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시기에 같은 네덜란드에는 '베르메르'라는 화가가 있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가 그린 '진주귀고리 소녀' 혹은 '터번을 두른 소녀'라는 제목의 그림을 우연히라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베르메르의 그림에 매료된 저자는, 이 신비한 소녀의 그림을 둘러싼 한 편의 픽션을 세상에 내놓는다. 다른 화가들과 달리, 베르메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북구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이 신비한 그림의 모델에 대해서도. 저자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완벽한 상상의 세계, 그리고 그 그림에 매료된 자신의 그 떨림을 표현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

누구나 어떤 소설이나 영화, 혹은 만화나 드라마 등을 보며 너무나 매혹된 나머지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 세계의 주인공으로, 혹은 다른 세계에서 온 눈에 띄지 않은 관찰자로 그 세계에 머물며 자신을 매혹한 주인공의 숨결을 느끼고,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목소리를 듣는. [진주귀고리 소녀]는 바로 그 욕망을 또다른 픽션의 창조라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낸다. 물론 저자가 매혹당한 것은 저런 서사구조의 픽션의 세계가 아니라 '그림'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베르메르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게 된 감성 예민한 16살의 소녀 그리트를 통해, 저자는 자신의 욕망을 근사하게, 그리고 또다른 예술의 차원에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트의 눈에 비친 베르메르는 신비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며, 자신의 예술작품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무심한 - 혹은 이기적인 - 아티스트다. 소설은 철저하게 그리트의 입장에서, 그리트의 눈과 입을 통해 진행된다. 약 3년간의 시간동안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집에 처음 하녀로 들어가 그 집 특유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예술에 눈을 뜨며, 그리고 점차 베르메르의 곁에서 그의 일을 돕게 되고, 종국에는 그림의 모델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이 바로 '진주 귀고리 소녀'다.

저자가 표현해내는 그 세심하고 사소한 일상, 그리고 속삭이듯 묘사해가는 당시 네덜란드의 생활상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눈앞에 그림이 그려질 정도다. 그리고 그리트의 입을 통해 고백되듯 그려지는 그 섬세한 감정의 떨림, 그리고 인물들 간의 팽팽한 긴장감 역시. 그리트의 눈을 통해 창조된 베르메르의 모습은 신비한 카리스마 그 자체다. 우리는 그리트를 통해 베르메르를 향한 그녀의 욕망 - 그녀는 베르메르를 사랑한 것일까, 아니면 베르메르로 대표되는 '예술', 그리고 자신이 속하지 못한 그 '예술의 세계'를 사랑한 것일까? - 과, 그로 인한 가슴 두근거림을 생생히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베르메르의 그림을 향한 작가 자신의 두근거림과 설레임마저도 경험할 수 있다.

어찌보면 이 소설은, 거대한 범주의 '팬픽'이다. 그리고 내가 이 소설에 느낀 흥분은 아마도 그런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책에 끌렸던 것은, 이 소설이 또한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의 세계에 눈을 뜨고 그에 가까이 가지만, 결국 뒷걸음칠 수 밖에 없었던 소녀. 그리고 상징적인 과정을 통해 소녀에서 여인이 되는 그녀의 고백록. 이 소설은 심지어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이 말에 아마도 야한 장면을 상상하고 책을 집어들었던 이들은 다 읽고나서 나를 향해 돌을 던질지 모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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