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의 불행학 특강 - 세 번의 죽음과 서른 여섯 권의 책
마리샤 페슬 지음, 이미선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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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목침 두께의 소설을 단숨에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때 해야 할 일들만 아니었으면 정말 그러고 싶었다. 딸 블루와 아빠 가레스는 내가 지금까지 책에서든 현실에서든 어디에서든 봐온 부녀들 중에 가장 근사한 관계였으니까. 이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지인에게 블루와 가레스 부녀에 대한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을 때, 지인은 내 이야기만 듣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롤리타와 험버트를 부녀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전혀 연관시키지 못했는데, 그제야 어느 점에서는 닮았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년 남자와 소녀의 여행이라는 『롤리타』의 콘셉트를 교묘히 비틀어 쓴 데뷔작(※출판사 보도자료)”이라는 문구도 보인다. 그러나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지금은 특별한 ‘부녀(父女)’에 대한 수다를 떨고 싶다.

가레스는 사실 평범한 아버지가 아니다. 우리 아빠를 보통 가정의 보통 아버지 기준이라고 가정해 비교하면 꽤 색다르고 신선하다. 우리 아빠는 선량하고 다정다감하며 헌신적인 남자이다. 자식 우선의 가정 이외에는 눈길 줄 데도 가져보지 못한 아빠는 대신 자식에게 당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걸었다. 그래서 자식이 먹으면 당신도 먹은 셈치고, 자식이 입으면 당신도 입은 셈치고, 자식이 아빠와는 상관없이 자기 의미와 행복을 찾아 뭔가를 누리면 당신도 누린 셈친다. 가령 우리 아빠는 당신이 읽지 않을 책이라도 그 책을 좋아하는 자식에게 사 주는 것으로 자식과 함께 당신도 읽은 셈친다. 고된 노동과 빠듯한 살림으로, 더구나 자식만 바라봤던 아빠의 삶에 자신을 위해 책을 사고 읽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잘 알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게 가장 아쉬웠나 보다. 아빠와 책 이야기를 정신없이 나눌 수 없다는 것. 가레스에게 흥분했던 것은 그가 딸이 지겨워질 정도로 책 이야기를 나누려는 아빠였기 때문이다.

가레스의 아내이자 블루의 엄마가 진귀한 나비 표본 몇 점만 남긴 채 납득하기 어려운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었다. 정치학 교수인 아빠 가레스는 아내의 돌연한 죽음 이후 딸 블루를 데리고 아내랑 살던 집과 하버드대를 떠나 미국 전역을 떠돈다. 다행히 가레스가 저명한 정치학자로 설정되어 있는지라 그가 가는 곳마다 일류부터 삼류까지 그를 환영하는 대학들은 널려 있다. 즉 한곳의 안정적인 월급만을 바라고 얽매이지 않아도 먹고살 걱정은 없다. 아무튼 그는 길게 잡아도 일 년을 넘기지 않고 짧으면 일 년에 두세 번까지 옮겨 다닌다. 이때 그의 원칙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무조건 자동차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 차 안에서 길디긴 이동 시간 동안 가레스는 블루와 함께 온갖 책들을 탐독하고 진지하게 책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를 따라 전학이 일상이 되어버린 블루의 진짜 교육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문학(물론 서구 중심의 목록, 이 소설의 배경이 미국이니까) 고전부터 아빠 전공인 정치학은 물론 인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학문 분야의 어려운 책들, 이런 책까지 실제로 있을까 싶도록 신기하고 우스꽝스러운 제목의 책들(아마도 이런 책들은 작가가 지어낸 목록일 터)까지 섭렵한 데다가 “항상 네가 한 말에 출처를 밝히렴”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빠에게 길들여졌으니, 블루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 소설에 다채로운 각주가 무수히 달리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단지 그 각주들이 이야기 속에 유기적으로 녹아들지 못해 이야기의 흐름에는 대체로 불필요해 보인다는 것이 아쉽다. 그래도 그것으로 아빠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에 있는 블루의 강박을 드러낼 의도였다면 성공적인 장치인 듯하다. 사실 블루는 ‘파파걸’이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아버지는……”으로 시작한다. 꽤 곁가지로 흐르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특별한 책상을 선물할 줄 아는 아빠라면 나도 별수 없었을 거라고 인과관계 따질 새도 없이 고개부터 끄덕여진다.


