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이 내려오다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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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친구가 빌려줘서 읽게 된 책. 애초에 이 책에 흥미를 보인 것 자체가 책 중간 '하루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짧게 등장하는 것 때문이었다. 나나 친구는 둘 다 그 하루키가 그 하루키일 거라고 짐작하는데, 이 명민하고 위악적이며 사랑스러운 작가가 그 '하루키'라는 엑스트라 인물에게 부여한 이미지는 우리가 생각한 그 하루키의 이미지(다소 조롱투의)와 매우 비슷하다. 하하.

마리오에게 유전자를 나눠준 두 할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아시와라 마리오 군의 짧은 생에 관한 이야기다.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편견과 무관심으로 인한 지극히 제한된 정보만 가지고 있는 나는, 일본사람, 할 때 지극히 제한되고 편협한 몇몇 이미지만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허무주의적 데카당스', 그리고 '일본이라는 뿌리에 대한 부정'이다. 이 책은 나의 그 제한되고 편협한 이미지를 더욱 가중시킨다. 허무주의적 데카당스, 뿌리에 대한 부정이라는 게 이 책엔 진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국과 가까이 있었던 나라답게, 어떤 면모들은 지극히 일본적이다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서구의 번역소설과 달리 지극히 친근하고 리얼리스틱한 느낌을 주더라. 꽤 큰 규모의 노동자 집회 때문에 종로에 갇혀 있을 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 나는 마지막 엔딩에서 지독한 우울감을 느껴야 했다. 그런 느낌 있지 않은가. 모든 냉정함을 동원하여 논리적으로 사고했을 때 나온 하나의 답이 있는데, 나는 그 답을 실행하기 싫을 때, 그리고 무서울 때. 내 삶에서 그 답이란 마리오식 엔딩인데, 나는 그런 식의 엔딩을 선택하기 싫다.

마리오군의 깜찍한 위악과 독선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지독한 절망. 소비사회의 이익을 기반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그 소비사회에 불화하며 부유하는 마리오군, ...이라고 쓰다보니 이것 참, 진짜 고루하고 고답적인 인물 평가다. 시점이 '나'와 '마리오'라는 두 화자의 것이 섞여 있는 이 작품은 후일담에 가서야 '나'와 '마리오'가 다른 사람으로 분리된다. 나는 이런 시점의 혼용에서 나=마리오, 그러나 한 사람 안의 다른 자아처럼 진행되다가, 나(시마다 마사히코, 작가의 이름을 그대로 채용한 극 중 작가)와 마리오가 분리되는 이 장치가 꽤 마음에 든다. 후일담에서 묘코의 입을 통해 마리오의 삶이 분석되면서 작가가 앞에서 해왔던 것을 직설법으로 표현해 버리는 데에서 심히 거슬렸지만, 마리오가 묘코에 의해 거대한 컴퓨터로 부활한다는 설정, 그리고 그 부활한 마리오가 마지막으로 뱉는 대사는 매우 마음에 들었다.

뭐, 이 책에서 마음에 든 게 이것뿐만은 아니다. 이 소설은... 정말 막 간다. 끝까지 간다. 그래, 나는 절망을 하고 방황을 하고 위악을 떨려면, 하루키처럼 적당한 선에서 방황하는 척하며 지극히 가볍게 삶을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시마다처럼 끝까지 가는 쪽이 더 좋다. 훨씬 더, 삶에 대해 진지하고 세상에 예의를 갖추는 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소위 '내셔널리스트'를 공격하는 마리오가 일본어의 천재였고,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언어(즉 일본어)로 번역해 버렸다면, 리리카는 소위 국제인 그 자체이자 국적없는 개별자이다. 리리카어(리리칸)를 구사하는 리리카는 그러나, 조금이라도 뿌리를 내리기 위해 고샤(역시 러시아인도 일본인도 아닌, 그래서 러시아인도 일본인도 될 수 있는)와 결혼하여 마리오의 아이를 낳는다. 이런 대립과 아이러니의 설정이 참으로 재미있다.

