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점심 먹으며 티브이를 켰다가 한 드라마를 보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한류 드라마'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줄 알고 보다가('무슨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방정맞아...?' 하는 생각을....^^;)

채널 돌리기가 귀찮아 그냥 쭈욱 봤어요.

 

 

(이미지 출처: SBS)

 

 

드라마 제목은 <드라마의 제왕>. (방금 검색할 때까지도 저는 이 드라마 제목이 '우아한 복수'인 줄 알았어요.^^;;)

 

 

극중 주인공 이고은(정려원 분) 씨가 은행에 갔다가 직업에 '드라마 작가'라고 써놓은 걸로 은행 직원에게 무안을 당하는 장면에서, 저는 집중해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어요.

"어머 드라마 작가세요? 어머어머 저 '우아한 복수' 되게 좋아해요!!!" 하고 마구 반색하던 은행 직원이, 드라마 '보조' 작가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럼 작가가 아니죠. 고치세요"라고 쌀쌀맞게 돌변해요. 그래서 주인공이 '드라마'와 '작가' 사이에 '보조'라는 단어를 삽입했지만, 은행 직원은 또 퇴짜를 놓습니다. "그것도 아니죠! 무직이죠!"라며...

무직.

왜요...? 엄연히 '드라마 (보조)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적으나마 그 일로 돈을 벌고 있는데, 왜 무직이에요...?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며,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었던 저인지라, 괜히 '빠직!!' 하며 몰입하고 말았던 거죠.^^;;)

 

 

드라마는 현재 드라마 제작의 열악한 상황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방송 당일, 방영 몇 시간을 앞두고서야 겨우 전송되어온 쪽대본, 미친듯한 스케줄로 촬영을 마치고 다시 미친듯한 스케줄로 테이프를 방송국에 넘기는 장면 등등. 드라마를 통해 보이는 모습은, 어쩌면 극히 일부겠지요. 하지만 그 일부를 통해서도, '극한의 상황'이 느껴진 것은, '고은'이라는 여주인공 이름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젊은 시나리오 작가가 있죠.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만 지병과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진 서른둘의 작가, 최고은 씨.

<드라마의 제왕> 속, '우아한 복수'의 보조 작가 이름이 '고은'이었던 것은 어쩌면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혹시나 최고은 작가를 위한 '우아한 복수'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답니다... 그녀를 대신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을 알리는 것...

 

 

 

 

 

 

그러다 그만, 울컥, 눈시울을 붉힌 장면이 있어요.

'우아한 복수' 마지막 회 방송 3시간을 앞두고, 강원도에서 마지막 장면 촬영이 끝났습니다. 그 촬영 테이프는 서울 방송국까지 전달되어야 하고요.

드라마 제작사 대표 앤서니(김명민 분)는 퀵서비스 기사에게 위험한 제안을 하나 해요.

세 시간 거리를 한 시간에 달려 테이프를 무사히 전달해주면, 천만 원을 주겠다고요. 10분 늦어지면 500만원, 또 10분 늦어지면 200만원, 그리고 더 늦으면 0원...

부인과 예쁜 딸 하나를 둔 40대 가장은, 생존률 '36.2%'의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죽음의 질주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화면 밖의 제가 예상한대로... 그 질주를 마치지 못하죠.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하고 맙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기사는, '우아한 복수' 마지막 장면이 시청률 30%를 넘으며 화려하게 막을 내리는 그 순간, 역시 삶에 마침표를 찍고 맙니다...

 

 

드라마는 계속 진행되는데, 저는 이 장면에 오랫동안 머물렀어요...

아마,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했겠죠. "아빠, 곰인형 사주세요~~" 하는 예쁜 딸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천만 원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을 거예요... 아내에게 예쁜 옷을 사줄 수도 있고, 딸에게 귀여운 인형을 사줄 수도 있고...

 

 

 

이 장면들 속에서, 저는 얼마 전에 읽은 한 권의 책을 떠올렸어요.

『현시창』.

그 책 속에서 「피자 배달원의 위험한 질주」 최아무개 씨의 사연도 만났었죠.

 

 

 

 

피자 배달원으로 일하다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최아무개 씨.