나는 좋은 책상이 탐난다. 상판이 널찍하고 아주 두툼해서 이 책 저 책 펼쳐서 마음껏 늘어놓아도 충분하고, 웬만큼 책탑을 쌓아놓아도 휠까 봐 걱정할 필요 없는 책상. 폐업한 식당의 식기며 탁자며 의자며 사들여 말끔하게 손질해 되파는 동네 중고 물품점에서 내가 딱 책상으로 쓰고 싶은 탁자를 발견한 적 있지만 우리 집에는 그 커다랗고 묵직한 탁자를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 특별한 디자인이랄 것도, 색다른 장식이랄 것도 없이 소박하게 상판과 네 다리가 아주 튼튼하기만 한 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투박하지만 자꾸 쓸수록 내 움직임에 편안하게 길들여 오래된 친구에게처럼 정붙일 수 있을 텐데. 그때 두 눈 딱 감고 일단 집 안에 들였으면 어떻게든 공간이 만들어졌을까? 부족한 공간을 염두에 두고, 그 탁자 대신 다른 빈약한 원목 책상을 훨씬 비싸게 들였는데 지금도 별 마음이 가지 않는다. 아빠 가레스가 (“온갖 훌륭한 생각의 나래”를 펼치길 바라면서) 딸 블루에게 평생 쓸 책상을 선물하는 장면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그때 내가 놓친 책상을 내내 아쉬워하는 와중이어서일까?

“놀랍게도 내 낡은 시민 케인풍 책상에 창문 옆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8년 전 () 내가 썼던 엄청나게 큰 르네상스풍 호두나무 책상이었다. 아버지는 숨 막힐 듯이 더운 어느 일요일 오후에 골동품상에게 이끌려서 힐리어 저택에서 열린 세일에 갔다가 이 책상을 보게 됐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그 책상을 봤을 때(그리고 다섯 장정이 낑낑대며 그것을 겨우 경매대 위에 올려놓았을 때) 아버지는 책상에 앉아 있는 내 모습만 떠올렸다고 한다(나는 그때 팔을 펼쳐도 책상 너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여덟 살짜리에 불과했다). 그는 액수를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거액을 지불했고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이것은 “내 딸 블루가 온갖 훌륭한 생각의 나래를 펼칠 책상”이라고 선언했다. () 책상을 두고 떠나야 했을 때, 나는 정교한 맹금 발톱 다리와 각각의 열쇠가 필요한 서랍이 일곱 개 달린 거대한 책상을 두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구간에 검은 조랑말을 두고 떠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엉엉 울며 아버지를 파충류라고 불렀다. () “그런데 그것을 다시 사서 배송하는 데 얼마나 들었어요?” () “600달러 들었다.” () 아버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 또한 책상 밑을 살피다 보니 한쪽 다리에 작은 빨간색 가격표(1만7000달러)가 아직도 붙어 있었다.”

아빠 가레스에게 후한 점수를 준 것은 그가 딸을 위해 준비한 책상이 고가의 근사한 앤틱 가구이기 때문은 아니다. 책상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 얼마나 특별할 수 있는지, 그 책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될 수 있는지 알았다. 그리고 딸은 이제 스스로를 책임지며 주도적으로 살아가야 할 시기에 돌입했다. 뭔가를 읽고 쓸 때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궁리하고 고민할 때마다 무수히 마주 앉게 될 책상이니만큼 특별한 책상을 선물해 주고 싶은 아빠의 그 마음이 소중하다.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이 책상이 아빠의 마지막 선물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으면 더욱 애틋해진다.

