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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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기왕성하던 20대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그런 현실을 거스를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30대에 접어들고 결혼을 하고 나니 잘 늙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했습니다. 맘에 들지 않은 주변사람들과 내가 속한 사회 혹은 세상과 적절한 타협도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했고, 타협을 위한 노력으로 자기계발서만 읽는 습관을 벗어던지고, 여러장르의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문학이 주는 의미와 즐거움도 몰랐어요. 지루한 장르이며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문학에 흥미가 없던 이유는 문학에 접근하는 방법을 너무 몰랐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연한 계기에 박진성 시인의 산문집 이후의 삶을 읽곤, 문학적 감성이 사람의 마음을 많이 위로하고 공감하며 채워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이래서 문학을 안다는 분들이 문학의 좋은 점을 늘 노래했나봅니다. 문학이 참 좋은 장르라는 걸 깨닫곤, 문학가들에게 관심을 가더라구요. 그래서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몰라서 집의 책장을 훑어 보았습니다. 책장엔 박완서 소설가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가 꽂혀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박완서 소설가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한번도 읽어보진 못했어요.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내용  


박완서 소설가의 살아온 인생에 관한 이야기, 그녀의 취향과 성향, 문학적 감성,  그녀가 읽어왔던 책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산문집입니다. 그녀의 어린시절은 일제의 영향도 받았고, 6.25전쟁도 겪었던, 격동적인 한국의 근대사를 몸소 경험해야만 했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성격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여유도 담겨 있습니다. 산문집 전반은 어떤 질서가 있거나 연관성이 있다기보단 그저 느낌가는대로 생각나는대로 적어 내려간 듯한 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 느낀점 


박완서 소설가의 산문집만 읽었는데, 글을 쓰는 사람은 다재다능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글 쓴다는 걸, 한편으론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글과 친해져야겠다고 결심했던 계기는 영한 번역의 어려움을 알고부터입니다. 내가 아는 한글의 표현엔 한계가 있다는  직시하곤 책도 읽고, 생각을 글로 표출하는데, 여전히 글쓰는 건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그런데 거기에 글쓰는 훈련은 기본이고 모든 감각을 열어서 그 느낌을 글로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상식과 세상의 흐름도 읽을 줄도 알아야 하고, 관찰력도 좋아야 하고... 정말로 많이 많이 알아야 마음에 와닿는 글을 쓸 수 있겠더라구요. 눈이 자연스럽게 굴러가고 마음을 콕콕 건드려서 위로하는 힘이 있는 글을 쓰려면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할까요? 산문집을 통해 사람 박완서를 만난 기분이 듭니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성격이며, 당신이 책과 글을 접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어떤 책이 당신의 글에 큰 영향을 주었는지,  그녀와 마주 앉아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습니다. 



■ 좋은글귀


p. 28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의 가장 처량한 나이다. 만추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예년에는 한 번 가던 추석 성묘를 올해는 두 번 다녀왔다.

p. 40 인간의 참다움, 인간만의 아름다움은 보통사람들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숨어 있는 것이지 잘난 사람들이 함부로 코에 걸고 이미지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다. 문학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건 진실인가. 말로 표현된 것의 자유와 한계, 읽히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조작한 이미지, 경박한 과장, 분식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p. 65-66 기억 중 나쁜 기억은 마땅히 썩어서 소멸돼야 하고, 차마 잊기 아까운 좋은 기억이라 해도 썩어서 꽃 같은 것으로 태어나야 하는 것을.

p. 126-127 그가 남기고 싶은 묘미명도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최후까지 걷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그의 오만이 전율스럽다. 그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운동도 누구하고 경쟁하고 적수를 의식하는 게 싫어서 혼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달리기를 좋아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경쟁자 없는 운동이 가능할까. 아마도 그의 적수는 자기 자신일 것이다. 이 세상에 나하고 맞설 적수는 나밖에 없다는 것처럼 도저한 자신감, 우월감이 또 있을까.

p. 148 제목만 보고도 처음 읽었을 때의 행복감이나 감동이 젊은 날 그랬던 것처럼 가슴을 설레게 하는 책은 못 버린다. 책으로 젊은 피를 수혈할 수도 있다고 믿는 한 나는 늙지 않을 것이다.

p. 155그 밑줄 친 문장이 당장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 나는 보통 노인과 다름없이 내 건강이나 우선적으로 챙기며, 내 속으로 낳은 자식들과 그들이 짝을 만나 새롭게 만든 가족들의 기쁜 일을 반기고 어려움을 나누며 정상적으로 평범하게 살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소리 없이 나를 스쳐 근 건 시간이었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줬다. 그렇다면 시간이야말로 신이 아니었을까.

p. 179 이 지그상에서 나에게 허락된 시간도 이제 골인 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비슷한 기억을 되풀이하며 어디로 가고 있을 뿐 처음은 없다는 사실 정도이다. 

p. 215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한마디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 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 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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