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인류학자 - 뇌신경과의사가 만난 일곱 명의 기묘한 환자들
올리버 색스 지음, 이은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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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책이 지속적으로 쓰이고 팔리고 읽히고 각광받는 데에는 그닥 아름답지 못한 호기심들이 있다고 믿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이 '정상'이라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상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소위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세계를 저열한 호기심으로 엿보고, 그리고 그들에게 인도적인 관점을 내보임으로서 자신의 휴머니즘을 과시하는 것. 이런 류의 책은 그리하여 깊이보다는 소소한 에피소드들로 가득차게 된다. 주로 그들의 '특이한' 행동들. 그리고 그 뒤를 '그래도 휴머니티 넘치는' 말로 얼버무린다. '백치천재' '자폐증' 이런 말들은 언제나 그런 사람들 중 특히 자의식 과잉인 사람들을 위한 근사한 액세서리가 되어왔고,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책으로 나오고 영화로 만들어지며 박수를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좋았던 것은,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책을 찾는 것이 아무리 저열한 호기심과 한편으론 분명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사고 때문이라곤 하지만, 나 역시 결국 그렇고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올리버 색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그들을 비록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이 겪었던 고통, 혹은 '우리는 모르는' 그들의 평온한 세계를 그대로 인정하려는 시선이 있다. 그리고 슬플지라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건 결국 이 선이 한계라는 것. 사실은 이런 류의 책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삐딱하게 시작한 저런 이유들보다는 오히려, '그들'과 '우리'를 가르는 이 장벽 자체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들'과 '우리'는 또다시 더 큰 '우리'가 되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계속 인식할 필요가 있고, 그 인식을 계속 자극할 자극제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주위에 아무리 저열한 호기심이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론, 내가 갖고 있는 증상 일부가 올리브 색스가 묘사한 사람들의 특징 중 일부와 굉장히 미미한 강도로 겹친다는 데에 흥미를 가졌다. 하지만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누구나 자신이 정상이라 굳게 믿고 싶어하지만 사실 '정상'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실제 자폐증 환자의 부모들의 가슴이 썩어나갈 때, 우리는 '자폐증'이란 말을 낭만화하기 바쁘다. 거기엔 분명, 어떤 종류의 '욕망'이 숨어있다. 그 욕망은 때로 실제 자폐증과 유사한, 그러나 정도는 훨씬 덜한 어떤 증상들을 각 개인에게 심어놓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삼, 자신이 갖고 있는 비밀스러운 어떤 경미한 그 증상들에 깜짝 놀라고, 부끄러워 하고, 걱정한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어한다. 나는 정상이야, 나는 정상이야... 현대의 이 산업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이 더욱 많을 것이라고, 나는 조심스레 추측한다. 그리고 별로 정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평범한 것은 분명한 나 역시, 결국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나 별로 외롭지 않구나, 세상엔 참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구나, 라는 게 나의 솔직한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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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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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예술적 경험의 순간'으로 매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에서 남녀 주인공의 몸이 뜨는 그 장면을 예로 들곤 했는데, 그런 순간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보네거트가 [제5도살장] 맨 앞에 붙인, 다음과 같은 짧은 캐럴송 가사에서다.

                                         음매하는 울음소리에
                                         아기예수 잠이 깨요
                                         그러나 어린 우리 주 예수
                                         울지 않아요.

 

무명 SF작가 보네거트를 베스트셀러 작가 및 현대 미국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해준 이 소설, [제5도살장]은, 드레스덴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커트 보네거트가 그 경험을 살려 썼다. 외계인과 UFO와 싸구려 SF작가가 등장하고 그 싸구려 작가들이 할 법한 이야기의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마구 분절시켜 버리고는 다시 전(全) 시간적인 세계관으로 통합해 재구성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분절에 '전 시간적 세계관'이라, 쓰는 나도 이게 읽는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어쩐지는 염려스럽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시간과 공간, 아울러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같은 소설을 통해 그래도 어느 정도 대중화되지 않았던가. 모험(?)을 겪는 주인공의 삶의 키워드는 그것이다. '전쟁'.

