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음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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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과 [달의 궁전]에 이어서 세번째로 읽게 된 폴 오스터의 소설이 바로 [우연의 음악]이다. 내가 읽은 폴 오스터의 소설은 전부 꽤 속도감읽게, 퍽 재미있게 읽히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우연의 음악]이 가장 몰입해서 읽었던 책이다.

[동행]과 [달의 궁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특성이 '폴 오스터적인 특성'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이제 세 권의 소설을 읽었을 뿐인 지금으로써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저 두 작품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특성이, [우연의 음악]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의 두 작품은, 두세 개의 다소 독립된 에피소드가 약한 연결고리 하나로 (다소 작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작가의 구성에 대한 약점으로 봐야 할지, 의도적인 구성, 혹은 작가의 독특한 개성으로 보아야 할지 헷갈리는 중이다. 하지만 이 [우연의 음악]은 그런 구성을 취하지 않고 있다. 영화는 짐 나쉬가 어떻게 여행을 떠났다가 잭 포지를 만났고, 이후 그와 함께 어떻게 운명이 바뀌었는지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도 이것이, 굉장히 속도감있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짐 나쉬와 잭 포지의 모험은 그야말로 너무나 흥미진진하다. 그들이 게임을 벌이기 이전 두 백만장자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게임결과를 예측할 수 있음에도 손에 땀을 쥐며 읽을 수 있다. (나는 심지어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다가 너무 몰입한 나머지, 내려야 할 역에서 못 내렸을 정도다.) 그리고 이후 벌어지는 사건들은, 스토리에 급격한 변화를 주며 다음 내용을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마지막 엔딩에 이르러 책을 덮고 나면, 아직도 가시지 않은 흥분으로 여전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짐 나쉬는, 모든 것을 이미 다 예상했음에도 방향전환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달려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니콜라스 케이지가, 새로운 사랑을 만났음에도 계속 파멸의 길을 가는 것처럼. 역자 후기에서 번역자는 이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나에게는 이 소설의 그 모든 우연들이, 결국은 '달콤한 파멸'이라는 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모든 '필연'의 결과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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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아틀란티스 - 상
스티븐 킹 지음, 최수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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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책은 처음으로 접했는데, 내게 책을 권해준 이는 '스티븐 킹 최고의 소설'이라고 했다. 도통 눈물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이 책을 읽곤 울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 역시, 엄숙하고 정숙해야 할 도서관 한 켠에서 이 책을 읽고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총 5개의 에피소드로 연결되어 있는 이 소설은, 바비의 어린시절로 시작해서 바비와 캐롤의 만남으로 끝을 맺는다. 60년대라는 격동의 시절을 살아냈던 그 사람들, 그 아틀란티스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아틀란티스가 사라진 뒤 자신의 평생을 지배하는 그 아틀란티스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살아간다.

그 찌는 듯 더웠던 어린 시절 특별한 만남과 특별한 상처의 기억, 그리고 미국의 시민권 운동이 한참 싹터오던 시절의 광기의 기억, 인류 전체에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베트남 전쟁의 그 전장에서의 지옥의 기억, 어린 시절 자신의 행동에 대한 평생의 죄책감과 참회의 기억과 상처입은 현재, 그리고, 결국 다시 만나 상처를 치유하는 특별한 현재...

이 서평을 쓰면서 나는, 다시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운좋게도 아틀란티스의 기억이 새겨진 유전자를 아주 조금, 갖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몸으로는 어른이되 아직도 유년기를 겪고 있는' 모든 어른들을 위한 너무나 근사한 성장소설이자 우리 시대 최고의 문필가 중 한 명이 보내준 너무나 고마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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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11-17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너무 좋았지요 ㅠ.ㅠ
 
광기의 산맥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지음, 변용란 옮김 / 씽크북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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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내에서 러브크래프트의 이름은 극소수의 호러영화/소설광에게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씽크북에서 차례로 러브크래프트의 책을 발간할 예정이라니 더없이 반갑다.

스티븐 킹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그에게 영향을 준 선배작가들의 작품들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러브크래프트를 만나게 되고, 그의 소설에 매혹되기 마련이다. 남극탐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한 지질학 교수가 화자가 되어 회상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소설은, '처음 발견한 생물'에 대한 묘사가 마치 '리포트' 형식이라 쉽게 머리에 그려지지 않고 처음 몇장은 넘기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곧 엄청난 흡입력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며 속도에도 가속이 붙게 만든다. 그가 묘사해가는 '미지의 지성체와의 조우'의 과정은, 책장을 넘길수록 공포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느낌이며, 마침내 맨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심장을 방망이질치게 만든다. 더욱이 맨 마지막 문장은... 공포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그저 인간의 얄팍한 공포심을 조장하고 거기에만 호소하는 싸구려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많은 하위장르 문학 중 걸작들이 그렇듯, 이 소설은 흥미진진한 구성과 문체 외에도 흥미진진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다뤄지는 '미지의 지성체와의 조우'는, '지구상 최고의 영장동물'이라며 거들먹거리는 인간의 자만심을 아주 우습게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진정한 공포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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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슬픔 - 마크 트웨인의 불온한 독설
마크 트웨인 지음, 강주헌 옮김 / 경당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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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쉽지 않게 접해볼 수 있는 마크 트웨인의 단편모음집이라는 것 부터가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이 책을 읽어보면, 국내에서 그가 단지 어린이용 모험소설을 쓴 작가(<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과연 어린이용 모험소설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로만 알려져 있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 알 수 있다. 촌철살인의 유머, 그리고 신랄한 풍자와 독설은, '재담꾼'으로서의 마크 트웨인의 면모 뿐만 아니라 인간세계를 꿰뚫어보는 철학자로서의 마크 트웨인의 면모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맘껏 조롱하고 냉소하면서도, 그런 인간에 대해 여전히 연민을 떨치지 못하는 마크 트웨인은 진짜 천재작가다.

이 책에는 트웨인의 '따뜻한 유머가 살아있는' 전반기 작품들과 '더없이 절망적이고 염세적인 유머의' 후반기 작품들이 골고루 섞여 있다. 정신없이 낄낄대고 웃다가 어느새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질 듯한 그의 작품들은, 진정한 냉소와 진정한 휴머니즘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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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정초일 옮김 / 푸른숲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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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아들에겐 아버지가, 딸에겐 어머니가 삶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역할 모델이다. 아버지와 아들간의 애증과 어머니와 딸 간의 애증은 물론 사회구조와 관련하여 외형상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식의 입장에서 자신의 역할 모델로서의 부모를 사랑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하며 복종하려 하면서도, 그 역할모델이자 절대적 존재를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써보냈던 이 편지를 읽고, 딸로서 내 어머니에게 느꼈던 그 복잡미묘한 애증을 되새기며 공감을 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게다.

현대문학에서 실존주의의 시대를 열어제쳤던 (그리고 나에겐 그저 '천재'라는 단어로만 집약될 뿐인) 위대한 문학가가 드러내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 그리고 거기서 드러나는 프란츠 카프카 개인의 성격들 - 어쩌면 이리도 소심하고 마음 약하고 겁많고 내성적일까! - 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문장들을 통해 너무나 생생한 공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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