나는 마리오가 천국을 봤는지 어쩐지 궁금하지 않다. 천국도 지상과 마찬가지로 마리오에겐 끔찍한 곳이었을 테니까.

 

ps. 이 책은 나온지 얼마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절판이다. 알라딘의 '품절'이라는 글씨는 꽤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다가 결국 '절판'으로 바뀔 듯한데... 꼭 소장을 하고 싶은 책이라 슬슬 헌책방을 뒤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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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라 2004-05-28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사히코 소설 좋아해요. 드림메신저(꿈의 메신저)도 재밌어요
 
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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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장서표'라는 뜻이지만, 한국제목은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따왔다. 두 사람이 함께 살면서 따로 갖고 있던 책장을 마침내 하나로 합치는, 이른바 '서재 결혼 시키기'로 이 책은 시작한다. 연애하던 무렵, '결혼한다면 이 남자와...'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와 CD장과 비디오테입 및 DVD장, 그리고 책장을 어떻게 합치나? 라는 행복한 고민을 하곤 했다. 물론 이 고민은 이제 옛말이 되었지만, 그만큼 서재나 CD장, 혹은 영화매체장을 공유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궤적을 걸어온 사람들 사이의 온전한 합침이랄까. 물론 그 합침이 꼭 필수적인 것도 아니지만...('따로 또 같이'란 건 얼마든지 충분한 미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재 결혼 시키기>는 '책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책에 관한 독후감이나 서평 같은 걸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오자를 그냥 못 지나치고 거의 반사적으로 지적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던가, 저자는 '페미니즘'에 관한 부분만 이야기했지만, 좀더 폭넓게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새로운 기준 앞에서 갈등하며 어떤 표현들을 놓고 갈등한다거나, 책을 편하게 줄도 치고 책등 중간도 갈라먹어가면서 볼 것이냐 책 보기 전 손을 씻고 책장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기며 볼 것이냐의 갈등, (나는 앤 페디먼이 이야기하는 '궁정식 연인'과 '육체적 연인'의 양측면 모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한테서 표현을 훔쳐오는 것에 대한 갈등, 생일선물로 꽃을 받는 것보다 갖고 싶었던 책을 받았을 때 더 크게 느끼는 기쁨, 내겐 '금지서적'이었던 야한 문학소설을 읽으며 성적 판타지를 키운 경험(나에게는 D.H.로렌스의 소설이었다), 책의 배경이 된 바로 그 곳에서 그 책을 읽는 것의 기쁨과 황홀감...

읽는 내내, '맞아맞아!'를 외치며, 때로는 배를 잡고 뒤집어지면서 웃을 수 있는 이 책은, 책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맨 마지막에 저자가 소개한 글래드스턴의 소책자는, 어떤 이들에겐 지극히 지루한 장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책 좋아해서 방안이 책으로 난장판이고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겐 지극히 유용한 충고다. 나는 그 장을 읽으며, 독립한 내 방에 글래드스턴이 충고한 대로 책꽂이를 짜서 배치하는 상상으로 행복해 했으니까.

단 하나, 내가 패디먼이 부러웠던 것은 어렸을 적부터 조성된 그 문학적 환경이다. 부모가 모두 독서광이고 작가이며, 오빠와 책 이야기를 하며 클 수 있는 여자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집만 해도, 책에 탐닉하는 건 나 혼자뿐이니까. 이런 면에선, 조금 외롭다. 가령 고등학생 때 엘뤼아르의 시를 동생과 함께 번역했다던가 하는 선배 언니의 이야기는 나한테 꿈 속의 일 같이 느껴진다. 그래도 다행인 건, 관심이 있으면 길이 뚫린다고 했던가, 내 주변에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책읽고 난 소회를 교환하거나 하는 사람들을 꽤 만들었다는 점이다. 아니, 내가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들이 날 찾아와주었다. 영화에 대해 수다를 떨 때만큼이나, 책에 대해 수다를 떠는 건 정말 재미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책에 대한 수다'의 즐거움을 한껏 안겨준다. 아마 이제껏 책을 별로 많이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이 책은 재미있게 볼 수 있을 듯 하다. '독서'란 게 고리타분하고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그 안에도 굉장히 풍부하고 다양하고 커다란 세계가 있다는 걸 간접체험하게 해주니까.

