렇게 큰 것일까. 그저 최소한의 희망을 원하고 있을 뿐인데?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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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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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에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탐정이라는 말을 듣고 이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셜록 홈즈’ 미스터리 쪽에서 불멸의 단어가 된 홈즈를 창조해 낸 코난 도일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홈즈만큼 알려져 있지는 않다. 불멸의 캐릭터를 창조한 작가였지만 피상적으로만 알려진 그의 삶은 실제로는 어떤 것이었을까? 줄리언 반스는 『용감한 친구들』을 통해 홈즈의 작가인 코난 도일과 그가 실제로 무죄를 입증했던 사건인 조지 에달지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야기는 아서와 조지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1장과 2장에서는 아서와 조지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는 구성으로 유년 시절과 성장 과정, 가족 관계, 성인이 되어 소설가와 사무변호사로 살아가기까지 각자의 삶이 어떻게 달랐으며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자라온 과정을 비교하여 보여준다. 어머니의 마법처럼 들려주던 이야기를 들으며 관찰력과 상상력을 키웠던 아서는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고 목사인 아버지의 말을 진리처럼 듣고 자란 조지는 부족함을 느꼈던 아버지의 말을 대신해 간결하고 명료한 법의 체계에 관심을 갖게 되고 사무변호사로 살아간다. 게다가 조지는 인도계 혼혈이었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으며 가족 역시 피해를 입는다. 성인이 된 후 조용하고 소박하게 사무변호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레이트 웨얼리 잔학 행위’라는 가축에 대한 도살 범죄로 조지가 지목되고 조지의 삶은 경찰, 검찰과 배심원들의 혼혈이라는 이유 없는 증오심 때문에 유죄를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조지는 형기를 마치고 출감했지만 그의 지위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했음에도 조지는 자신의 삶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한편 아서는 셜록 홈즈라는 사상 초유의 탐정을 만들어 낸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다. 독자들은 아서와 홈즈를 동일하게 여겨 아서에게 온갖 의뢰 편지를 보내게 된다. 그런 아서에게 도착한 조지의 편지를 보고 그를 만나게 된다. 그를 본 순간 조지가 근시라는 것을 보고 그가 무죄임을 직감하게 되고 그가 창조해낸 홈즈처럼 자신이 직접 수사를 시작하게 된다.

아서와 조지의 삶은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된 후에도 크게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타인에 의한 비난을 받았다는 것이다. 조지는 어린 시절부터 타인에게 삶을 배척당했고 성인이 된 후에는 사법 체제마저 타인의 시선으로 그를 심판했다. 아서는 홈즈를 창조한 후 타인에 의해 끊임없는 참견과 비난을 들었다. 실제로도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를 죽게 한 후 엄청난 편지로 타인의 비난을 들었다고 하니 이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 간섭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일까. 과거의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도대체 우리의 삶이 과거에 비해 나아진 것은 편리함 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세기 말의 영국의 이야기는 현재 우리의 삶과 다를 것이 무얼까. 네트워크의 발달은 타인에 대한 편견과 악의, 광기로 가득찬 비난을 더욱 쉽게 만들어주고 비난의 당사자는 구체적인 사실을 알지도 못한다. 현재의 우리의 삶이라고 다를까. 혼혈뿐만이 아니라 지역으로도 타인을 비하하고 악의에 찬 말들을 한다. 정당한 비판은 악의로 가득 차 있거나 목적을 가진 비난에 의해 묻혀버린다. 삶은 다채로워진 것처럼 보이고 편안함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지만 인간의 본질은 과거에 비해 더 드러나기 쉬워졌고 변한 것도 없다. 줄리언 반스는 이 이야기를 통해 현대의 삶을 재조명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번역서를 보다 보면 궁금한 점이 있는데 책의 번역 제목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아서와 조지 Arthur & George’인데 번역본의 제목은 ‘용감한 친구들’이다. 일단 두 제목 간의 개연성이 없을뿐더러 실제 책 내용과도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출판사의 여러 사정도 있겠지만 이런 제목을 볼 때마다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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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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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결백하거든. 반면에 저 친구는 유죄야.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체포되었겠지. 그런 희생자들, 그렇게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는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 그러다가 그들이 죽으면 그들에 관한 말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해.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게 더 관심이 많다는 느낌이 들 정도야.” (2권, p.465)

