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가게 - 제13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53
이나영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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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울린 한 장의 그림이에요.

『시간 가게』에 실려 있지요.

 

 

"걱정 마세요. 일단 두 달 정도 저랑 공부하면 확 달라질 거예요."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윤아를 그렇게 만들어 주신다면야. 저는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엄마와 선생님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치 내가 주인의 취향대로 조립되는 DIY 가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_ 107쪽

 

처음에는 흥미로운 설정에 끌려서 집어들었어요.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십 분'을 위해 '행복한 기억'을 판다니...?

기억과 시간을 어떻게 맞바꾸며,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십 분,이라는 건 뭐지? 딱 '십 분'을 어디에 쓰려고...?

이야기 속에는 정말로 '시간 가게'가 등장해요.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시간이 부족한 분께 시간을 드립니다.

ㅡ 시간 가게

 

 

 

 

 

이런 광고지가 내 얼굴로 날아든다면, 혹할까요...? 아마도, 그렇겠죠...

주인공 윤아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인데, 윤아 역시 시간이 부족해서 이 광고지에 혹합니다.

요즘은 초등학생들이 더 바쁘다지요...?

(언젠가 "우리 어렸을 때는 오후면 티브이에서 재밌는 것도 많이 하더니 요새는 그런 것도 없는 거 같아?" 했더니

동생이 그러더라구요. "요즘 애들이 티브이 볼 시간이 어디 있겠어! 학원이다 과외다 뭐다, 애들이 더 바뻐...")

 

시간이 부족한 아이는, 행복한 기억 하나와 하루 한 번 '십 분'의 시간을 맞바꿔요.

아이가 시간과 바꾸기 위해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모습에서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습니다.

정말이지,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었어요.

윤아야, 안 돼! 행복한 기억을 그렇게 버리면 안 돼...

'베프'와의 즐거웠던 시간, 가족들과 함께한 행복한 여행의 추억, 내 엉덩이를 토닥여주던 외할머니의 다정한 손길...

사라져가는 윤아의 행복한 기억이, 내 것인 마냥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윤아는 윤아 나름대로, 행복한 기억을 내어주는 대가로 얻은 '십 분'으로 또 다른 '행복(?)'을 만듭니다.

 

윤아는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예요. 하지만, 더 큰 '행복'을 위해, 반드시 1등을 해야만 해요.

내가 주인의 취향대로 조립되는 DIY 가구 같았다,는 윤아의 속마음을 읽으며 정말 울컥했습니다.

이 책의 띠지에는 이런 문구가 있어요.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삶을 유예시킨 아이들의 이야기"

'지금의 삶을 유예' 당한 윤아는, 시간만 사면 행복할 줄 알았어요.

 

시간만 사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내 과거도 현재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엄마 말처럼 미래에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만약에 그렇다 해도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_ 150쪽

 

얼마 전 마스다 미리 만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에서 본 문장도 떠오르네요.

 

노후가, 멀리있는 미래가, 현재 여기있는 나를 구차하게 만들고 있다.

 

띠지의 문구가 더욱 강렬하게 와 닿아요.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삶은 유예시켜도 될까요...?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책을 읽으며, 이 땅의 아이들이 가여워서, 그 힘듦이 느껴져서, 참 아팠습니다. 미안하기도 했고요.

 

두껍아 두껍아, 행복한 기억 줄게, 십 분 다오...

 

아이들이, 마음 편히 뛰어놀 수 있는, '십 분'... 주면 안 될까요...?

그 '십 분'이 아이들에게 행복한 기억이 되도록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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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사라지지 마 - 노모, 그 2년의 기록
한설희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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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얼굴이 달걀형이기보다는 네모난 편이고, 두 눈은 쌍꺼풀이 짙고 입술이 도톰합니다. 눈썹은 숱이 아주 적어서 '문신'으로 지워지지 않는 눈썹을 얻었지요. 콧마루는 꽤 낮은편이에요. 그리고 얼굴에는 점이, 있던가요 없던가요… 콧잔등 근처였나 입언저리였나, 어딘가에 작은 점 하나가 언뜻 떠오를 듯하다가 맙니다. 아니, 점은 제 왼쪽 뺨에나 있을 뿐 엄마의 얼굴에는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엄마 얼굴을,

    오래 들여다 본 적이 없습니다.

