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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논리철학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은 ‘멋진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평범한 눈으로 본다면 그의 삶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 삶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루트비히 자신은 그의 철학처럼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왔다. 그에게 정신이상, 광기 같은 병들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침묵해야 할 것이었는지 모른다. 루트비히와는 달리 파울은 광기로 가득 찬 정신병을 앓고 있던 천재였다. 파울 역시 글을 썼으나 실제로 발표하지 못한 말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던 천재였다.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며 입원해 있던 파울과 폐병으로 입원해 있던 화자이자 관찰자인 베른하르트의 우정은 이렇게 병원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파울은 태어날 때부터 있던 광기 어린 정신병자로 이미 죽어가는 상태였고 늘 죽음을 생각하던 폐병 환자는 서로의 삶에 영향을 준다.

“내 메모가 지금 말해 주듯이 지난 십이 년간 나는 그의 죽음의 과정을 추적해 온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죽음을 이용했다. 그의 죽음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이용해 먹었다. 사실 나는 그의 죽음을 십이 년 동안 지켜본 증인에 지나지 않으며, 십이 년 동안 죽어가는 친구로부터 나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에너지를 빨아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p.138~139


베른하르트는 자기 생존을 위해 친구가 죽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설혹 파울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 하더라도 광기 어린 파울은 웃고 넘겼으리라. “내가 땅에 묻히는 날 이백 명의 친구들이 모일 거야. 그날 자네가 내 무덤에서 연설을 해주었으면 해.” 파울은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였을 베른하르트에게 연설을 부탁하지만 그의 장례식장에는 여덟 내지는 아홉 명만이 참가했을 뿐이고 베른하르트 역시 가지 않았으며 지금까지 그의 무덤을 찾지 않고 있다.

파울만큼 광기 어린 사람은 아니었지만 베른하르트 역시 국외자였고 두려움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파울이 죽어가는 과정을 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 죽어가는 파울을 두고 온 것, 마침내 파울이 죽은 것, 그의 무덤에 찾지 않은 것이 그것이다. 항상 죽음만을 생각하던 베른하르트는 실제로 죽어가는 친구 파울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무덤을 찾지 않았다. 이것은 감성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자신이 항상 생각해 왔던 죽음에 대한 실체적인 모습을 대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죽음과 동일시되던 파울을 거부하는 것은 베른하르트가 갖게 된 삶에 대한 욕망이다. 그래서 그가 결국 할 수 있었던 것은 무덤덤한 척 자기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그에 대한 기록으로 무덤에서 할 수 없었던 연설을 대신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문단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이야기는 파울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화자인 베른하르트 자신의 이야기이며 목소리이기도 하다. 실제 죽음을 앞둔 파울과 늘 죽음을 생각하던 화자는 병원을 오가며 광기 어린 우정을 나누었다. 베른하르트는 파울과의 우정을 통해 삶의 방향과 삶 자체에 대한 욕망을 가지게 되고 그의 죽음은 자신에게는 삶을 가져다주었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의 삶에 동조했지만 죽음에 이르게 되자 어쩌면 무관심해졌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이 부탁했던 이백 명 앞에서의 연설도 하지 않았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파울의 무덤을 찾지 않겠지만 그에 대한 이 기록들은 파울에게 바치는 뒤늦은 연설문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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