가끔 소설이나 영화 등을 보게 될 때 제목이 현재의 상황을 너무나도 잘 반영하는 경우가 있어 놀랄 때가 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의 제목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야기, 현실의 삶과는 다르다. 삶을 위협하는 현실 속에서 낙천주의자가 되기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낙천주의자란 무언가 희망이 보일 때나 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은 이야기처럼 극적이진 않지만 이야기보다 훨씬 가혹할 때가 많다. 삶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도 별일 없이 낙관적이 되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글프게도 우스운 것은 이런 강요된 낙관주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가난을 면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면 사람은 낙관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알제리 전쟁이 한창이던 프랑스 사회는 시끄러웠다. 전쟁이 격렬해지고 잔혹해지자 전통적인 좌우의 대립구도마저 무너졌다. 국회의원은 여전히 자기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미셸의 집안은 가난한 친가와 부자인 외가가 뒤섞여 서로를 조롱했다. 하지만 미셸은 이런 어른들의 언쟁과 소동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저 로큰롤, 문학, 사진, 테이블 풋볼에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테이블 풋볼을 하러 간 비스트로 (작은 규모의 카페 겸 식당) 발토의 녹색 커튼이 쳐진 문으로 레인코트를 입은 사람이 사라졌다. 폐쇄된 공간, 호기심에 이끌린 미셸은 커튼을 젖혔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라는 글귀 뒤로 보인 것은 체스클럽이었다. 미셸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텔레비전에서나 보았던 장폴 사르트르와 조제프 케셀이 체스를 두고 있었다는 것. 미셸은 호기심 덕분에 클럽에 계속 가게 되고 클럽의 최연소 회원이 되고 서로를 알아가게 된다. 회원들의 대부분은 동구권 국가에서 망명해온 사람들로 가족을 떠나 온 사람,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낀 사람, 고국에서 누리던 명예와 지위를 잃은 사람들이다. 미셸은 이들과 어울리며 체스를 배우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간다. 미셸의 삶은 록 음반을 빌려주던 친구의 전사와 살인사건과 관련된 형의 행방불명, 부모의 이혼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되고 체스클럽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게 된다. 미셸은 클럽에서 말없이 왔다가 가는 환영받지 못하는 사샤를 만나게 되고 가까워진다. 그와의 우정이 계속되지만 그는 결국 클럽의 한 복판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된다. 미셸에게 주는 유서와 선물을 남기고 간 사샤의 죽음으로 그가 간직했던 비밀도 밝혀진다. 비가 오던 사샤의 장례식이 끝나고 날씨는 다시 좋아졌고 여름이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좌우 대립과 알제리 전쟁을 둘러싼 프랑스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미셸 집안의 모습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의 대립은 친가-외가의 대립구도 그대로이며 중재를 택한 아버지 폴과는 달리 형인 프랑크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외가와 대립하게 된다. 체스클럽에서의 미셸의 어린시절, 사샤와의 만남, 사샤의 죽음과 미셸에게 남겨진 편지는 고통 속에 남겨 있던 역사의 종언과 동시에 희망을 보려는 몸짓이다. 우리에게도 현재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겨질 수 있을까?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은 네가 새로운 세대의 일원이기 때문이야. 너희 세대는 우리가 겪은 끔찍한 일들을 경험하지 않았어. 우리는 끔찍한 일들을 피할지 몰랐고, 그것들을 겪으며 죄를 지었지만 너는 달라. 망각에서 구원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너는 알아낼 거야. 아름다운 것은 기억 밖에 없어. 나머지는 먼지고 바람이야.” (2권, p.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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