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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주루이 지음, 하진이 옮김 / 니들북 / 2026년 1월
평점 :

✅️ 본 포스팅은 서평단 참여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새해가 되면 목표를 (감당 못할 정도로) 다양하게 설정해두면 마음이라도 안정되지만, 막상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결국 자괴감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죠. 그래서 올해는 딱 한 가지만 설정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꾸준한 글쓰기입니다.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상당해서, 요즘엔 블로그가 아닌 노트에다 글을 쓰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는대로 글을 쓰다보면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글쓰기 글쓰기 하나봅니다. 허나, 어느정도 글을 쓰다가, 글을 쓰려는 소재가 줄어들거나, 글쓰기를 위한 새로운 자극을 원할 땐, 책을 찾습니다. 다른 이가 쓴 책을 읽으면 사방이 막힌 글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래서 올해 두번째 책으로 중국의 철학자 주루이가 죽음과 삶에 대한 내용을 담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을 선택했습니다.

평소에 분석하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삶을 살다보면서 알수없는 흐름으로 흘러가거나,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겪어야 하는 일들이 있다면, 꼭 이유를 알아야 하고 의미 부여를 하고 애씁니다. 그래야만 그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억울한 마음만 생겨서 순리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심보가 작동해요. 이런 심보는 지금을 살아가는 나를 더 힘들게 합니다. 삶은 파도와도 같아서, 힘을 빼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여, 순리대로 삶을 받아들이고자 철학서를 집어듭니다. 이번 책은 <죽음>을 주제로 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철학자는 <죽음>을 명제로, 삶을 정의하는 걸 보면 사유와 생각의 차원이 남다르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직관적으로 아주 단순하게 <죽음>을 생각하며 그저 어둡고 두렵기만 합니다. 하지만,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움의 영역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을 살아가는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혜안을 제시해줍니다.
>> 철학자 주루이에 대하여

이 책의 저자는 중국의 철학자 주루이. 중국에서 학문과 연구에서 뛰어난 성과를 낸 철학자로 그를 걸출학자라고 부릅니다. 철학을 기반으로 예술학, 신경생물학, 심령철학, 신경미학, 비교철학, 고대 그리스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었던 학자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혜안을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며 연구한 지성인. 그가 해석하는 삶은 어떠한 모습일지 궁금해서, 책장을 빨리 펼쳤습니다.
>> 구성 및 내용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은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철학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시작으로, '죽어가는 것'과 '죽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좋은 마지막을 위해선 왜 고독을 배워야하는지, 몸과 대화를 나누고, 순간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더불어, 어떤 삶을 선택하는지, 그리고 죽음은 우리가 것이 아니라는, 철학자의 견해도 둘러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삶의 순환을 책 한 권에 담았습니다.
책은 청년기자가 죽음을 앞둔 철학자 주루이를 인터뷰하는 형태로 전개됩니다. 주루이는 직장암 말기 진단을 받은지 2년 뒤에, 암치료가 무의미해지면서 치료를 중단하게 됩니다. 의료진들은 그의 상태가 위태롭다고 언급했고,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는 마지막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사람들과 공유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가 숨을 거두기 딱 10일 전, 젊은 기자 제이홍을 불러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대화는 가장 좋은 작별 방식이다.(p. 17)"라는 말을 덧붙이고 말이죠.
그가 마지막까지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사람들에게 남겨주려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불필요한 두려움을 없애는데 도움을 주고 싶어서라고 말이죠.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그의 말을 보면, 가깝게는 이웃을, 멀리는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됩니다. <죽음>을 명제로 삶을 들여다보고, 삶을 살아가는 찰나의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 순간을 살아갈 때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살아갈지를 알려줍니다.
>> 감상평
국적불문하고 시대에 지성인이 존재한다는 건 너무나 희망적입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속도가 기술문명의 수준에 비례해서, 앞으로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안합니다. 하지만 지성인들은 이야기합니다. 흐름의 속도에 맞추지 말고, 잠시 멈춰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고민해보라고 합니다. 20~30대엔 가만히 멈춰있을 시간이 어딧냐며, 멈췄다간 속도에 뒤쳐지면 어쩌냐고 난리를 쳤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 속도에 맞춰서 허겁지겁 살아보니, 남들하는대로 쓸려서 흘러가보니 멈추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 판단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딘가로 순리대로 흘러가긴 해야 합니다. 흘러가기 전에 흘러가면 그만인 찰나의 순간, <지금>에 몰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철학자의 지성으로 사유한 <죽음>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보통의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겪어보지도 않은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두렵다고 느낄 수 있는걸까요? 철학자 주루이는 소크라테스를 언급하면서,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두려워하고 있다(p. 65)'고 말이죠. 이 자체가 논리적 역설이라고 합니다. 하여, 철학자는 무지를 없애주는데 목적을 둔다고 합니다. 제대로 알아야 두렵지 않다는 논리로 이어집니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면서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두려워하면 안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스스로의 손발을 묶는 것과 같다. 두려움은 삶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자 삶의 기본적인 정서이다. 저마다 다른 삶의 경험과 생활 체험은 마치 그물처럼 드려움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p. 48-49
철학자의 의도가 파악되고 나니 두려운 단어 <죽음>이 개념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가 언급한 철학적 상상을 더한 자연적 순리로 본 <죽음>은 그저 덤덤하고 당연한 이치로 보입니다. 그래서 무지에서 벗어나야 하나봅니다.