 

쑥스럽기도 하고, 늘 내 곁에, 거기에 그렇게 있는 얼굴이니까요. 한 소설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오릅니다. "곧 익숙해질 거야. 나중엔 눈에 보이지도 않을걸." "어떻게? 항상 거기 있을 텐데. 내 눈에 보이는 곳에."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오히려 안 보이게 될 거야."(『소수의 고독』) 이 소설 속 대화는 배에 새겨진 문신을 가리키지만, 항상 거기,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서 오히려 보이지 않게 되는 존재, 어쩌면 엄마도 그런 존재인지도요. 그래서 저는 엄마를 생각하다가 이 문장을 떠올렸습니다. 늘 그 자리를 지켜주기에, 잊고 살았는지도 모르겠어요. 애써 그 존재 떠올려보지도 않고, 물끄러미 들여다 본 적도 없고,

    그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닫습니다. 나는 엄마를, 잘 모른다고. 엄마의 머릿속, 엄마의 마음속은커녕 엄마의 얼굴에 점이 있던지 없던지조차 나는 잘 모른다고. 엄마는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 늘 내 곁에 있지만, 그래서 더욱 나는 엄마를,

    들여다보려 한 적 없습니다.

 

한 엄마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나의 엄마는 아니지만, 다시 몇십 년의 시간이 지난다면 나의 엄마의 얼굴이 될 것도 같은 한 엄마의 얼굴을. 예순아홉의 딸이 찍은 아흔셋 엄마의 얼굴입니다. 엄마는 오래된 이부가지 위에 앉거나 누워 있고, 아름다운 은발을 풀었거나 빗어 넘겼고, 지팡이를 짚었거나 휠체어에 앉았고, 등에는 뼈의 산맥이 두드러지고 손등에는 핏줄이 굵게 불거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실은, 사진집을 넘겨보기도 전에 저는 울기부터 했습니다. 이 세상에 '엄마'만큼 수분이 많은 단어가 또 있을까요. 괜히 자꾸만 눈물이 나와, 며칠을 미뤄두었다가 드디어 펼친 이 사진집은, 하지만 눈물보다 귀한 목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지금 바로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라고, 늦어버리기 전에 지금 바로, 엄마를 기억하라고. 간절한 바람을 담아 제목처럼 말해보고 싶지만, "늦든 빠르든 우리는 언젠가 고아가" 될테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최선을 다해 서로를 들여다보고 서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요.

 

참 고맙습니다. 늘 곁에 있으면서도 잊고 살았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한 존재를 제 가슴에 가득 불러내어 주었습니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덕분에, 엄마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습니다. 아직은 쑥쓰러워 여행, 그리고 사진을 핑계 삼아,

    엄마 얼굴을 많이 들여다봐야겠습니다.

 

 

 

 

뷰파인더 속에 담긴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엄마가 예쁘다고 느낀다.

아름다움이 어떻게 젊음의 전유물이겠는가.

늙은 엄마도, 그 엄마의 낡은 물건들도 이토록 빛이 날 수 있는데.

나이 든 이의 쇠락해가는 육신.

그 안에 층층이 쌓인 인고의 세월이 늙음을 더 빛나게 한다.

나는 엄마에게 들릴 듯 말 듯 말한다.

엄마, 엄마는 아직 고와. _ p.113

 

 

사진 속 엄마는 이렇게 묻는 듯하다.

내 삶은 빛이 들지 않는 자리에 있는 것 같았지만

돌아보니 제법 찬란했다고.

언젠가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나도 내 엄마로 살고 싶다고.

네 사진 속 어딘가에서 환하게 자리하고 싶다고,

그러니 나의 늙음을 더는 딱한 눈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_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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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의 밤 十一月夜

 

김청한당

 

 

겨울밤 둥근 달이

눈부시게 앞 숲을 비추네.

등불 아래 책을 보고 있자니

내 심사도 밤과 더불어 깊어간다.

 

一輪冬夜月 皎皎度前林

燈下看書史 心思與夜深

 

 

ㅡ 『청한당산고』

 

 

 

겨울밤 책을 읽으며 冬夜讀書

 

서영수합

 

맑고 맑은 거문고 소리 휘돌고

검푸른 칼 기운 아득한데,

한밤중 눈 속에 매화 가지 비껴 있고

달빛은 책상 위 책을 가만히 비추네.

여린 불로 느긋이 차를 끓이고

술 데우자 은근한 향 넘치네.

흐린 등불이 걸린 오래된 벽으로

반짝반짝 새벽빛이 서서히 찾아든다.

 

淸切琴聲轉 蒼茫劍氣虛

梅橫三夜雪 月照一牀書

細火烹茶緩 微香煖酒餘

疎燈掛古壁 耿耿曉光徐

 

 

ㅡ 『영수합고』

 

 

 

『여성 한시 시집』의 5부는 '책 읽는 즐거움과 시 짓는 기쁨'인데,

그 중에서 이 계절에 어울리는 시 두 편을 골라봤어요~! ^^

한시라면, 김연수 작가님 산문집에서 주로 접해보고(^^;;), 한시집을 따로 본 기억은 없는데,

아... 한시를 읽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아, 물론, 한시의 번역문을 읽...습니다!)

