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E. M. 포스터 전집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E.M. 포스터의 소설 [모리스]는 여느 성장소설과 마찬가지로, 자아를 향한, 그리고 진리를 향한 여정이다. 동성애자인 모리스에게는 그것이 주로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 관련한, 사랑하는 이와 열심히 사랑하며 인생을 사는 법에 대한 것이었을 뿐. 그리하여 마침내 그가 진리를 총체적으로 깨닫고 그 진리에 몸을 내맡겼을 때, 마침내 자유를 얻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을 깨달은 모리스에게 우리는 니체의 말을 빌려 ‘초인’이라 말할 수도, 혹은 칸트의 말을 빌려 ‘윤리적 인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경험하매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미몽단계를 거쳐, 모리스가 그 진리의 형체를 경험하게 되는 건 케임브리지에서다. 우연히 마주치고 ‘잘 보이고 싶었던’ 선배인 더럼이라는 새로운 안내자를 만난 탓이다. 더럼이 고백을 해올 때도 허걱하며 펄쩍 뛰었던 그는,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감정의 정체를 깨닫고 더럼의 고백에 화답한다. 그러나 이 시간들은, 자신의 운명과 자신을 둘러싼 진리의 형체를 어렴풋이 깨닫게는 되지만 결코 그것이 함축하고 있던 본질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미숙한 단계이다. 그리고 그를 이끌었던 더럼은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이성애자가 됐어!”를 외치며 모리스와의 사랑에 마침표를 찍는다.


더럼은 전통적인 보수사회에 귀환했지만, 그의 배신은 모리스에게 있어 진정 진리를 향해 앞으로 한발짝 더 나아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더럼은 그 자신이 진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리스를 진리의 문앞으로 인도했을 뿐이다. 그리고 모리스에게 상실감을 안겨줌으로써, 그 자신은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했지만, 모리스가 정말로 통과해야 할 문 바로 앞에서 미성숙한 상태로 주저앉지 않도록 엉덩이를 쳐낸다.


외관상 그는 젊고 능력있는 증권중개업자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 보이고, 더럼과의 사랑도 문제가 없는 듯 보였지만, 그들의 사랑은 반쪽자리였으며, 스스로에게도 남들에게도 숨기여야만 하는 것, 100% 자신의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한 그런 사랑이었다. 더럼의 배신으로 인해 나락에 떨어졌던 모리스는 알렉과의 만남으로 마침내 그 모든 미망을 떨쳐내고 비로소 진리 앞에 선다.지방 유지 출신으로 모든 면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던 모리스였지만,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사랑을 심지어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이로부터도 부정당하고, 그 억압을 느끼면서 비로소,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그 어느 곳보다 유독 더 꽉 막힌 영국의 그 ‘신사사회’의 위선, 인간의 가장 고귀한 사랑마저 재단하고 ‘믿지 못할 것’으로 만드는 계급, 이성애 강요의 사회가 어떻게 인간을 억압하고 참 진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지까지 깨닫는 순간, 그리하여 그가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 심지어 자신의 가식과 위선마저도 - 벗어던지며 자신의 본연에 충실하는 순간, 그가 성취하게 된 것은 바로 자유로움이다. 진리가 주는 자유로움. 지적인 면에 다소 둔하고 인식에 있어 명민하지 못하지만 한번 깨달은 것은 다른 그 누구도 부러워할 정도로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삼는 고지식하고 윤리적인 인간 모리스가 마지막에 맺는 해피엔딩은, 그에겐 당연한 것이다. 모리스는 그 누구보다 그러한 해피엔딩을 맞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제 진리의 품안에 안긴 모리스와 위선의 계급사회로 귀환환 더럼의 대조가 뚜렷한 마지막 장면은 최고의 소설 엔딩 중 하나라고 감히 추천할 수 있다.


... 라고 거창하게 얘기했지만, 이 소설의 본질은 "연애소설"이다. E.M. 포스터라는 작가의 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사람을 정말 사정없이 빨아들인다. 우리의 주인공이 한숨지을 때 같이 한숨짓고, 환희에 들뜰 때 같이 환호성을 지르고, 고통스러워할 때 같이 가슴을 찢어지게 만든다. 마지막 장을 덮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한참을 펑펑 울게 만들기도 하고 말이지. (오빠, 왜 이제서야 오셨나요 엉엉엉~~)


E.M. 포스터의 소설은 제임스 아이보리 사단에 의해 세 편이 영화화되었고(<전망좋은 방>, <하워즈 엔드>, <모리스>), 한 편은 데이비드 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인도로 가는 길>). 국내에는 영화화되었던 소설들이 간헐적으로 소개되었다 절판되었다를 반복하면서 '제대로' 소개된 적은 없었는데, 열린책들에서 전집이 나오고 있다. (만세 삼창~!!!) 표지도 너무 예쁘다. 이번에 본 것은 97년에 나온 계몽사 버전이지만, 열린책들 버전의 전집을 모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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