블루는 이 책상 앞에서 미심쩍은 죽음(엄마의 교통사고) 한 번과 사고사 혹은 자살로 위장되는 살인 두 번과 아빠의 증발 사이에 빈 이야기를 메워나간다. 연결 고리가 헐거워 보이는 이 사건들의 열쇠는 가레스의 정체이다. 가레스가 딸 블루에게 한사코 숨긴 비밀과 닿아 있는. 그리고… 절대적인 신뢰로 아빠에게 밀착되어 있었던 블루가 드디어 아빠의 사고 범위를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시작한다. 이지적인 혹은 문학적인 분위기〔‘불행학 특강(Special Topics In Calamity Physics)’이라는 제목 아래 고전과 소설을 포함한 책 36권의 제목을 빌린 36강과 기말고사라는 커리큘럼 형식부터 무수한 각주까지(각 강의 제목으로 제시된 책이 이야기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 책이 각 강을 읽기에 앞서 필독서라고 말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의 분위기는 짐작해 볼 수 있겠다)〕와 추리소설 같은 분위기가 이 소설에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흥미를 높여주긴 하지만, 이 소설은 결국 아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딸이 자기 눈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성장소설이다. 바로 그 점이 긴 이야기와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충분히 매혹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계속 넘기게 만든다. 처음 마주하는 세상이 배신투성이일지라도 오롯이 자기 눈으로 세상의 기만까지 직시한다는 것은 멋지고 용감한 일이다. 언제까지고 동화 속에서 살 수는 없다. 각색되지 않은 동화는 없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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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당하고 싶은 여자
우타노 쇼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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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작가가 유명해지면 좋은 점은 과거에 출간된 작품까지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들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기는 하지만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로 유명한 우타노 쇼고도 꽤나 많은 작품들이 출간되었다. 작가는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덕분에 서술 트릭으로 유명한 작가로 알려졌지만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신본격의 대표적 작가다. 최근의 작품이었던 『밀실살인게임』 시리즈를 보면 말 그대로 추리소설만을 위한 무대를 설정하고 그에 걸맞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본격의 놀이터라고 주장하는 느낌이랄까. 이런 그가 1992년에 발표한 납치 미스터리라는 이 소설 『납치당하고 싶은 여자』는 우타노 쇼고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줬을까.

하루하루를 파리만 날리느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구로다는 경마 빚까지 지고 있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미모의 재벌가 유부녀가 나타나 상상하지도 못한 의뢰를 한다. “저를 납치해 주세요.” 구로다를 깜짝 놀라게 한 그녀는 유명 커피숍 체인점의 사장인 다카유키의 아내인 사오리로 최근 남편의 애정을 시험해 보기 위해 이같은 가짜 납치극을 하려는 것, 돈에 궁했던 구로다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이고 가짜 납치극을 계획한다. 구로다는 사오리를 빈 친구의 맨션에 가게 한 후 협박전화를 걸어 아내의 납치를 알리고 현금을 요구한다. 남편인 다카유키는 경찰에 신고후 구로다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 현금을 마련해 연락장소에 가지만 구로다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다카유키의 누나를 속여 아들의 몸값을 가로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고 사오리에게 알리기 위해 맨션에 온 구로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가짜로 납치된 사오리가 살해된 것이다. 영락없이 살해범으로 몰리게 된 구로다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오면서 사건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응답하라 1991, 출판사의 시대의 유행을 반영한 소개 문구―과연 이런 문구가 효과가 있는지는 뒤로 하고라도―처럼 이 이야기는 과거의 소설이다. 카폰과 삐삐, 전화사서함 서비스라는 이미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소재들이 트릭으로 등장하는 까닭에 현재의 눈으로 보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시대를 감안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수많은 고전 추리소설들도 사랑하니까.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작가의 작풍이다. 이 이야기는 트릭에 대한 집중이라기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신경을 많이 쓴 느낌이다. 자신을 납치해 달라는 미모의 여성과 가짜 납치극이 실제 살인 사건으로 벌어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힌다. 거창한 책 소개글처럼 충격적인 결말과 허를 찌를 정도의 반전―책이 출간된 당시라면 결말과 반전이 조금 더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은 아니지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최근작인 『밀실살인게임』 시리즈보다는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에 더 가까운 작품으로 과거의 우타노 쇼고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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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글 쓴 남자, 안개 속의 살인
시마다 소지 지음, 이윤 옮김 / 호미하우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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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에야 어느 분야에서건 장르를 규정짓는게 우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순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마저도 모호할텐데 단일 장르에서의 구분은 오죽할까. 일본 추리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격 추리소설이 쇠퇴하고 사회파가 득세하더니 신본격이 등장하고 하드보일드에 코지 미스터리까지 장르는 세분화되어 있지만 사실 한 작품을 어느 장르 안에 우겨넣기에는 현대 소설의 복잡함이 이를 거부한다. 작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리라. 자신의 작품이 어느 한 장르에 구속되어 있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고, 그래서 작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캐릭터 속에 녹여 낸다. 이것은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독이 될 수도 있고 달콤함이 될 수도 있다.