 

1부 '그리움과 기다림의 목소리'에 실린 시들은, 아, 그 절절한 그리움에 제 애간장이 다 녹을 지경....-.-;;;

기회가 되면, 「층층으로 지은 시 層詩」를 올려보고 싶어요.

원문을 함께 올려야, 그 느낌이 더 살기 때문에... 한자를 많이 입력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

언젠가,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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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점심 먹으며 티브이를 켰다가 한 드라마를 보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한류 드라마'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줄 알고 보다가('무슨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방정맞아...?' 하는 생각을....^^;)

채널 돌리기가 귀찮아 그냥 쭈욱 봤어요.

 

 

(이미지 출처: SBS)

 

 

드라마 제목은 <드라마의 제왕>. (방금 검색할 때까지도 저는 이 드라마 제목이 '우아한 복수'인 줄 알았어요.^^;;)

 

 

극중 주인공 이고은(정려원 분) 씨가 은행에 갔다가 직업에 '드라마 작가'라고 써놓은 걸로 은행 직원에게 무안을 당하는 장면에서, 저는 집중해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어요.

"어머 드라마 작가세요? 어머어머 저 '우아한 복수' 되게 좋아해요!!!" 하고 마구 반색하던 은행 직원이, 드라마 '보조' 작가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럼 작가가 아니죠. 고치세요"라고 쌀쌀맞게 돌변해요. 그래서 주인공이 '드라마'와 '작가' 사이에 '보조'라는 단어를 삽입했지만, 은행 직원은 또 퇴짜를 놓습니다. "그것도 아니죠! 무직이죠!"라며...

무직.

왜요...? 엄연히 '드라마 (보조)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적으나마 그 일로 돈을 벌고 있는데, 왜 무직이에요...?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며,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었던 저인지라, 괜히 '빠직!!' 하며 몰입하고 말았던 거죠.^^;;)

 

 

드라마는 현재 드라마 제작의 열악한 상황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방송 당일, 방영 몇 시간을 앞두고서야 겨우 전송되어온 쪽대본, 미친듯한 스케줄로 촬영을 마치고 다시 미친듯한 스케줄로 테이프를 방송국에 넘기는 장면 등등. 드라마를 통해 보이는 모습은, 어쩌면 극히 일부겠지요. 하지만 그 일부를 통해서도, '극한의 상황'이 느껴진 것은, '고은'이라는 여주인공 이름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젊은 시나리오 작가가 있죠.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만 지병과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진 서른둘의 작가, 최고은 씨.

<드라마의 제왕> 속, '우아한 복수'의 보조 작가 이름이 '고은'이었던 것은 어쩌면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혹시나 최고은 작가를 위한 '우아한 복수'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답니다... 그녀를 대신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을 알리는 것...

 

 

 

 

 

 

그러다 그만, 울컥, 눈시울을 붉힌 장면이 있어요.

'우아한 복수' 마지막 회 방송 3시간을 앞두고, 강원도에서 마지막 장면 촬영이 끝났습니다. 그 촬영 테이프는 서울 방송국까지 전달되어야 하고요.

드라마 제작사 대표 앤서니(김명민 분)는 퀵서비스 기사에게 위험한 제안을 하나 해요.

세 시간 거리를 한 시간에 달려 테이프를 무사히 전달해주면, 천만 원을 주겠다고요. 10분 늦어지면 500만원, 또 10분 늦어지면 200만원, 그리고 더 늦으면 0원...

부인과 예쁜 딸 하나를 둔 40대 가장은, 생존률 '36.2%'의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죽음의 질주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화면 밖의 제가 예상한대로... 그 질주를 마치지 못하죠.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하고 맙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기사는, '우아한 복수' 마지막 장면이 시청률 30%를 넘으며 화려하게 막을 내리는 그 순간, 역시 삶에 마침표를 찍고 맙니다...

 

 

드라마는 계속 진행되는데, 저는 이 장면에 오랫동안 머물렀어요...

아마,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했겠죠. "아빠, 곰인형 사주세요~~" 하는 예쁜 딸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천만 원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을 거예요... 아내에게 예쁜 옷을 사줄 수도 있고, 딸에게 귀여운 인형을 사줄 수도 있고...

 

 

 

이 장면들 속에서, 저는 얼마 전에 읽은 한 권의 책을 떠올렸어요.