이 소설을 보노라면, 리얼리즘 문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참 터무니없는 소설’일 듯한 그 전개 사이로, 커트 보네거트가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에 그 고통을 얼마나 이를 악물고 힘겹게 새겨넣었는지 보인다. 소설 전체를 휘감고 있는 무시무시한 블랙유머 때문에 터져나오는 웃음들은, 대단히 씁쓸하고, 힘겹고, 슬프고, 그리고 아프다. (하긴, 이건 심지어 [이나중 탁구부]마저도 슬픔과 안쓰러움이란 키워드로 이해해 버리는 내 무지막지한 감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이 낯설어하는 영어문장식 풍자와 블랙유머가 한국인들에게 별로 어필하지 못하는 것은 잘 알지만, 번역된 문장에도 그런 리듬은 분명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러한 흔적이 주는 ‘낯선 느낌’은 커트 보네거트의 경우 내겐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그 누구보다도 뜨겁고, 물컹하고 물기를 머금은 속을 아주 단단하고, 깐깐하고, 괴팍한 겉껍질로 두르고 그것으로 겨우 존재를 버텨내는, 그런 종류의 치열함, 안간힘. 실제로 커트 보네거트는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대쪽같은 인물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독설과 비꼼 사이에서 비집고 나오는 그 어찌할 수 없는 슬픔과 탄식과 눈물에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세계는 언제나 대량학살을 모티브로 하며, 이에 대한 인간 및 인간사에 대한 환멸과 죄책감, 그럼에도 자신을 '피해자'이긴 하되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그리지는 않는 일종의 꼿꼿하고 무책임하지 않은 자존심을 근간으로 한다. [제5도살장]은 이것이 그의 작품 중 가장 직설법으로 드러나는 소설이다. 일견 그의 소설은 공상의 세계로의 도피, 그로 인한 무책임한 냉소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의 문장 사이사이에 그가 기어코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살짝 배어있는 분노와 '엄청난 슬픔', 인간에 대한 환멸과 저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 그 한심한 인간종에 속해있음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감지한다면, 현실세계에서 그가 전쟁반대와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집회에 노구를 이끌고 나타나는 열성적인 평화주의자 액티비스트이게 하는 동력이 무엇인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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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과 정신의학 - 라캉 이론과 임상 분석
브루스 핑크 지음, 맹정현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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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을 통해 주로 다양한 문화이론과 사회현상 분석의 툴로 일반화되긴 했지만, 라캉은 정신분석학자였고, 임상의였다. 브루스 핑크의 이 책은 그런 '임상을 위한 툴로서'의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입문서라 할 수 있다. 브루스 핑크 그 자신 혹은 그가 키워낸 프로이트 원인학교의 후배들 / 제자들의 임상 경험을 수록하여, 그는 라캉의 이론체계가 다분히 '지나치게 단순화 / 도식화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기본개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임상에 다소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논의들, 거기에 브루스 핑크의 전작 - 국내엔 아직 소개되지 않았고, 현재 번역중이라는 루머만 전해지는 - 인 [라캉의 주체]에서 다룬 논의들은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다. 외려 지젝을 통해 문화이론 혹은 사회이론의 분석 툴로서의 라캉을 읽는 자들에게 중요할 주인기표 1, 2 (S1, S2) 에 대한 설명이랄지, 라캉이 가정한 '실재(계)'에 대한 이야기랄지 등은 주석에 '그런 게 있는데 [라캉의 주체]를 참고하라'고만 소개되어 있을 뿐.


