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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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텍스트를 읽어내는 데에는 특별한 재주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끈기, 어느 수준의 지적 능력, 그리고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특별히 엉망인 번역서나 이해할 수 없는 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이론이 아닌 다음에야 위의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읽어내지 못할 텍스트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이 지루하고 복잡하고 난해할 뿐이어서 견디어내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몇 문장(또는 한 문장)을 읽고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고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가야 한다. 각각의 문장은 모호하며 갑자기 이런 문장이 왜 튀어나왔는지도 알기가 힘들다.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다. 대체 누가 이것을 즐겁게 여길 것인가. 문제는 로베르트 무질의 이 작품은 난해한 텍스트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력과 끈기로 극복하기 어려운 사유의 세계는 더 크게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어떤 예술 분야에서건 다른 것들에 비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작품들이 있다. 대개의 경우 저자가 고통 속에서 죽고 나서야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의 평가는 더욱 그러하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는 달리 이 작품은 처음 들어본 독자들이 많을 것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밀란 쿤데라와 존 쿳시 같은 현대 작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친 20세기의 가장 독특한 ‘사유 소설’이라는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무질이 활동하던 당시의 시대는 철학, 언어학, 음악, 미술의 온갖 문화 속에 사상이 넘쳐나는 곳이었고 이런 사상의 흐름을 작품에 투영시켰다. 뿐만 아니라 무질은 학문적 사고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삶에서 나온 ‘결정적 사유’를 자신의 소설에 투영시켜 연구실에서 나온 논문 같은 글이 아니라 소설로서 완성했다. 이런 작품의 배경 말고 실제 책은 어떨까? 사유 소설이 형식적으로는 어떤지를 알기 위해서라면 책의 첫 문단을 읽어보면 바로 알게 된다.


“대서양 상공 위로 저기압이 걸쳐 있었다. () 그리고 일정치 않게 변하는 월별 온도에 비해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 대기 중 수증기는 최고의 장력을 유지했고, 습기는 아주 적었다.”


바로 이어 나오는 문장은 위의 이야기들을 한마디로 표현해 준다.


“좀 구식이긴 하지만 사실을 꽤나 잘 드러내주는 한마디 말로 하자면, 때는 1913년 8월의 어느 청명한 날이었다.”


평행운동이라 이름 붙여진 애국주의 운동은 주변국에 평화의 의지를 알리고 물질의 세계에 맞서 영혼을 구하자는 취지와는 달리 지식인들의 자기주장에 그쳐버리게 되고, 이미 몰락해 버린 귀족을 흉내 내던 자본과 결합된 시민 사회의 천박함과 허위의식은 욕망으로 넘쳐 전쟁과 같은 집단적인 분출 의지로 바뀐다. 지식인들이 꿈꾸던 이상은 주인공 울리히의 사유처럼 ‘불충분한 근거의 원리’에서 비롯되어 끊임없이 소비되는 ‘현대적 전율’에 불과했고 전쟁과 파시즘을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었다. 지식인이나 전문가 사회의 정신적인 과잉은 대중들에게도 의식의 무감각함을 전파하게 된다. 울리히는 이런 사회의 넘쳐나는 이상론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정신과 영혼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만의 사유 속에 잠긴다.

누가 이 소설을 제대로 읽어낼까? 책을 잡게 되면 사유와 또 사유의 늪에서 허덕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몰락한 귀족을 흉내 내는 천박한 시민들처럼,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읽어내기에는 정신적으로 궁핍한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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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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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어떤 작품이라도 하나의 틀에 가두기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겠지만 소설 속에서의 장르는 단지 쇼핑몰의 카테고리 분류를 위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러 장르가 뒤섞인 작품들이 많다. 몇 십 년 후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가 모두 SF가 아닌 것처럼 사건이 발생하고 이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등장한다고 해서 모두 추리소설인 것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추리소설협회에서 주는 최고의 상을 받았다고 추리소설의 카테고리에 묶어버리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장르의 구분은 이제 큰 의미가 없다.