『점성술 살인사건』,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시마다 소지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미스터리와 함께 융화시켜 풀어내는 작풍을 가진 작가지만 신본격의 거장이라는 평답게 절묘한 트릭과 미스터리가 논리에 의해 해결되는 이야기를 그리는데 탁월하다. 특히 우울한 탐정 미타라이 기요시와 이와 반대되는 캐릭터인 요시키 다케시 형사 시리즈는 '시마다 소지의 작품이란 이런 것이다'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개인적으로 트릭 계열 추리소설의 팬이기 때문에 신작인 『고글 쓴 남자, 안개 속의 살인』에서는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궁금했다.

안개가 자욱한 밤, 순찰을 돌던 경관이 고글을 쓴 남자를 목격하고 그의 고글 속이 피처럼 붉게 물든 것을 발견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그냥 지나치게 된다. 하지만 마을의 담배가게 노인이 살해되고 현장에 남겨진 노랗게 물든 5천 엔 지폐와 고글을 쓴 남자가 목격되면서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한편 인근의 마을에서는 국책사업인 원자로의 연료를 생산하던 회사의 사고로 직원이 피폭당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한다.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아 보이던 이 사고에 고글을 쓴 남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수사 끝에 그를 체포하여 감금하지만 다른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피로 물든 고글을 쓴 남자를 보았다는 목격정보가 나오게 되자 사건은 해결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고 고글을 쓴 남자는 도시괴담처럼 번지게 된다. 두 사건은 과연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고글을 쓴 남자는 과연 사고의 망령일까.


미타라이 기요시나 요시키 형사를 기대했지만 새로 등장한 캐릭터는 다나시와 사고시 형사 콤비다. 좋게 말하면 리얼하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런 매력이 없다. 미타라이 기요시의 예리함도, 요시키의 매력도 없는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캐릭터라 작가가 이야기의 신비함을 더하기 위해 일부러 캐릭터를 완화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트릭과 해결이라는 측면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느낌이 달랐다. 시마다 소지의 작품이 이야기의 환상적인 측면을 표현하는데 강점이 있는 작가이긴 하지만 평가 그대로 신본격 추리소설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는 조금 아쉬울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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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창비세계문학 16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이한정 옮김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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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아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이미지에는 성(性)적인 부분이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서양 쪽 사람들이라면야 닌자, 스시, 섹스 정도겠지만 일본에 대해 익숙하다면 일본의 성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개방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호불호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처럼 성을 꼭꼭 숨기고 추잡한 짓을 하는 것과 드러내 놓고 하는 것의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다만 일본의 성(性)은 우리처럼 터부시되는 것이 아니며 그런 인식이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열쇠』는 탐미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의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70세에 발표한 작품으로 가장 원초적인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터부시되는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56세의 남편과 45세의 아내의 섹스 이야기가 둘의 일기에, 서로 훔쳐본다는 전제로 쓰인 것이다. 이 정도라면 평범한 듯싶지만 남편의 제자와 아내의 이야기, 이를 묵인하고 부추기며 흥분하는 남편이라면 다를 것이다. 논란이 되긴 했지만 이 작품이 1956년에 쓰인 것이니 일본이라는 나라의 성(性)에 대한 인식은 역사가 깊다.