그리하여 이 책을 읽고나면 대략 세 가지 욕망에 시달리게 된다. 1.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고픈 욕망, 2. 프로이트 전집에 손대봐야겠다는 욕망, 3. 지젝의 일련의 책들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고픈 욕망. (모두 거창하기만 하고 시도 가능성은 스스로 봐도 별로 없어보인다.) 안타깝게도 라캉의 원저들에 대한 욕심들이 전혀 일지 않는 것은 브루스 핑크가 얼핏 언급해놓은 바, '워낙에 까다로울 것 같아서'이다. 하긴,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도 까다롭고 읽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라고 하긴 하더만.


이 책을 읽고, 왜 요즘 영화 주인공을 그렇게도 '히스테리증자'니 '강박증자'니 '도착증자'니 혹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신경증자'니 하고 구분하는 유행이 부는지 감을 잡긴 했는데, 솔직히 좀 웃겼다. 그러한 구분과 분석은 브루스 핑크의 서술에 의하면 임상 경험이 풍부해야만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며, 불과 지젝과 부르스 핑크, 프로이트, 그리고 번역 후지기로 유명한 라캉의 번역서 몇 권을 읽고 섣불리 시도하며 어설픈 임상의 흉내를 내는 것은 전형적인 강박증자의 증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내가 이 책을 읽은 덕에 그래도 이 책을 권해준 친구와 나 사이에는 새로운 농담체계가 생겨났다. 예컨대 "그건 전형적인 히스테리증자의 증상 아니야?"라던가 "이런 도착증자 같으니!" 혹은 "당신의 상징계는 위협받고 있어!" 따위의. 물론 친구 쪽은 몰라도 내 쪽에서 내뱉는 농담은 라캉의 이론체계에 대한 무지를 숨기지 않으며 그대로 뻔뻔하게 드러내는 그런 종류의 농담이긴 하다. (역시 강박증자들 특유의 농담체계인 것일까?)


이 책에서 오히려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꼴에 그래도 학부 전공이 명목상 언어학이었다고, 브루스 핑크가 빙산의 일각으로 소개해 놓은, 언어에 대한 라캉의 언급들이다. 브루스 핑크도 명시해 놓은 바, 프로이트가 지시어를 찾을 수 없어 신화들을 새로 창조함으로써(즉 '서사'의 방식으로) 에둘러 표현한 개념들을, 라캉은 프로이트를 되살리면서 언어학적 지식을 차용해 정신분석학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아무리, 미국 의학의 세례를 받은 정신의학계에선 "오래전에 유효기간 끝난 판명난 프로이트 가지고 울궈먹는 후진 인문학"이라며 비아냥댄다 한들, 정신분석학에서 제시하는 기본 개념들과 이론체계는 여전히,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 하나의 좋은 가이드가 된다.


언어는 원래부터가 다의적이고 불명확한 것이다. 비록 언어는 말하려는 자의 의도가 아니라 청자의 해석이 더 중요하다는 브루스 핑크의 관점엔 여전히 동의하지 못하지만, 브루스 핑크가 소개하는 라캉의 언어에 대한 접근은, 비록 이 책에서는 매우 제한된 부분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 해도,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통찰력이 있고 진지하게 파볼 만한 구석이 많다. (솔직히, 졸업하기도 전에 손에서 놓은 언어학쪽 책들을 몇 권 읽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조차 다루지 않았던 내 모교의 언어학과에서 당시 지나가는 이름으로 들었던 라캉을, 이런 식으로 접하(는 시늉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지만, 어쨌건 최근의 인기를 등에 업고 라캉과 브루스 핑크의 책이 속속 번역이 될 예정이라고 하니 잘난척 향연에서 바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지켜보며 깔짝대봐야겠다.






ps. 번역이 꽤 괜찮은 편이어서, 라캉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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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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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이야기]와 함께 문학동네에서 나온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에는, 표제작인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와 함께 |서문: 시모어|가 들어있다. 글라스 일가 이야기는 [아홉 가지 이야기] 맨 앞에 실린 단편, |바나나 피쉬를 위한 완벽한 날|에서 글라스 일가의 7남매 중 첫째인 시모어 글라스의 자살로 시작되는데, 이 책의 두 작품은 시모어 바로 아랫 동생인 버디 글라스가 화자이다.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는 시모어의 결혼식을 묘사하고 있고, |서문: 시모어|는 시모어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회상과 그리움을 일기체로 표현한다.