토머스 H. 쿡의 『붉은 낙엽』이 바로 이런 이야기다. "이 작품은 미국추리작가협회상, 앤서니상, 배리상 수상에 빛나는 토머스 H. 쿡의 장편 추리소설이다"라는 책 소개가 첫머리에 등장하지만 이 작품은 추리소설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저 많은 상들은 뭐냐고? 그들은 추리 요소가 있는 좋은 작품에 상을 안겨줬을 뿐이다. 좋은 작품에 상을 주는 것이 상 자체의 권위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니까. 『붉은 낙엽』은 좋은 작품이지만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운 작품이다. 당연하겠지만 둘 사이의 가치 평가의 기준에 따른 이야기가 아니다. 순문학이 추리소설보다 우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작품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너무 멀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 자체가 추리소설의 굉장한 마니아이기 때문이다.

에릭은 자신의 가족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부인 메러디스와 조용한 아들 키이스가 있는 가족은 에릭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그에게는 가족을 잃은 아픈 과거가 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조용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옆집의 에이미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이 발생하던 날 에이미의 베이비시터 역할을 했던 아들 키이스, 수사는 시작되고 경찰은 키이스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게 된다. 에릭은 아들을 믿지만 조금씩 커져가는 의심과 거짓에 절망한다. 사소해 보였던 행동들마저도 오해가 쌓여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아들에 대해 커져가는 의심 속에서 과거 자신의 어머니의 자살과 아버지, 죽은 여동생과 착하지만 무기력하게 남아 있는 형…… 과거의 가족이나 현재의 가족 모두가 의심스러운 상황이 된다.


제 아무리 단단해 보이는 차돌이라 하더라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실금이 있다면 부서지기 쉬운 법이다. 약간의 충격만 가하면 그 실금을 따라 갈라지고 많다. 인간이라고 다를까. 아니 인간처럼 어떤 계기로 무너질 수 있는 존재도 찾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다. 사랑으로 바라보는 상대는 아름답고 견고하지만 의심으로 바라보는 상대는 어둡고 불길하다. 결국 의심의 눈길은 그 상대를 물들여 파괴하고 자신마저 파괴할 것이다. 피처럼 검붉은 낙엽이 떨어져 쌓이듯 결국 상대에 대한 의심은 당연하게도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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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검은숲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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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홈즈라면 추리소설에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TV 드라마로도 방송된 덕분에 어찌 되었건 홈즈야말로 탐정의 전형처럼 되었고 그것을 부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일본 쪽의 탐정이라면 어떨까? 평범한 사람들에겐 김전일이나 코난 정도만 탐정의 모습으로 기억할 듯싶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처럼 일본 역시 매력적인 탐정들이 존재한다. 대부분 김전일의 할아버지로 알려진 긴다이치 코스케를 떠올릴 것이고 일본 탐정의 원형 쯤 되는 아케치 고고로를 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의 탐정을 꼽자면 바로 시마다 소지의 작품에 등장하는 미타라이 기요시일 것이다. 시마다 소지라면 누구나 『점성술 살인 사건』을 꼽게 되고 여기 등장한 탐정―조수 콤비에 눈길이 가게 되지만 이 단편집인 『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에서 비로소 둘의 시작을 보여준다. 이 둘은 과거 홈즈―왓슨, 포와로―헤이스팅즈 콤비의 클래식한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괴짜 탐정인 미타라이 기요시와 조수 겸 기록자인 이시오카 콤비야말로 탐정―조수 모델의 일본식 완성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특히 이 단편집 속에는 둘의 만남 뿐 아니라 미타라이 기요시에게 영향을 준 개인적인 사건도 포함되어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숫자 자물쇠」 추리소설의 영원한 고전적 테마인 밀실이 등장한다. 출입이 가능한 유일한 문에는 피해자만 알고 있는 숫자 자물쇠가 달려 있는 밀실. 미타라이 기요시는 왜 커피를 마시지 않고 홍차를 마시는가에 대한 서글픈 이유가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질주하는 사자死者」 기괴한 사건에 기괴한 탐정의 등장. 11층의 맨션에서 사라져버린 시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가선로에서 발견되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갈 수 없는 곳에서 나타난 시체. 과연 사자는 질주한 것인가. 기괴한 인상을 풍기는 미타라이 기요시를 처음 만난 이시오카는 그의 재즈 기타 실력에 감탄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머리였다.


