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범대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4년간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 중 하나는 다름 아닌 ‘피아제’였다. 인간의 초기 발달 과정을 다루면서 어김없이 피아제의 ‘감각기-전조작기-구체적 조작기-추상적 조작기’(였던 걸로 기억되는) 이론을 배우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피아제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질문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런 것이 단 한 번도 ‘피아제’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무어라 정의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교육학, 심리학 등의 분야에서 그는 실로 지금까지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렇기에 “피아제는 중요한가?”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아마도, 그의 이론의 옳고 그름 여부와는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그렇다”라고 답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게다가 생전에 그는 철학, 사회학, 과학 분야에서까지 교수직을 수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기 드물게 방대한 영역에 걸친 이론적 저술 작업을 보여주었던 피아제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런 것이 그의 저술 대다수가 이해하기 난해한 추상적인 문체로 이루어져 있는지라 제 아무리 강렬한 의욕을 지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몇 페이지 못 가서 기가 확 꺾여 버리고 마는 것이다. ‘평형’, ‘동화’, ‘조절’ 등 심리학과 인식론 분야에서는 다소 모호한 용어는 피아제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혼란스러운 심상’만을 안겨줄 뿐. 하지만 피아제의 연구는 탁월했다. 당시로서는 지배적이었던 인식론적 경향을 거부하고, 자신의 세 자녀를 통한 경험적 관찰에 근거한 연구를 전개함으로써, 현재 그는 심리학에 새로운 방법론을 도입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역시나 가장 흥미로운 분야는 인간의 발달 과정에 대한 피아제의 이론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피아제는 인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도한 교육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나타냈다. 이는 그가 어린 아이의 자발적인 반응을 저해함으로써 자발적인 성장을 방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피아제였기에, 만약 우리나라의 조기 교육 열풍을 그가 접했더라면 아마도 입에 거품을 물지 않았을까 싶다.-_-) 대신 그는 발달에 있어서 감각의 중요성을 중시하였다. 직접 사물을 (시각, 청각 등도 모두 포함한) 감각을 통해 지각하고, 각각의 감각을 통해 얻은 반응들을 협응시켜 나감으로써 보다 고차원적인 발달을 이룬다고 본 것이다. 여기까지 본다면 그의 이론은 다소 환경 결정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장의 과정 속에서 어떠한 반응을 경험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의 발달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는 추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피아제는 여기에 일종의 ‘안정망’을 제시한다. 대신 그는 발생학적으로 특정한 방향을 향해 발달하도록 유도하는 자기 조절 구조 체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을 이미 내재되어 있는 체계가 지도하는 발달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동기화 부여’ 기제로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이를 칸트의 철학과 연결시키기까지 했다.) 더불어, 이러한 그의 이론은 인간의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와 관련시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84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친 그의 삶의 여정은 그로 하여금 보다 풍부한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라 하여 완벽한 것은 아니다. 다양한 감각을 통한 고차원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과정 속에서 그는 일종의 진화의 가능성에 대해 논하였다. 하지만 어떻게 여전히 미개한(?!) 수준의 발달 단계에 머물러 있는 생물들이 존재할 수 있는지 그의 이론은 말해주지 않는다. 거기에, 인간 발달에 대한 그의 이론이 절대적으로 여겨질 경우, 그가 주창한(?) 발달의 모습과는 다른 발달의 양상을 보이는 이들에 대해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기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제의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연구 성과물 앞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것은 아마도 학자로서 그가 보여준 지치지 않는 행보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