"죽음은 신비로운 경지이다." 라는 말은 철학적 상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죽음은 유기물이 무기물로 변화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무기물로 땅속에 묻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종종 하늘에 기도한다. 이는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데 항상 종교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p. 62-63
우리는 그저,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생명 체계 일부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먹이사슬 중 최고의 포식자(?)이자, 이성적 판단으로 사유할 수 있는, 다른 생명체보단 우월하지만 그래도 똑같이 생과 사를 경험합니다. 먹이사슬 중 최고의 포식자이자 이성적 판단을 한느 인간이라도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건 환상에 불과합니다. 인간도 동물과 같이 땅에 묻혀서 박테리아에 의해서 분해된다(p. 63)는 사실에 동의해야 합니다.
(주루이) 죽음은 영원한 순환과 발전이야. 이러한 신진대사를 통해 새로운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거지. 그건 마치 풀밭과 같아. 얼었던 땅이 봄이 되자 녹아 진흙이 되어 꽃을 보호하는 것처럼 말이야. p. 88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생명 체계 속에서 태어나고 죽는 순환과 발전의 순리에 따라 흘러갑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발상이 아니라, 순환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자신의 존재를 인지할 순 없습니다. 하여, <죽음>을 이해하고, 지금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스스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고, 더불어서 살아가는 즐거움과 활력을 느낄 수 있는 건, 지금 뿐이니까요. 찰나의 순간입니다. 영원히 존재감을 느끼고 살 것처럼 우리는 고심하고 고뇌하거나 때론 고통스러워합니다.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 더 잘 살고 싶은 욕구에 휩싸이면서 말이죠. 철학자 주루이는 인간의 욕심과 욕망도 놓치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행복을 누리거나 즐거움을 찾는 걸, 멀리서 찾지 않고도 가까운 뒷마당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다는 말도 잊지 않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에 두고, 누군가의 도움없이 몸을 가눌 수 없어지니 소박하고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하여, <죽음>은 삶에 끝이 있는 유한함을 알려줍니다. 삶에 끝이 있기에, 지금을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떤 방향을 설정할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찰나의 순간이니까요.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철학자 주루이는 철학적 사고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생명 체계의 일환으로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의 순리라는 것을 일러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줍니다.
>> 문장수집
p. 21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은 분명 고독도 서슴지 않으며, 더 나아가 고독을 즐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용감한 사람이 반드시 고독에 휩싸인 외로운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무릇 사람들 마음속에 누구에게나 '고독한 영웅'이 숨어 있다고 누가 그랬는가? 교활함과 비열함으로 무장한 처세술이 있어야만 사회생활을 잘하고 친구를 사귈 수 있다고 누가 그랬는가?
p. 37-38 인간의 삶은 생존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삶에 대한 갈망이 저절로 불러일으켜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죽음에 대한 순수한 두려움만 키울 수 있다. 인생에 용기와 활력을 불어 넣으려면 단순히 '사는 것'을 넘어 가치 있는 삶의 이유를 확립해야 한다. 단순히 살기 위한 삶을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내 생명의 주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
p. 50 아이들은 두려움을 출발점으로 삼아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탐구하고 인식한다. 이러한 유년기의 두려움은 긍정적이고 탐구적인 두려움이다. 아이들은 이처럼 진실하면서도 즐거운 두려움 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다.
p. 55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영혼이 신체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한층 정화되고 진리에 가까운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철학자가 지혜와 진리에 가까운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철학자가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추구하고 또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운 일인 것이다.
p. 61-62 생명은 예측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것을 찾고, 필연 속에서 우연을 찾으며,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서 미지의 것을 찾고, 불변 속에서 변화를 찾으며, 같음에서 다름을 찾는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생물학적 의미다.
p. 78 우리는 '죽어가다'와 '죽음' 즉, 영어로 'dying'과 'death'를 구분해야 한다. 죽어가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고, 죽음은 그 과정의 종결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개 죽음을 향하는 과정은 외면한 채 죽음 자체에만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 이것도 일종의 편견이다.