솔직히 말하면 [프래니와 주이]까지 재미있게 읽던 글라스 일가가 이 책에서 지리멸렬해져버렸는데 이것은 번역자 탓이다. [아홉 가지 이야기] 책을 다시 확인해보니 번역이 최승자. 요즘은 시보다 번역에 주력하는 듯한 이 양반의 번역은 확실히 매끄럽고, 글라스 일가를 지배하는 그 우울이 제대로 드러난다. 반면 정영목 씨의 번역은 가독성이 심하게 떨어지고, 한글 문장의 적법성도 위태위태하다. |서문: 시모어|는 영어 원문으로도 독백체라 다소 지리멸렬한 부분이 있을 것같은데 번역이 이러니 더욱 집중이 안 된다. 상당히 오랜 기간 읽은 데다 읽고나서도 별반 임팩트가 없다. 오죽하면 영어 원서를 구해서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을까.


30여 종이 출판된 [호밀밭의 파수꾼] 중 우수한 번역본은 단 한 본도 없더라는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의 결과 보고를 보면, 샐린저가 일부러 문장을 지리멸렬하게, 단어를 중복, 반복해가면서 쓰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주로 화자의 내면을 드러낼 때. [호밀밭의 파수꾼]과, [아홉 가지 이야기]에 실린 단편 중 몇 편이 그러했고, |서문: 시모어|가 그렇다. 거기에 지리멸렬한 번역이 더해지면 폭탄이 되는 건 자명한 일.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만 해도, 나름의 또렷한 사건 전개를 취하고 있다.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는 신랑과, 신랑을 향해 죽도록 독설을 내뱉는 하객 몇 명과,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행여 자신이 신랑의 동생이라는 게 드러날까봐 노심초사하는 화자가 겪는 사건. 지독한 여름의 폭염이 쏟아지는 가운데 말이다. 그럼에도 읽기가 수월치 않았다.


시모어 바로 밑엣 동생이었고, 형을 우상처럼 생각하던 버디가 자살한 시모어를 향해 갖는 상처는 프래니나 주이보다 확실히 더 직접적이다. 그러나 또한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흘렀기 때문에, 그 상처는 다른 방식으로 버디의 삶을 여전히 지배한다. 프래니나 주이, 그리고 버디의 회상을 통해 짜맞춰지는 시모어의 모습은, 다소 고지식하고, 동생들을 끝없이 챙기는 듬직한 맏오빠/맏형이고, 종교적 감수성이 예민하며, 시인이고, 더없이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 다소 어울려 보이지 않는 - 사람들에 대한 애정 또한 각별하다. 물론 나 역시, 시모어의 예상대로 버디가 시모어의 아내와 장모를 경멸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면에서 시모어는, 단순히 '깨달은 자'를 넘어서는, 뭐랄까 종교가로서의 면모가 확실히 있다.


그러나 동생들의 회상 속에서 맞추어지는 시모어는 알면 알수록 더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알라딘의 독자 중 누군가는 "그 사람다운 자살"이라고 평했지만 나로서는, 그저 가슴이 싸하게 아파오기만 할 뿐,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내가 시모어에게 갖는 애정이란 결국, 어쩌면 형제 많은 집의 예수 컴플렉스를 가진 첫째의 특성에 대한 동병상련, 혹은 버디나 프래니와 주이에게 그랬듯 나 역시 동생들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무겁게 남아있는 존재가 되길 은근히 바라는 욕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ps. 다른 개인 블로그에 이 리뷰를 올렸을 때 그 밑에 달린 댓글 두 개를 밑에 붙인다. 굉장히 즐겁고, 날카로운 대화였다. 이 책을 두고 고민하는 분들께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J.