「시덴카이 연구 보존회」 제2차 세계대전에 활약했던 전투기를 복원한다는 기인이 등장에 도무지 알 수 없는 부탁을 한다. 봉투에 이름을 쓰라는 협박 같은 부탁의 의미는 무엇일까? 홈즈가 등장하는 「붉은 머리 연맹」을 읽은 독자라면 이것이 이야기의 내용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똑같은 사건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개」 일본 부호에게 몸값을 받아내려는 납치범의 기묘한 트릭의 등장. 미타라이 기요시의 개 사랑과 탐정에게 의존하고 탐정을 비웃는 경찰 콤비도 등장한다.


외국의 경우 그 찬란했던 탐정들을 이젠 찾아보기가 힘든 것 같다. 지식과 논리로 무장했던 탐정들은 하드보일드 탐정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가 이젠 과학수사대들이 그 자리를 점령했다. 소설 속의 탐정은 찾기 힘들어졌으며 앞으로도 미래는 어두워 보인다. 오히려 일본 쪽에서 이런 전통적인 형태의 소설 속 탐정들이 꾸준히 등장한다는 점이다. 본격파 추리소설 이후 유행했던 사회파 미스터리 속에서 탄생해 신본격파라는 이름을 남길 정도로 대단했던 미타라이 기요시인 만큼 그의 활약이 조금 더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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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이펙트 - 인류 탄생의 과학적 분석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0 그레이트 이펙트 1
재닛 브라운 지음, 이한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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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진화론과 창조론이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한 부분이다. 이론(理論)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사물의 이치나 지식 따위를 해명하기 위하여 논리적으로 정연하게 일반화한 명제의 체계. 2. 실증성이 희박한, 순관념적으로 조직된 논리.] 당연하게도 진화론은 1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반해 창조론의 경우 2의 의미로 사용된다. 엄밀히 말하면 창조론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창조론자들의 경우 2가 아닌 1의 의미로 사용되기를 원한다는 점이 문제다. 영문으로 보면 더욱 확실한데 진화론이 ‘Theory of evolution’인데 반해 창조론의 경우 ‘Doctrine of creationism’이다. 창조의 교리 정도가 알맞을 것이고, 간단하게는 창조 교리나 창조설이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종교인이거나 창조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부분마저도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과학이 아닌 믿음의 영역인 종교를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순간 이런 말도 안 되는 논쟁거리마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사용되는 창조론이라는 표현도 2의 의미를 사용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진화론은 찰스 다윈의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 학설은 종교적인 교리에 회의적인 사상을 품고 있었던 당대의 과학자들이 인식하던 것이었고, 다윈과 같은 시기에 자연선택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던 과학자도 있었다. 이처럼 진화론은 당시 시대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산업이 발달하고 모더니즘이 만개한 시절에 지식인들은 과거의 자연신학이 아닌 새로운 인간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윈과 명망 있던 지인들은 다윈의 이론에 큰 힘을 주었고 이것 또한 다윈의 진화론이 넓게 알려진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재닛 브라운의 『종의 기원 이펙트』에서는 세상을 바꾼 종의 기원과 다윈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들려준다. 마지막 장인 「유산」에서 다윈 사후 진화론을 둘러싼 흥미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찰스 다윈과 당대의 과학자들이 주창한 진화론은 2013년에 이르러도 논란이 되고 있다. 창조론자들은 온갖 정력을 진화론은 공격하는 데 쓰고 있다. 복잡한 생명의 기원―진화론이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닌데도―에 대한 의문을 표한다거나 과학적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된 것처럼 보인다. 우스운 것은 설혹 진화론에 오류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창조설에 대한 증거가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진화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자연적으로 진화론은 사라질 것이다. 만약 진화가 자연선택이 아닌 대기의 농도에 의한 것이었다고 증명된다면 진화론은 폐기될 것이다. 그게 과학이니까. 