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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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이야기]와 함께 문학동네에서 나온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에는, 표제작인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와 함께 |서문: 시모어|가 들어있다. 글라스 일가 이야기는 [아홉 가지 이야기] 맨 앞에 실린 단편, |바나나 피쉬를 위한 완벽한 날|에서 글라스 일가의 7남매 중 첫째인 시모어 글라스의 자살로 시작되는데, 이 책의 두 작품은 시모어 바로 아랫 동생인 버디 글라스가 화자이다.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는 시모어의 결혼식을 묘사하고 있고, |서문: 시모어|는 시모어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회상과 그리움을 일기체로 표현한다.


솔직히 말하면 [프래니와 주이]까지 재미있게 읽던 글라스 일가가 이 책에서 지리멸렬해져버렸는데 이것은 번역자 탓이다. [아홉 가지 이야기] 책을 다시 확인해보니 번역이 최승자. 요즘은 시보다 번역에 주력하는 듯한 이 양반의 번역은 확실히 매끄럽고, 글라스 일가를 지배하는 그 우울이 제대로 드러난다. 반면 정영목 씨의 번역은 가독성이 심하게 떨어지고, 한글 문장의 적법성도 위태위태하다. |서문: 시모어|는 영어 원문으로도 독백체라 다소 지리멸렬한 부분이 있을 것같은데 번역이 이러니 더욱 집중이 안 된다. 상당히 오랜 기간 읽은 데다 읽고나서도 별반 임팩트가 없다. 오죽하면 영어 원서를 구해서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을까.


30여 종이 출판된 [호밀밭의 파수꾼] 중 우수한 번역본은 단 한 본도 없더라는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의 결과 보고를 보면, 샐린저가 일부러 문장을 지리멸렬하게, 단어를 중복, 반복해가면서 쓰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주로 화자의 내면을 드러낼 때. [호밀밭의 파수꾼]과, [아홉 가지 이야기]에 실린 단편 중 몇 편이 그러했고, |서문: 시모어|가 그렇다. 거기에 지리멸렬한 번역이 더해지면 폭탄이 되는 건 자명한 일.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만 해도, 나름의 또렷한 사건 전개를 취하고 있다.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는 신랑과, 신랑을 향해 죽도록 독설을 내뱉는 하객 몇 명과,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행여 자신이 신랑의 동생이라는 게 드러날까봐 노심초사하는 화자가 겪는 사건. 지독한 여름의 폭염이 쏟아지는 가운데 말이다. 그럼에도 읽기가 수월치 않았다.


시모어 바로 밑엣 동생이었고, 형을 우상처럼 생각하던 버디가 자살한 시모어를 향해 갖는 상처는 프래니나 주이보다 확실히 더 직접적이다. 그러나 또한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흘렀기 때문에, 그 상처는 다른 방식으로 버디의 삶을 여전히 지배한다. 프래니나 주이, 그리고 버디의 회상을 통해 짜맞춰지는 시모어의 모습은, 다소 고지식하고, 동생들을 끝없이 챙기는 듬직한 맏오빠/맏형이고, 종교적 감수성이 예민하며, 시인이고, 더없이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 다소 어울려 보이지 않는 - 사람들에 대한 애정 또한 각별하다. 물론 나 역시, 시모어의 예상대로 버디가 시모어의 아내와 장모를 경멸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면에서 시모어는, 단순히 '깨달은 자'를 넘어서는, 뭐랄까 종교가로서의 면모가 확실히 있다.


그러나 동생들의 회상 속에서 맞추어지는 시모어는 알면 알수록 더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알라딘의 독자 중 누군가는 "그 사람다운 자살"이라고 평했지만 나로서는, 그저 가슴이 싸하게 아파오기만 할 뿐,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내가 시모어에게 갖는 애정이란 결국, 어쩌면 형제 많은 집의 예수 컴플렉스를 가진 첫째의 특성에 대한 동병상련, 혹은 버디나 프래니와 주이에게 그랬듯 나 역시 동생들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무겁게 남아있는 존재가 되길 은근히 바라는 욕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ps. 다른 개인 블로그에 이 리뷰를 올렸을 때 그 밑에 달린 댓글 두 개를 밑에 붙인다. 굉장히 즐겁고, 날카로운 대화였다. 이 책을 두고 고민하는 분들께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J.


샐린저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전에 이야기했듯, 나는 시모어의 그 무거운 존재감은 일정부분 버디의 회상 혹은 이상화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해. 버디의 눈으로 바라본 시모어. 정작 시모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그 쪽지들과, 바나나피쉬 뿐인데, 여기서 보여지는 시모어는 버디의 생각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자기에게 쏟아지는 주위의 시선을 꽤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보여. 이를테면 아우라 뒤에서 질식해가는 수퍼스타의 모습, 이랄까. 다시 읽어보면, 좀 더 명확하게 보일 것 같은데 언제쯤 다시 읽게 될 지는, 알 수 없는 일. ^^






노바리


글쎄. 나는 버디가 재구성하기 전에도 시모어의 존재감을 굉장히 강하게 느꼈거든. 프래니와 주이에서부터. 물론 시모어를 그렇게 이상화하는 건 버디의 시선이고, 실제로 버디와 함께 시모어를 우상화하며(?) 지낸 부부의 경우 시모어에 대한 컴플렉스는 그리 크지 않아보여. 버디에겐 시모어가 일종의 정신적 아버지였겠지. (레스-그들의 친부-의 존재감은 매우 희박하잖아.) 시모어에 대한 강한 존재감을 느끼는 건 버디 때문이 아니라 매우 개인적인 이유야. 이 글 마지막 문장, 이른바 첫째 컴플렉스. J.도 알다시피 게다가 딸만 넷인 집에서 일종의 '장남' 대접 받는 큰딸로선, 시모어가 느끼는 갈등 - 자신이 보는 자신은 그닥 특출나지 않은데 동생이 자신을 우상화하는 - 이 무언지, 조금은 어렴풋이 짐작도 가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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