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정신의학 - 라캉 이론과 임상 분석
브루스 핑크 지음, 맹정현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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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을 통해 주로 다양한 문화이론과 사회현상 분석의 툴로 일반화되긴 했지만, 라캉은 정신분석학자였고, 임상의였다. 브루스 핑크의 이 책은 그런 '임상을 위한 툴로서'의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입문서라 할 수 있다. 브루스 핑크 그 자신 혹은 그가 키워낸 프로이트 원인학교의 후배들 / 제자들의 임상 경험을 수록하여, 그는 라캉의 이론체계가 다분히 '지나치게 단순화 / 도식화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기본개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임상에 다소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논의들, 거기에 브루스 핑크의 전작 - 국내엔 아직 소개되지 않았고, 현재 번역중이라는 루머만 전해지는 - 인 [라캉의 주체]에서 다룬 논의들은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다. 외려 지젝을 통해 문화이론 혹은 사회이론의 분석 툴로서의 라캉을 읽는 자들에게 중요할 주인기표 1, 2 (S1, S2) 에 대한 설명이랄지, 라캉이 가정한 '실재(계)'에 대한 이야기랄지 등은 주석에 '그런 게 있는데 [라캉의 주체]를 참고하라'고만 소개되어 있을 뿐.


그리하여 이 책을 읽고나면 대략 세 가지 욕망에 시달리게 된다. 1.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고픈 욕망, 2. 프로이트 전집에 손대봐야겠다는 욕망, 3. 지젝의 일련의 책들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고픈 욕망. (모두 거창하기만 하고 시도 가능성은 스스로 봐도 별로 없어보인다.) 안타깝게도 라캉의 원저들에 대한 욕심들이 전혀 일지 않는 것은 브루스 핑크가 얼핏 언급해놓은 바, '워낙에 까다로울 것 같아서'이다. 하긴,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도 까다롭고 읽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라고 하긴 하더만.


이 책을 읽고, 왜 요즘 영화 주인공을 그렇게도 '히스테리증자'니 '강박증자'니 '도착증자'니 혹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신경증자'니 하고 구분하는 유행이 부는지 감을 잡긴 했는데, 솔직히 좀 웃겼다. 그러한 구분과 분석은 브루스 핑크의 서술에 의하면 임상 경험이 풍부해야만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며, 불과 지젝과 부르스 핑크, 프로이트, 그리고 번역 후지기로 유명한 라캉의 번역서 몇 권을 읽고 섣불리 시도하며 어설픈 임상의 흉내를 내는 것은 전형적인 강박증자의 증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내가 이 책을 읽은 덕에 그래도 이 책을 권해준 친구와 나 사이에는 새로운 농담체계가 생겨났다. 예컨대 "그건 전형적인 히스테리증자의 증상 아니야?"라던가 "이런 도착증자 같으니!" 혹은 "당신의 상징계는 위협받고 있어!" 따위의. 물론 친구 쪽은 몰라도 내 쪽에서 내뱉는 농담은 라캉의 이론체계에 대한 무지를 숨기지 않으며 그대로 뻔뻔하게 드러내는 그런 종류의 농담이긴 하다. (역시 강박증자들 특유의 농담체계인 것일까?)


이 책에서 오히려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꼴에 그래도 학부 전공이 명목상 언어학이었다고, 브루스 핑크가 빙산의 일각으로 소개해 놓은, 언어에 대한 라캉의 언급들이다. 브루스 핑크도 명시해 놓은 바, 프로이트가 지시어를 찾을 수 없어 신화들을 새로 창조함으로써(즉 '서사'의 방식으로) 에둘러 표현한 개념들을, 라캉은 프로이트를 되살리면서 언어학적 지식을 차용해 정신분석학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아무리, 미국 의학의 세례를 받은 정신의학계에선 "오래전에 유효기간 끝난 판명난 프로이트 가지고 울궈먹는 후진 인문학"이라며 비아냥댄다 한들, 정신분석학에서 제시하는 기본 개념들과 이론체계는 여전히,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 하나의 좋은 가이드가 된다.


언어는 원래부터가 다의적이고 불명확한 것이다. 비록 언어는 말하려는 자의 의도가 아니라 청자의 해석이 더 중요하다는 브루스 핑크의 관점엔 여전히 동의하지 못하지만, 브루스 핑크가 소개하는 라캉의 언어에 대한 접근은, 비록 이 책에서는 매우 제한된 부분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 해도,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통찰력이 있고 진지하게 파볼 만한 구석이 많다. (솔직히, 졸업하기도 전에 손에서 놓은 언어학쪽 책들을 몇 권 읽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조차 다루지 않았던 내 모교의 언어학과에서 당시 지나가는 이름으로 들었던 라캉을, 이런 식으로 접하(는 시늉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지만, 어쨌건 최근의 인기를 등에 업고 라캉과 브루스 핑크의 책이 속속 번역이 될 예정이라고 하니 잘난척 향연에서 바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지켜보며 깔짝대봐야겠다.






ps. 번역이 꽤 괜찮은 편이어서, 라캉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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