하여간, 패디먼 대학(집안) 사람들의 삶의 통시태와, 작가 자신의 삶의 공시태가 씨줄과 날줄처럼, '책'이란 매개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삶의 결들이 섬세하게 보이는데, 단순히 재밌다는 차원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언제나 구체적 개인의 구체적 삶이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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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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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본원적 그리움, 혹은 포근함일지 모르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공포'다. 물론 잘 가꿔진 산책길 가에 세워진 가로수와 인근의 호수가 있는 공원 같은 것, 마당에 잘 세운 정원수들과 이름모를 풀꽃, 그리고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깔 상큼하고 폐를 자극하는 공기는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자연 역시, 도시 한가운데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자연이다. 나는 자연이라고 했을 때 엄청난 크기의 해일이나 사납게 요동치는 바다, 혹은 너무 빽빽해서 태양이 보이지도 않는 밀림의 정글 등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온갖 종류의 벌레들과 역삼각형 대가리를 꼿꼿이 세운 독사(毒蛇) 등이 연상된다. (어릴 땐 가로수에서 무수히 떨어지는 송충이도 얼마나 혐오를 했던가.)

남미쪽 소설을 읽을 때, 특히 '자연'과 밀착된 소설들을 읽을 때 불편한 감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다. 나는 18세기도, 19세기도 아닌, 전형적인 20세기형 인간이다. 20세기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인간. 그런데 한편으론, 그 불편하고 두려운 감정 외에도 묘하게 신비스럽고 어딘지 친숙한 감이 든다. 어쩌면 전생에 나는 아프리카 밀림에서 사자의 발톱에 찢기거나, 독사의 맹독에 물려 안타깝게 삶을 마감한 전사가 아니었을까.

칠레에서 태어나 피노체트 군사정권 하에서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감옥생활, 국제사면위원회 도움으로 풀려난 뒤 망명. 세풀베다의 이력은 그렇다. 나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과 세풀베다의 이름을, 대학시절 당시 열독했던 장정일의 독서일기 어디에선가 처음 만났다. 제목에 흥미가 땡겨 읽어야지, 읽어야지, 한 게 벌써 몇 년. 그리고 얼마 전 후배의 자취방에 새벽의 급습을 실행했다가(주인장과 같이 가는 게 뭔 ‘급습’이겠냐만) 발견하고 빌려왔다.

제목에서 내가 상상한 그런 내용은 아니었다. 남미의 정글에 있을 법한 온갖 동물들이 그려진 표지에서 이미, 내가 오랫동안 상상해 왔던 그런 내용은 아닌 것 같다는 불안감은 느꼈지만, 읽어갈수록 그것은 사실로 판명났다. 하지만 나는 이런 소설에서 읽는 그 불편감 외에도 그 친밀함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주인공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가 암살쾡이를 좇는 모험, 그리고 그와의 마지막 대면에서 느껴지는 숭고함은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정글의 법칙은 확실히, 아무데나 총을 갈겨대고 지극히 어린 살쾡이의 가죽마저 탐내는 인간들의 법칙보다 훨씬 더 숭고하고 공평하다. 다만 나는, 그 정글에서 별로 ‘강자’의 입장이 아니라 언제건 쫓기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정글을 무서워하는 것뿐이다. (물론 인간의 법칙 하에서의 나의 삶 역시 그리 여유롭지는 않지만.)