최 씨는 부모님이 걱정할까봐 배달 아르바이트라는 사실을 숨기고 매장에서 서빙을 본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해요. 위험한 일인 걸 알면서도 학비에 보태기 위해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왔고, 그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폐지됐지만, 한때 '30분 배달제'가 있었죠. 업체에서도 당당하게 '30분 안에 배달이 된다'고 광고를 했고, 고객들도 당당하게 '30분 안에 배달해 달라'고 요구했죠.

그 30분 동안, 배달원들이 얼마나 큰 위험 속에 놓이는가를 자각하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죠. (저는 그랬습니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죠... 지금은 절대로 음식 배달에 빨리 가져다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만, 저도 언젠가는 "빨리 가져다 주세요~" 하는 말, 했었을 거예요...)

 

 

 

대한민국 청춘들의 서글픈(이라는 표현으로 그 아픔을, 그 잃어버린 목숨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생존 현장이 담긴 이 책 『현시창』과, 이 책에 실렸대도 어색하지 않을 듯한 최고은 작가의 사연을 떠올리게 하는 '우아한 복수'의 보조작가 이고은.

 

이 둘 사이에서 마음이 몹시 어지럽게 오갔던 주말의 한 낮이었어요.

 

 

현시창. '현실은 시궁창'이 아니라, '현실[現實]을 직시[視]하라, 그리고 창[槍]을 들라'...

 

저자 임지선 기자의 편지 일부분을 옮기며, 많은 분들이 이 책을 만나보길 바라는 마음, 실어보냅니다...

 

 

 

비와 당신, 그리고 앞으로 만날 당신에게

 

 

 

당신을 만나러 가는 날, 비가 왔습니다. 당신이 다니던 학교에 갔지요.

등록금이 비싼 사립대를 다니다가 경제적 부담에 1년 만에 그만두고,

다시 수능을 쳐서 입학했다는 서울시립대에는 방학이라 학생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지나다녔을 캠퍼스, 수업을 들었을 강의실을 천천히 돌아보며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스물넷, 너무 젊은 나이에 죽은 당신을 말입니다.

 

 

당신은 수업만 듣고 곧바로 집에 가는 학생이었다지요.

밥은 학생식당에서 2,500원짜리만 먹었다고 과 동기들이 전했습니다.

동아리도 가입하지 않고, 모꼬지도 가지 않았다고요.

누군가 당신에게 꿈을 묻자 "엄마와 편히 사는 것"이라 했다는 당신, 삶이 외롭진 않았나요.

이마트 기계실에서 질식하는 순간에 무엇을 떠올렸나요.

 

 

(……)

 

 

섭씨 1,600도 쇳물에 빠져 죽은 당신을 만나러 간 날에도 비가 왔지요.

가을비가 어지나 차갑던지 사고 현장, 거대한 용광로 옆에 서서 몸을 떨었습니다.

그렇게 크고 뜨거운 용광로 위에서, 당신은 쇠막대기 하나를 들고 허리 높이에 허술하게 걸린

쇠사슬 안전대를 한 발 넘어 청소작업을 했다지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후끈한 열기에,

당신은 정신을 잃고 쇳물로 떨어졌습니다. 야간작업 중에 벌어진 일,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한 환경이지요. 모두가 잠을 자는 밤,

당신을 눈을 비벼가며 뜨거운 용광로 위에서 안전장비도 없이 아슬아슬하게

작업을 해야 했으니까요.

 

 

(……)

 

 

당신들을 만나면서 괴로웠습니다.

나와 같이 젊은 얼굴을 한 당신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감히 건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 노력했던 아름답고 건강했던 청춘들이

왜 살인자가 되고 산재 노동자가 되고 자살자가 됐을까요?

덮어놓고 힘내라고 말하기엔 당신의 삶이 너무나 억울하고, 이 세상은 너무 뻔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저 당신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공유하려 합니다.

제 기록이 당신의 삶에 더 가까이 가닿지 못해 안타까울 뿐입니다.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이제라도 세상이 조금씩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세상이 청춘에게 너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

 

 

2012년 가을,

임지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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