하지만 창조설은 창조주가 대기의 농도를 조절했다고 할 텐데 이것을 과학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창조론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왜 ‘Theory’가 아닌지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왜 ‘Doctrine’이 아닌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진화는 여전히 관측되며 증명 가능할 뿐더러 수정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종교와 과학은 서로의 영역이 겹쳐서도 안 되고 겹칠 수도 없는 부분이다. 굳이 종교를 과학의 이름으로 연구하겠다면 자연과학이 아닌 사회과학에서 연구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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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뇌 창비세계문학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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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책장수들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까? 말 그대로 책 외판원들 말이다. 이런 책장수들은 돌아다니며 백과사전, 문학전집들을 팔곤 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위해 흔쾌히 지갑을 여는 경우도 많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책장에 문학전집이 꽂혀 있던 집들도 제법 많았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렇게 꽂혀 있는 책들을 보고 있자면 호기심에서라도 한 번쯤 꺼내 보기 마련이다. 엉성한 번역과 고전의 지루함 덕분에 문학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질 수도 있을 것이고, 의외로 재미를 붙였던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제목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빼들었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쨌거나 이런 전집류라면 클래식들을 빠짐없이 모았다는 것인데 반드시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그 유명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일 것이다. 비록 작품을 읽지 않아도 유명세 덕분에 너무 친숙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라니.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파헤치는 느낌이 들 정도의 변화다. 작품 해설의 번역의 문제라는 부분을 읽어보면 이런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우선 베르테르가 베르터로 변경된 것, 이것은 꾸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독일어 본래 발음과 동떨어진 ‘베르테르’라는 잘못된 표기가 여전히 통용되었던 것을 바로잡은 것이라 한다. 아무래도 과거 일본어판을 중역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외국어 표기법상의 변경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당장 익숙하지는 않지만 당연히 변경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슬픔이 고뇌로 바뀐 부분이다. 소개글에서는 ‘슬픔’이라는 단어는 주인공을 죽음으로 몰아간 처절한 감정을 담아내기에 다소 부족하기도 하고, 이루지 못한 사랑에서 비롯된 괴로움 말고도 신분 차별에서 오는 모멸감, 갑갑한 사회 환경에서 오는 권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음을 고려하여 ‘고뇌’를 번역어로 선택했다는 글이 있다. 하지만 슬픔이라는 단어가 처절한 감정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한 것처럼 고뇌 역시 처절한 사랑의 감정을 담아내기에는 만족스러운가 하는 의문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슬픔보다는 젊은 베르터의 심정을 담아내기에는 적당한 듯하다. 어디선가 베르터의 비탄으로 번역된 것을 보았는데 비탄이라는 단어가 생경하긴 하지만 더 어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쨌거나 창비의 이 시리즈가 기대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 역시 고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이야기 역시 젊은이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한 원형을 보여준다. 로테라는 운명적인 사랑의 여인을 만났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약혼자가 있는 상황이었고, 둘은 서로를 알게 될수록 사랑이 싹트는 사이가 되고 만다. 로테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약혼자인 알베르트와 친분을 쌓는 베르터, 그리고 계속되는 로테에 대한 절망적인 사랑의 이야기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이후 수없이 변형되는 이야기의 본질적인 느낌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진심이 담긴 사랑은 언제나 고통과 슬픔을 동반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면야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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