대학교수인 남편은 아내가 섹스에 적극적이지 않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만 음욕이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그 욕망을 제대로 충족시켜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아내를 만족시키기 아내와 무리한 성관계를 지속한다. 아내는 유교적인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 조신하고 기품 있게 행동하려 하지만 가슴 속에 숨겨진 욕망에 몸을 떨고 있다. 아내는 남편의 섹스에 전혀 만족하지 못한다. 이런 성적인 갈등 관계에 딸과 결혼할 예정인 남편의 제자가 등장하게 된다. 제자와 점점 가까워지는 아내를 보는 남편은 질투를 느끼게 되지만 그 질투는 비뚤어진 성적판타지로 나타나게 된다. 남편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욕망이 더 커져버린 아내는 제자와 관계하며 자신의 음욕을 채운다. 뿐만 아니라 제자와 결혼하기로 한 그들의 딸은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기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가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열쇠』는 인간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인 성(性)을 가장 비밀스러워야 할 일기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비밀스러워야 할 것들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일기는 서로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여 있고 남편은 제자와 아내를 묵인하고 딸은 오히려 둘의 욕망을 도와준다. 남편과 아내, 제자의 관계는 흔한 에로물이 될 수도 있고 예술이 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의아한 것은 딸이다. 왜곡된 인간의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기 위해 등장시킨 것일지는 모르지만 결국 드러나지 않은 딸의 속내는 알 수 없어 아쉬웠다. 제목이기도 한 『열쇠』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섹스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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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넘브라의 24시 서점
로빈 슬로언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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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여전히 종이책은 많지만 그것에 대한 관심은 줄었노라고. 나이가 어릴수록 책보다는 디지털기기에 관심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할 듯싶다. 터치 한 번에 웹사이트, 동영상, 게임, 디지털로 된 책까지 휙휙 바꿔볼 수 있으니 무겁고 빽빽하게 글자가 들어찬 책에 관심이나 있을까. 서점도 마찬가지다. 값싸고 편한 온라인 쇼핑은 동네 서점을 멸종시켰고 대형 서점만 남아 있는 것이 현대의 우리 모습이다. 몇몇의 사람들은 종이책은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나 역시 종이책을 훨씬 더 사랑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어떤 모습일까? 특히 유행에 민감하고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는 우리나라―최신  기술 자체를 흡수한다는 것이 아니라 최신 기술로 생산된 제품을 흡수한다는 것, 그에 반하는 것들은 빨리 사장시켜버리는 것은 우리만큼 빠른 나라가 있을까―에서만큼은 서점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낯선 것임에 틀림없다. 이미 서점이라는 말 자체가 향수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로빈 슬로언의 『페넘브라의 24시 서점』은 어쩌면 이런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 자체도 트위터 회사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이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하니 오늘날 서점의 이야기로는 딱 맞지 않은가. 실제 이 이야기는 오래된 고서점과 구글러와 컴퓨터라는 디지털로 대표되는 이야기가 맞물려 펼쳐진다. 이렇게 배경만을 놓고 보자면 현실에 너무 가까운 이야기가 아닌가 싶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판타지에 더 가깝다.

평생 <용의 노래 연대기>라는 한 권의 책만을 읽은 클레이 재넌은 디지털 회사에서 실직 후 우연한 기회에 '페넘브라 24시 서점'의 구인광고를 보고 야간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손님도 오지 않는 이 서점이 왜 24시간 문을 여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점 뒤쪽의 책을 한밤중에 헐레벌떡 달려와 빌려 가는지 궁금해 하던 주인공은 서점의 규칙을 어기고 비밀의 책을 열어보게 되는데, 책은 수상한 암호 같은 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컴퓨터의 3D 모델링 언어를 이용해 이 암호를 해독해 냈지만 이 일을 계기로 500년 동안 영업을 해 오던 페넘브라 서점을 불은 꺼지고 주인은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재넌은 친구들과 행방불명된 페넘브라 씨, 그리고 500년에 걸친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든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아날로그적인 활자와 디지털의 이야기가 맞물려 있지만 뒤로 갈수록 판타지 어드벤처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며, 그 시작만큼은 흥미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비밀결사처럼 보이는 단체의 암호 해독을 통해 영생을 뒤쫓는 이야기와 그 진정한 의미가 밝혀졌을 때의 그 허탈함이라니, 활자가 가지는 의미를 안다면 이런 뻔한 클리셰였던가 하고 씁쓸한 맛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재미있다. 먼지가 훌훌 날리는 고전적 암호로 가득한 고서와 디지털 북스캐너가 등장하는 이야기라니, 우리는 지식에 관한 한 아날로그 최후의 보루인 종이책과 최첨단의 기술 사이를 모두 경험하고 있는 즐거운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활자의 발명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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