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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자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평점 :
갑자기 누군가에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한없이 꺼내놓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결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이야기에 누군가가 귀기울여주고 있다는 것, 나의 마음에 같이 동조해주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되는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마저도 견딜 수 없을 때, 나를 아는 사람이 이 모든 사정을 안다는 것이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고, 혼자서 이겨낼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무력감마저 느껴질 때는 일기장에 제 마음을 털어놓곤 합니다. 울기도 하고 욕도 하고 다짐도 해요. 그래도. 응답을 원합니다. 곁에서 등을 토닥여줄, 설령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상황이어도 ‘괜찮아’라는 한마디로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해요. 그래서 요즘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게 된 것일까요. 누군가는, 그리고 저도 ‘힐링’이라는 말 뒤에 숨는 나약함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힐링’을 원하는 저는 모순된 존재이지만, ‘힐링’이 갖는 따스함을 완전히 모른 척 하기란 힘든 일이란 것도 알고 있으니까요.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은 저에게 그 ‘힐링’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마치 한군데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절은 돌고, 상황은 변하고,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p116
일본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에쿠니 가오리를 통해서였지만 그 세계로 더욱 빠져들게 만든 것은 요시모토 바나나였어요. 제가 처음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무렵, 어느 정도 중급과정까지 끝내고 새벽에 함께 공부하던 자료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었으니까요. (그 때 저를 이끌어주신 박*희 선생님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요. 보고 싶습니다!!) 졸린 눈을 부비며 어떻게든 버스를 타고 가서 1시간 동안 함께 읽었던 [키친]. 물론 그 때부터 그녀의 작품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 가벼운 듯도 해서 잘 읽지 않았던 일상문학작품 중에서도 바나나님의 작품은 꼬박꼬박 챙겨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그녀의 작품을 읽다가 위로받는 느낌을 받은 것은 [왕국]을 읽을 때였어요. 어쩐지 편안해지는 느낌, 어깨에서 조금 힘을 빼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안심, 봄날의 가벼운 바람조차 소중하게 대할 수 있겠다는 기분을 그 작품을 통해 알았답니다. 그 후 그녀의 작품은 저에게 부쩍 의미를 갖게 되었죠.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번 [도토리 자매]는 유독 그런 ‘힐링’과 ‘위로’의 느낌이 강하네요.
가난했지만 딸들의 이름을 돈코와 구리코-앞글자를 따서 합치면 돈구리, 즉 도토리가 됩니다-로 지을 정도로 귀여웠던 부모님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도토리 자매. 숙부님의 집에서 지낼 때는 몰랐지만 숙부님이 돌아가시고 돈많은 의사와 결혼한 이모 집에서 지내게 된 자매는 답답한 생활에서 벗어나길 소망합니다. 언니 돈코는 꼭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가고, 그렇게 떠나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구리코는 그 때의 외로움이 트라우마가 되어 마음의 병을 얻어요. 언니는 정말 데리러 왔고 지금은 함께 잘 지내고 있지만 구리코는 가끔 마음 깊은 곳으로 침잠할 때가 있습니다. 이모집을 나와서 같이 살게 된 할아버지. 무뚝뚝했지만 그들이 같이 살기 전부터 이미 유산을 돈코와 구리코 앞으로 정해놓을 정도로 마음 따뜻한 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 그녀들은 ‘좋은 일을 하자!’며 ‘도토리 자매’라는 이름으로 메일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냥 가볍게, 메일을 받고 일상 얘기를 하듯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죠. 그리고 어렸을 적 첫사랑이었던 무기의 꿈을 꾸기 시작하는 구리코.
맞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마음 안의 것을 깎아 내다 보면 사람은 병이 드는 거로구나. 그렇게 깨닫고 나서는 인간의 강함과 약함에 놀랐다. -p33
이 작품의 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작품입니다!!-을 떠올렸어요. 그 책에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돼’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한 문장이 제 마음 깊은 곳에 박혀서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 문장이 그 작품의 감동을 배로 느끼게 해주었다고 할까요. [도토리 자매]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는 달리 타인보다는 내면의 자신을 향해 보내는 편지 같은 느낌이에요. 깊은 물속에 있는 것처럼 정적이고 일견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지만 분명 흘러가고 있다는 기분. 돈코와 구리코의 성장소설이면서, 여전히 ‘아, 조금은 어깨 힘을 빼고 살아가도 되는 거구나, 세상에는 분명 즐겁고 좋은 일이 있는 거구나’를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이번 작품의 해석 중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고 할까요. 원서를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그것’과 같이 앞의 말을 가리키는 지시어가 많이 쓰였는데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는 부분도 있어서 확실히 의미가 와닿지 않는 경우도 있었어요. 어쩐지 이 작품은 원서로 읽는 것이 더 맛이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지금까지 다소 충격을 받은 경험은 있지만, 내 영혼의 심지는 짓눌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고방식이 조금 이상해졌다 해도, 거기에 집착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상처도 아물고 또 어디서든 행복이 쏙쏙 생겨난다. 그것은 아마도 생명력과 같은 것이리라. 그러니까, 어렸을 때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있었다고 해서 자신이 비뚤어진 것은 아니다. 가령 약간 비뚤어졌다해도, 조금씩 펴 나가면 펴질 것이다. 그러자고 교정 기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긍정적인 생각이나 트라우마 치유나 점이나 적당한 운동이나, 나중에 약간의 전환을 위해서는 필요할지 몰라도 지금은 필요없다. 무엇보다 자기 영혼의 심지를 갈고 닦으면서 따뜻하게 살며시 품어, 다시금 심지로서 지위를 되찾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p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