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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니와 주이
J.D. 샐린저 지음, 유영국 그림, 황성식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홉 가지 이야기]에 실린 단편 중 맨 처음 실린 |바나나 피쉬를 위한 완벽한 날|은 한 여자가 자기 어머니와 통화하는 내용을 참 길고도 꼼꼼하게 옮겨놓으며 시작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제외하고 처음 샐린저 월드에 발을 디딘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이 여자의 이 지리멸렬해 보이는 삶이 이 이야기의 중심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단편의 주인공은 시모어 글래스다. 시모어가 느닷없이 자신의 머리에 대고 총을 쏘는 것으로 이 단편은 끝이 난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이어질 글래스 일가 사람들과의 인연의 첫 시작이 된다. 이후 샐린저의 단편들 중 많은 숫자는 글래스 일가의 7남매 중 살아남은 여섯 명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같은 책에 명백하게 실린 글래스 일가 출신은 [작은 보트에서]에 나오는 꼬마 주인공의 엄마, 부부 글래스뿐이다. (이 단편에서는 시모어가 지나가듯 언급된다.) 그러나 샐린저의 팬들은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에서 웨이커 글래스의 흔적을 발견하며, [웃는 남자]의 화자가 버디 글래스일 것으로 짐작하기를 즐긴다.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의 화자 역시 글래스 가문의 한 사람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샐린저는 이후 잡지에 발표한 단편들을 묶어 출판한 [프래니와 주이]와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 이후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고, 심지어 자신과 서신교환한 사람이 자신이 보낸 편지를 출판하려 하자 법의 힘으로 그걸 제지시키기까지 하며 은둔생활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샐린저가 [아홉 가지 이야기] 이후 출판한 이 책, [프래니와 주이]는 두 개의 중단편이 들어있다. |프래니|와 |주이|라는 중단편 제목 그대로, 그래스 일가 일곱 남매 중 가장 막내인 프래니와 바로 그 위 주이의 이야기가 차례로 들어있다. (하지만 국내 번역본에는 출판사측에서는 책 전체를 임의로 하나의 중편으로 다루면서 중간에 네 개의 소제목을 달아놓고 있다.)
격렬하게 영혼의 각성의 시기를 맞이한 스무 살의 프래니가 보여주는 내면의 전투의 흔적들. 그녀는 자기보다 열 여덟 살이나 많았던, 그리고 죽은지 7년이 된 큰오빠 - 라기보다는 삼촌과 같은 존재였던 - 시모어의 종교적 흔적을 새삼 따라간다. 그 각성의 순간이 주는 고통은, 상실의 고통과 맞물려있다. 물론 그녀가 겪는 상실이란 시모어와 고작 두 살 차이로 비슷한 시기를 함께 보낸 버디의 상실과는 형태도 내용도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겪는 그 격렬한 소용돌이에 상실의 고통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정작 시모어가 떠났을 때 그녀는 아주 어린 소녀에 불과했지만, 그 고통은 7년이 넘어서야 뒤늦게 도착한 것이다. 뒤집어서 얘기하자면, 이토록 글래스 일가에는, 7년의 시간차를 두고 영혼의 대각성기가 주는 고통의 시간에 상실의 고통을 깨닫게 할 정도로, 시모어의 존재감은 막강한 것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이에게도 마찬가지다.
시모어와 열 세 살 차이이고, 프래니보다 다섯 살 손위인 주이는 현재 '그럭저럭 잘 나가는' 배우이다. 버디에게서 받은 편지를 7년째 품고다니며 읽고 또 읽고 하는 그. 프래니의 고통을 보면서, 시모어가 죽은지 한참 지났어도 시모어의 유령이 참 단단히도 박혀 이들 주변을 떠돌아다니고 있구나, 했었는데, 바로 주이의 입을 통해 이 말이 선언된다. 가엾게도 고통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감수성 예민한 프래니를 보며 주이가 던져주는 말에는, 그 역시 프래니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시간차 상실의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 암시된다. 하지만 주이는 프래니에게 조근조근 던져준다. 시모어가 했던 말 기억해? 뚱보 아줌마를 기억해?
주이의 말에 상처를 받기도,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마침내 주이가 상기시켜준 뚱보 아줌마의 비밀에 프래니는 비로소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하지만 주이의 내면은, 프래니보다 조금 쉽게 그 깨달음의 순간을 지나오긴 했어도, 프래니보다 더 쉽게 완전히 극복한 것 같지 않다. 여전히 주이의 내면은 전투중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프래니 역시 앞으로도 그 전투를 계속 해나가긴 하겠지만, 왠지 앞으로의 그녀는 주이보다 조금 더 평온하게 그 전투를 치를 것같다.) 자신이나 프래니는 버디 형이나 다른 형제들보다 시모어의 죽음의 영향권에 덜 속해 있다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에, 다른 형, 누나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시모어의 죽음을 계속 짐으로 지고 갈 것이며, 그들이 벌이는 내면의 전투는, 상처를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버디나 부부나 웨이커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상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평생 지속될 것이다. 비슷한 상처를 가진 주이와 프래니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 상처를 온전히 둘이서만 공유할 것이고, 극복 과정 역시 그러하겠지.
어느새 나 역시 글래스 일가의 사람들이 어깨 위에 지고 있는 그 짐을 아주 조금, 나눠지고 있는 것같다. 나에게도 시모어의 존재가 조금씩, 커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갖게 된 짐은 버디나 웨이커나 부부의 것과는 물론, 주이나 프래니의 것과도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글래스 이야기에 매혹된 샐린저의 다른 팬들과 공유하고 도닥여야 할 종류의 상처이리라.
ps.[아홉 가지 이야기]에서 최승자 시인의 번역에 너무 확 익숙해진 탓인지, 이 책의 번역문체는 다소 낯설게 여겨졌다. 뭐랄까, 좀 간지럽고 닭살스럽달까. 샐린저의 원래 문체는 좀더 드라이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이건 선호도의 문제이니, 도저히 한문장 한문장 읽어내려가기 괴로웠던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문제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