초반에 등장한 치과의사는 왠지 허겁지겁 실종된 느낌이 든다. 소설이 본격적으로 암살쾡이를 좇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의 이야기로 옮아가면서 그의 존재는 지워지니까. 오로지, 이 노인네에게 일년에 두 번씩 연애소설들을 전달해 주는 역할로만 끝나고 만다. 게다가 소설 중간엔 노인네의 과거가 시도때도 없이 플래시백으로 끼어든다. 이 플래시백이 또 파란만장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좀 산만한 느낌이다. 그런데, 바로 그 느낌이, 이 소설이 서구의 세련된 근대적 소설보다는 입담 좋은 할아버지의 구술문학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아니, 사실은 그 세련된 근대적 느낌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들이 공존한다.

열린책들에서 세풀베다의 다른 책들도 꽤 출판을 해낸 모양이다. 알라딘을 검색해 보니, 서너 권의 다른 책들이 더 뜬다. 찬찬히 이 책들을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한동안 탐닉했다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그만두었던 다른 남미 작가의 소설들도...

 

ps. 본문과 역자후기에 빈번히 나오는,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이라는 표현이 계속 눈에 거슬린다. 너무 상투적인 이 클리셰는, 이 표현이 본래적으로 담고 있는 '강간'이라는 끔찍하고 잔인한 의미마저 상투적으로 전락시킬 뿐 아니라, 여성의 처녀성에 대한 낡은 관습의 산물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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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11-17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이 책을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마지막 문단 ps 부분, 동의합니다. :)
 
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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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시기에 같은 네덜란드에는 '베르메르'라는 화가가 있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가 그린 '진주귀고리 소녀' 혹은 '터번을 두른 소녀'라는 제목의 그림을 우연히라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베르메르의 그림에 매료된 저자는, 이 신비한 소녀의 그림을 둘러싼 한 편의 픽션을 세상에 내놓는다. 다른 화가들과 달리, 베르메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북구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이 신비한 그림의 모델에 대해서도. 저자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완벽한 상상의 세계, 그리고 그 그림에 매료된 자신의 그 떨림을 표현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

누구나 어떤 소설이나 영화, 혹은 만화나 드라마 등을 보며 너무나 매혹된 나머지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 세계의 주인공으로, 혹은 다른 세계에서 온 눈에 띄지 않은 관찰자로 그 세계에 머물며 자신을 매혹한 주인공의 숨결을 느끼고,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목소리를 듣는. [진주귀고리 소녀]는 바로 그 욕망을 또다른 픽션의 창조라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낸다. 물론 저자가 매혹당한 것은 저런 서사구조의 픽션의 세계가 아니라 '그림'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베르메르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게 된 감성 예민한 16살의 소녀 그리트를 통해, 저자는 자신의 욕망을 근사하게, 그리고 또다른 예술의 차원에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트의 눈에 비친 베르메르는 신비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며, 자신의 예술작품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무심한 - 혹은 이기적인 - 아티스트다. 소설은 철저하게 그리트의 입장에서, 그리트의 눈과 입을 통해 진행된다. 약 3년간의 시간동안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집에 처음 하녀로 들어가 그 집 특유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예술에 눈을 뜨며, 그리고 점차 베르메르의 곁에서 그의 일을 돕게 되고, 종국에는 그림의 모델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이 바로 '진주 귀고리 소녀'다.

저자가 표현해내는 그 세심하고 사소한 일상, 그리고 속삭이듯 묘사해가는 당시 네덜란드의 생활상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눈앞에 그림이 그려질 정도다. 그리고 그리트의 입을 통해 고백되듯 그려지는 그 섬세한 감정의 떨림, 그리고 인물들 간의 팽팽한 긴장감 역시. 그리트의 눈을 통해 창조된 베르메르의 모습은 신비한 카리스마 그 자체다. 우리는 그리트를 통해 베르메르를 향한 그녀의 욕망 - 그녀는 베르메르를 사랑한 것일까, 아니면 베르메르로 대표되는 '예술', 그리고 자신이 속하지 못한 그 '예술의 세계'를 사랑한 것일까? - 과, 그로 인한 가슴 두근거림을 생생히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베르메르의 그림을 향한 작가 자신의 두근거림과 설레임마저도 경험할 수 있다.