『현시창』.

그 책 속에서 「피자 배달원의 위험한 질주」 최아무개 씨의 사연도 만났었죠.

 

 

 

 

피자 배달원으로 일하다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최아무개 씨.

최 씨는 부모님이 걱정할까봐 배달 아르바이트라는 사실을 숨기고 매장에서 서빙을 본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해요. 위험한 일인 걸 알면서도 학비에 보태기 위해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왔고, 그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폐지됐지만, 한때 '30분 배달제'가 있었죠. 업체에서도 당당하게 '30분 안에 배달이 된다'고 광고를 했고, 고객들도 당당하게 '30분 안에 배달해 달라'고 요구했죠.

그 30분 동안, 배달원들이 얼마나 큰 위험 속에 놓이는가를 자각하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죠. (저는 그랬습니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죠... 지금은 절대로 음식 배달에 빨리 가져다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만, 저도 언젠가는 "빨리 가져다 주세요~" 하는 말, 했었을 거예요...)

 

 

 

대한민국 청춘들의 서글픈(이라는 표현으로 그 아픔을, 그 잃어버린 목숨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생존 현장이 담긴 이 책 『현시창』과, 이 책에 실렸대도 어색하지 않을 듯한 최고은 작가의 사연을 떠올리게 하는 '우아한 복수'의 보조작가 이고은.

 

이 둘 사이에서 마음이 몹시 어지럽게 오갔던 주말의 한 낮이었어요.

 

 

현시창. '현실은 시궁창'이 아니라, '현실[現實]을 직시[視]하라, 그리고 창[槍]을 들라'...

 

저자 임지선 기자의 편지 일부분을 옮기며, 많은 분들이 이 책을 만나보길 바라는 마음, 실어보냅니다...

 

 

 

비와 당신, 그리고 앞으로 만날 당신에게

 

 

 

당신을 만나러 가는 날, 비가 왔습니다. 당신이 다니던 학교에 갔지요.

등록금이 비싼 사립대를 다니다가 경제적 부담에 1년 만에 그만두고,

다시 수능을 쳐서 입학했다는 서울시립대에는 방학이라 학생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지나다녔을 캠퍼스, 수업을 들었을 강의실을 천천히 돌아보며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스물넷, 너무 젊은 나이에 죽은 당신을 말입니다.

 

 

당신은 수업만 듣고 곧바로 집에 가는 학생이었다지요.

밥은 학생식당에서 2,500원짜리만 먹었다고 과 동기들이 전했습니다.

동아리도 가입하지 않고, 모꼬지도 가지 않았다고요.

누군가 당신에게 꿈을 묻자 "엄마와 편히 사는 것"이라 했다는 당신, 삶이 외롭진 않았나요.

이마트 기계실에서 질식하는 순간에 무엇을 떠올렸나요.

 

 

(……)

 

 

섭씨 1,600도 쇳물에 빠져 죽은 당신을 만나러 간 날에도 비가 왔지요.

가을비가 어지나 차갑던지 사고 현장, 거대한 용광로 옆에 서서 몸을 떨었습니다.

그렇게 크고 뜨거운 용광로 위에서, 당신은 쇠막대기 하나를 들고 허리 높이에 허술하게 걸린

쇠사슬 안전대를 한 발 넘어 청소작업을 했다지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후끈한 열기에,

당신은 정신을 잃고 쇳물로 떨어졌습니다. 야간작업 중에 벌어진 일,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한 환경이지요. 모두가 잠을 자는 밤,

당신을 눈을 비벼가며 뜨거운 용광로 위에서 안전장비도 없이 아슬아슬하게

작업을 해야 했으니까요.

 

 

(……)

 

 

당신들을 만나면서 괴로웠습니다.

나와 같이 젊은 얼굴을 한 당신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감히 건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 노력했던 아름답고 건강했던 청춘들이

왜 살인자가 되고 산재 노동자가 되고 자살자가 됐을까요?

덮어놓고 힘내라고 말하기엔 당신의 삶이 너무나 억울하고, 이 세상은 너무 뻔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저 당신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공유하려 합니다.

제 기록이 당신의 삶에 더 가까이 가닿지 못해 안타까울 뿐입니다.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이제라도 세상이 조금씩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세상이 청춘에게 너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

 

 

2012년 가을,

임지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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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의 습관
김희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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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것들, 뜻밖의 사건들, 자만과 확신의 어긋남들, 그리고 나만은 예외일 거라는 건방짐들, ...거기에서 고통은 시작된다.(작가의 말) _ 드디어, 도서관 가름끈 도둑을 만나는구나. 오래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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