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개혁을 역설했다. 교회는 경건과 구별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경외에서 시의 도덕을 책임져야 하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귀감이 되는 도시로 제네바를 만들었다. 혹자는 이를 보고 칼빈이 영적 자유, 정부의 복종에 치중하여 정치적 자유는 조명하지 못했다고 말하나 칼빈의 정치사상은 그렇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불의한 통치자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고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행정관료에게는 왕에게 항거할 수 있으며 인간에게 복종이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로서 하나님 아래있는 모든 권세, 즉 국가 권력까지도 상대화 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칼빈의 정치적 유언장과 같아서 그는 마키아벨리즘이 대두되는 시대에 모든 종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정치권력에 대항하였다. 그의 사망이후 프랑스 위그노들 사이에선 루터파에는 없는 저항권이 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민주주의적 정치를 법적으로 만드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유럽의 민주주의 문화와 인권사상에 기여하였다. 그의 제네바 정부와의 권한 다툼에서 나온 교회의 자율권요구, 계약사상의 강조, 그리고 장로교 노회정치는 현대 민주주의의 구조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한다.
칼빈의 정치 사상은 프랑스의 위그노들에게 영향을 주었는 데 당시 왕권신수설에 기초한 절대왕조사상이 있던때에 보뎅,포네,호트만 등은 이를 비판하며 통치자와 백성관계는 계약관계라는 사상으로 왕정에 도전하였다. “지배자는 하나님과의 계약에 의해서, 공의를 실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국왕또한 하나님의 법에 묶여 있는 것이다.” 독재자에 대한 항거를 옹호함이라는 책에서는 계약은 하나님과 왕사이,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사이의 이중적임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위그노들은 백성과 통치자 모두가 계약아래 매여있으므로 계약을 포기하거나 범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합법적으로 왕위에 오른 군주라 해도 계약을 파기하고 독재자가 되어 법과 정의,진실을 무시하게 될 때에, 백성이 독재자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위그노의 정치사상은 국가 계약 사상과 민주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스코틀랜드의 존낙스 또한 왕이 법을 다스리려할 것이 아니라 법이 왕을 다스려야한다. 왕이라도 법을 지키지 않으면 힘에의해 저항을 받게 될것이라고 했다. 그는 장로교회정치,법치주의,백성의 저항권을 인정하였다. 이 사상은 사무엘 러더포드에게 영향을 주어 더욱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