샐린저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전에 이야기했듯, 나는 시모어의 그 무거운 존재감은 일정부분 버디의 회상 혹은 이상화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해. 버디의 눈으로 바라본 시모어. 정작 시모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그 쪽지들과, 바나나피쉬 뿐인데, 여기서 보여지는 시모어는 버디의 생각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자기에게 쏟아지는 주위의 시선을 꽤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보여. 이를테면 아우라 뒤에서 질식해가는 수퍼스타의 모습, 이랄까. 다시 읽어보면, 좀 더 명확하게 보일 것 같은데 언제쯤 다시 읽게 될 지는, 알 수 없는 일. ^^






노바리


글쎄. 나는 버디가 재구성하기 전에도 시모어의 존재감을 굉장히 강하게 느꼈거든. 프래니와 주이에서부터. 물론 시모어를 그렇게 이상화하는 건 버디의 시선이고, 실제로 버디와 함께 시모어를 우상화하며(?) 지낸 부부의 경우 시모어에 대한 컴플렉스는 그리 크지 않아보여. 버디에겐 시모어가 일종의 정신적 아버지였겠지. (레스-그들의 친부-의 존재감은 매우 희박하잖아.) 시모어에 대한 강한 존재감을 느끼는 건 버디 때문이 아니라 매우 개인적인 이유야. 이 글 마지막 문장, 이른바 첫째 컴플렉스. J.도 알다시피 게다가 딸만 넷인 집에서 일종의 '장남' 대접 받는 큰딸로선, 시모어가 느끼는 갈등 - 자신이 보는 자신은 그닥 특출나지 않은데 동생이 자신을 우상화하는 - 이 무언지, 조금은 어렴풋이 짐작도 가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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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니와 주이
J.D. 샐린저 지음, 유영국 그림, 황성식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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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이야기]에 실린 단편 중 맨 처음 실린 |바나나 피쉬를 위한 완벽한 날|은 한 여자가 자기 어머니와 통화하는 내용을 참 길고도 꼼꼼하게 옮겨놓으며 시작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제외하고 처음 샐린저 월드에 발을 디딘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이 여자의 이 지리멸렬해 보이는 삶이 이 이야기의 중심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단편의 주인공은 시모어 글래스다. 시모어가 느닷없이 자신의 머리에 대고 총을 쏘는 것으로 이 단편은 끝이 난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이어질 글래스 일가 사람들과의 인연의 첫 시작이 된다. 이후 샐린저의 단편들 중 많은 숫자는 글래스 일가의 7남매 중 살아남은 여섯 명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같은 책에 명백하게 실린 글래스 일가 출신은 [작은 보트에서]에 나오는 꼬마 주인공의 엄마, 부부 글래스뿐이다. (이 단편에서는 시모어가 지나가듯 언급된다.) 그러나 샐린저의 팬들은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에서 웨이커 글래스의 흔적을 발견하며, [웃는 남자]의 화자가 버디 글래스일 것으로 짐작하기를 즐긴다.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의 화자 역시 글래스 가문의 한 사람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샐린저는 이후 잡지에 발표한 단편들을 묶어 출판한 [프래니와 주이]와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 이후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고, 심지어 자신과 서신교환한 사람이 자신이 보낸 편지를 출판하려 하자 법의 힘으로 그걸 제지시키기까지 하며 은둔생활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샐린저가 [아홉 가지 이야기] 이후 출판한 이 책, [프래니와 주이]는 두 개의 중단편이 들어있다. |프래니|와 |주이|라는 중단편 제목 그대로, 그래스 일가 일곱 남매 중 가장 막내인 프래니와 바로 그 위 주이의 이야기가 차례로 들어있다. (하지만 국내 번역본에는 출판사측에서는 책 전체를 임의로 하나의 중편으로 다루면서 중간에 네 개의 소제목을 달아놓고 있다.)