어찌보면 이 소설은, 거대한 범주의 '팬픽'이다. 그리고 내가 이 소설에 느낀 흥분은 아마도 그런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책에 끌렸던 것은, 이 소설이 또한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의 세계에 눈을 뜨고 그에 가까이 가지만, 결국 뒷걸음칠 수 밖에 없었던 소녀. 그리고 상징적인 과정을 통해 소녀에서 여인이 되는 그녀의 고백록. 이 소설은 심지어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이 말에 아마도 야한 장면을 상상하고 책을 집어들었던 이들은 다 읽고나서 나를 향해 돌을 던질지 모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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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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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은 '미스터 본즈'라는 이름을 가진 개다. 책의 중반까진 '미스터 본즈'라는 화자를 통해 그의 주인인 윌리 G. 크리스마스라는 '미친 시인'을 그리는 것 같지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윌리는 죽음을 맞이하고, 작가는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주인을 떠나보낸 미스터 본즈가 이후 겪은 모험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미스터 본즈의 눈을 통해, 우리는 아무런 사유재산도 없이 '거지'로 살아가며 시작(詩作)에 몰두하는 윌리 G. 크리스마스의 세계, 식당을 하느라 바쁜 부모한테서 아무런 관심도 사랑도 받지 못하는 중국인 2세 소년 (이름 생각 안남)의 세계, 그리고, 부유한 가정에서 애정없는 결혼생활에 지쳐가는 주부(역시 이름 생각 안남)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환경도 다르고, 나이도, 성별도, 계급도 다른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너무나 외로운 인생들이란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미스터 본즈'다. 자동차가 마구 달리는 대도시의 뒷골목, 혹은 그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근교에서 '인위적으로' 지어진 고급 빌라 근처, 미스터 본즈가 살았던 곳은 그런 곳이다. 미스터 본즈 역시, 생 자체가 지독히 외롭다. 하지만 그는 그 외로움에 지쳐서 자신을 학대하거나, 절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윌리가 먼저 간 곳, '팀벅투'로 가기를 희망할 뿐이다. 미스터 본즈가 마침내 자신도 팀벅투로 가게 될 수 있다는 소식을 꿈 속에 나타난 윌리에게서 들었을 때, 그 장소가 산 속의 눈 덮인 숲길 위라는 건, 이 소설에서 도시의 이미지가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상당히 흥미롭다. 춥고 배고프고 지치고 병든 몸의 미스터 본즈가 쓰러진 곳은, 오히려 미스터 본즈에게 상당한 위안을 주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마침내 미스터 본즈가 팀벅투로 향하는 관문을 향하게 되는 건, 역시나 번잡한 도시의 차도이다. 이겨도 승자요 져도 승자인 영웅게임을 하는 곳. 마침내, 윌리를 만나러 갈 수 있게 해 준 곳. 하긴, 우리가 도시에 살아서 외로운 건 아니잖는가. 인생은 어차피 외롭고, 현명한 건 그 외로움에 절망하지 않고 친숙해지는 것이고, 그리하여 비로소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 아닐까. 도시는 단지, 말없이 서 있을 뿐이다. 도시에서 나서 도시에서 자란 내게는, 사실 지나치게 친숙한 몸짓을 하는 산이나 바다나 들보다는 오히려 도시가 편하다. 아파트촌이 아닌, 낡은 건물과 좁은 골목길과 좁은 다세대 주택이 잔뜩 있는, 그런 도시의 동네 말이다.

인터넷 검색엔진과 영어사전 등에서 '팀벅투'를 찾아보았다. 아프리카 어딘가에 있는 도시라는데, 영어에서는 그냥 '저어기 머나먼 곳'을 뜻하는 대명사로 쓰이나 보다. 조기 영어교육을 위해 국내에서 팔고 있는 어떤 '영어' 비디오에서는, '북극에서 온 산타'가 아니라 '팀벅투에서 온 선물'이라는 게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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