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절대적인 예술적 경험의 순간'으로 매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에서 남녀 주인공의 몸이 뜨는 그 장면을 예로 들곤 했는데, 그런 순간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보네거트가 [제5도살장] 맨 앞에 붙인, 다음과 같은 짧은 캐럴송 가사에서다.

                                         음매하는 울음소리에
                                         아기예수 잠이 깨요
                                         그러나 어린 우리 주 예수
                                         울지 않아요.

 

무명 SF작가 보네거트를 베스트셀러 작가 및 현대 미국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해준 이 소설, [제5도살장]은, 드레스덴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커트 보네거트가 그 경험을 살려 썼다. 외계인과 UFO와 싸구려 SF작가가 등장하고 그 싸구려 작가들이 할 법한 이야기의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마구 분절시켜 버리고는 다시 전(全) 시간적인 세계관으로 통합해 재구성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분절에 '전 시간적 세계관'이라, 쓰는 나도 이게 읽는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어쩐지는 염려스럽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시간과 공간, 아울러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같은 소설을 통해 그래도 어느 정도 대중화되지 않았던가. 모험(?)을 겪는 주인공의 삶의 키워드는 그것이다. '전쟁'.

이 소설을 보노라면, 리얼리즘 문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참 터무니없는 소설’일 듯한 그 전개 사이로, 커트 보네거트가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에 그 고통을 얼마나 이를 악물고 힘겹게 새겨넣었는지 보인다. 소설 전체를 휘감고 있는 무시무시한 블랙유머 때문에 터져나오는 웃음들은, 대단히 씁쓸하고, 힘겹고, 슬프고, 그리고 아프다. (하긴, 이건 심지어 [이나중 탁구부]마저도 슬픔과 안쓰러움이란 키워드로 이해해 버리는 내 무지막지한 감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이 낯설어하는 영어문장식 풍자와 블랙유머가 한국인들에게 별로 어필하지 못하는 것은 잘 알지만, 번역된 문장에도 그런 리듬은 분명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러한 흔적이 주는 ‘낯선 느낌’은 커트 보네거트의 경우 내겐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그 누구보다도 뜨겁고, 물컹하고 물기를 머금은 속을 아주 단단하고, 깐깐하고, 괴팍한 겉껍질로 두르고 그것으로 겨우 존재를 버텨내는, 그런 종류의 치열함, 안간힘. 실제로 커트 보네거트는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대쪽같은 인물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독설과 비꼼 사이에서 비집고 나오는 그 어찌할 수 없는 슬픔과 탄식과 눈물에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세계는 언제나 대량학살을 모티브로 하며, 이에 대한 인간 및 인간사에 대한 환멸과 죄책감, 그럼에도 자신을 '피해자'이긴 하되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그리지는 않는 일종의 꼿꼿하고 무책임하지 않은 자존심을 근간으로 한다. [제5도살장]은 이것이 그의 작품 중 가장 직설법으로 드러나는 소설이다. 일견 그의 소설은 공상의 세계로의 도피, 그로 인한 무책임한 냉소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의 문장 사이사이에 그가 기어코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살짝 배어있는 분노와 '엄청난 슬픔', 인간에 대한 환멸과 저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 그 한심한 인간종에 속해있음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감지한다면, 현실세계에서 그가 전쟁반대와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집회에 노구를 이끌고 나타나는 열성적인 평화주의자 액티비스트이게 하는 동력이 무엇인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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