격렬하게 영혼의 각성의 시기를 맞이한 스무 살의 프래니가 보여주는 내면의 전투의 흔적들. 그녀는 자기보다 열 여덟 살이나 많았던, 그리고 죽은지 7년이 된 큰오빠 - 라기보다는 삼촌과 같은 존재였던 - 시모어의 종교적 흔적을 새삼 따라간다. 그 각성의 순간이 주는 고통은, 상실의 고통과 맞물려있다. 물론 그녀가 겪는 상실이란 시모어와 고작 두 살 차이로 비슷한 시기를 함께 보낸 버디의 상실과는 형태도 내용도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겪는 그 격렬한 소용돌이에 상실의 고통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정작 시모어가 떠났을 때 그녀는 아주 어린 소녀에 불과했지만, 그 고통은 7년이 넘어서야 뒤늦게 도착한 것이다. 뒤집어서 얘기하자면, 이토록 글래스 일가에는, 7년의 시간차를 두고 영혼의 대각성기가 주는 고통의 시간에 상실의 고통을 깨닫게 할 정도로, 시모어의 존재감은 막강한 것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이에게도 마찬가지다.


시모어와 열 세 살 차이이고, 프래니보다 다섯 살 손위인 주이는 현재 '그럭저럭 잘 나가는' 배우이다. 버디에게서 받은 편지를 7년째 품고다니며 읽고 또 읽고 하는 그. 프래니의 고통을 보면서, 시모어가 죽은지 한참 지났어도 시모어의 유령이 참 단단히도 박혀 이들 주변을 떠돌아다니고 있구나, 했었는데, 바로 주이의 입을 통해 이 말이 선언된다. 가엾게도 고통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감수성 예민한 프래니를 보며 주이가 던져주는 말에는, 그 역시 프래니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시간차 상실의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 암시된다. 하지만 주이는 프래니에게 조근조근 던져준다. 시모어가 했던 말 기억해? 뚱보 아줌마를 기억해?


주이의 말에 상처를 받기도,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마침내 주이가 상기시켜준 뚱보 아줌마의 비밀에 프래니는 비로소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하지만 주이의 내면은, 프래니보다 조금 쉽게 그 깨달음의 순간을 지나오긴 했어도, 프래니보다 더 쉽게 완전히 극복한 것 같지 않다. 여전히 주이의 내면은 전투중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프래니 역시 앞으로도 그 전투를 계속 해나가긴 하겠지만, 왠지 앞으로의 그녀는 주이보다 조금 더 평온하게 그 전투를 치를 것같다.) 자신이나 프래니는 버디 형이나 다른 형제들보다 시모어의 죽음의 영향권에 덜 속해 있다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에, 다른 형, 누나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시모어의 죽음을 계속 짐으로 지고 갈 것이며, 그들이 벌이는 내면의 전투는, 상처를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버디나 부부나 웨이커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상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평생 지속될 것이다. 비슷한 상처를 가진 주이와 프래니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 상처를 온전히 둘이서만 공유할 것이고, 극복 과정 역시 그러하겠지.


어느새 나 역시 글래스 일가의 사람들이 어깨 위에 지고 있는 그 짐을 아주 조금, 나눠지고 있는 것같다. 나에게도 시모어의 존재가 조금씩, 커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갖게 된 짐은 버디나 웨이커나 부부의 것과는 물론, 주이나 프래니의 것과도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글래스 이야기에 매혹된 샐린저의 다른 팬들과 공유하고 도닥여야 할 종류의 상처이리라.    

 

ps.[아홉 가지 이야기]에서 최승자 시인의 번역에 너무 확 익숙해진 탓인지, 이 책의 번역문체는 다소 낯설게 여겨졌다. 뭐랄까, 좀 간지럽고 닭살스럽달까. 샐린저의 원래 문체는 좀더 드라이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이건 선호도의 문제이니, 도저히 한문장 한문장 읽어내려가기 괴로웠던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문제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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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7 2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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