p. 145 사람들은 종종 "시간이 참으로 빨리 흐르구나."라고 탄식했다. 시간이 강물처럼 흐르며 사라진다는 의미다. 흐름이라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시간은 사건으로부터 독립적이며, 시간의 변화는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매 순간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재이며, 동시에 끊임없이 새롭게 대체되는 것이 현재다. 또 하나는, 시간은 거스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가 되지만, 과거는 현재가 될 수 없다. 이는 시간의 질서를 보여준다.
p. 149 우리가 생명을 대할 때는 생명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거대한 시간이 강에서 그 생명의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장수라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일도 아닐뿐더러, 젊은 세대와 자원 쟁탈전을 벌이는 느낌마저 든다.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퇴장하는 것이야 말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내가 말하는 퇴장은 자살을 선택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단지 오롯이 장수만을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또 그럴만한 가치도 없다는 뜻이다.
p. 166-167 나는 무릇 예술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진실을 추구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해왔다. 예술은 철학이나 과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도 진실 추구를 위한 예술만이 독특한 접근 방식일 것이다. 예술이 진실 추구는 경험을 토대로 한다. 적어도 그 시작점에는 예술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반면에 과학과 철학에는 개인적인 경험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예술은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인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예술가는 자기의 경험을 반드시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라 부를 수가 없다. 그저 개인의 경험일 뿐이다.
p. 182 칼 세이건은 나중에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는 그 책에서 창백한 푸른 점이야말로 우리가 걱정하고, 흐느끼고, 연연해하는 인류의 고향이며, 인류 역사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과 사람들이 이 한 점의 먼지에 담겨 있다고 말해싿. 방대한 우주는 우리에게 지구가 얼마나 작은지,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그리고 수천 년의 인류 문명은 그저 한순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p. 186 예술가든 철학자든, 과학자든 혹은 일개 개인이든, 작은 것과 큰 것 사이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진리'를 추구하는 관점을 유연하게 바꿔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공허하고 소모적이며 허황한 추구에 파묻히지 않고, 유연한 관점에서 자신과 생명, 진리 추구를 이해한다면, 그제서야 생명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p. 217-218 (주루이) 나는 사랑이란 타인을 위해 사는 거라고 생각하네. 인간의 연애 관계는 바로 배려가 바탕이며, 주체의 능동적인 퇴장이고, 또 이타적인 자기 성장이지. 독일의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랑클은 의미요법(Logotheraphy)을 창안했고, 실제 심리 치료 과정에서 내담자들에게 생명의 본질과 의미를 찾으라고 조언했네.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히 의미가 있는 일이네. 그러므로 사랑을 피하지 말고 온몸으로 껴안고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길 바라네. 그 다음에는 자네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걸세.
p. 224-225 (주루이) 인생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사회를 위해서, 그리고 취약 계층에 공헌하기 위해 사는 거라네. 하루하루를 알차고 의미 있게 보내고, 적극적으로 변화를 끌어내면서 이 세상을 한층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큰 그림이라네.
p. 235 (주루이) 부모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아이가 어른보다 더 똑똑하고 수용 능력도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이라네. 아이들이 부모의 생각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함부로 말로 상처를 줘서는 안 되네. 아이가 좌절을 겪는 일 또한 결코 나쁜 일이 아니야. 대신 아이가 신중하게 친구를 사귀고, 나쁜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도록 일깨워주면서 어른들이 잘 보호해야겠지.
p. 242-243 (주루이) 마지막으로 앞으로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대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사회 각계각층의 주요 인사로 활발하게 살아가든 아니면 평범한 소시민으로 소소하게 살아가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영향력이 크든 작든 상관없네. 혹은 붕처럼 하늘 높이 구만리까지 솟구쳐 올라 남쪽 바다를 향햐든, 힘껏 날아올라도 겨우 몇 길 올랐다가 내려앉고 쑥대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것이 고작이면서도 "저것은 어디로 가려는 건가?"라며 붕을 비웃는 참새의 풍류나 만족감에 젖어 살든 상관없지. 나는 모두가 자기만의 세상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네. 당신의 선량함, 지혜, 그리고 강인한 인내심은 그 세상을 찬란하게 빛내줄 테니가. 바로 당신 덕분에.
p. 187 방대한 풍경 속에서 평범함이야말로 궁극적인 진리이며, 개인의 생명 체험이야말로 가장 소중하다. 자기의 의식에 집중하며, 그 안에 담긴 것을 계발하여 이 세상을 순수하게 경험해야 한다. 개개인의 작고 미약함은 구차하거나 비천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처럼 작고 미약하기에 개인은 마음속의 보편적 진리를 믿으며 드넓은 우주에 필적할 만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크고 작은 것에 관한 변론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