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폭에 꿈을 그린 신사임당 창비아동문고 211
김별아 지음, 송진희 그림 / 창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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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 이사온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딸을 아들잡이로 여겨 살았었다.

이사온은 딸이 사위인 신명화와 결혼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때문에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10년)에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자라게 되었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은 예술과 학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신사임당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신사임당의 어머니가 무남독녀였다는 사실은 신사임당의 어머니 자신이 성별과 상관없이 인간 그자체로서 존중을 받았고 사랑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또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던 외가의 분위기는 신사임당 어머니 자신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젖어 살았음을 의미하고

신사임당의 어머니가 아들잡이로 신명화씨와 혼인 후에도 친정에 계속 머물고 신사임당이 거기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다면 신사임당의 자질은 외가의 가풍이 그대로 답습이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신사임당 또한 무남독녀로 남편 이원수와 혼인을 하게 되었지만 많은 시간을 친정에 머물며 아이들을 낳고 양육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신사임당의 양육방법 또한 신사임당의 어머니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임당을 우리는 현모양처(賢母良妻)라고 흔히 이야기를 한다. 인간으로 존중을 받고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면 바른 가치관의 인간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에 비교적 양질의 교육까지 받았다면 현모양처(賢母良妻)라는 이름은 사족에 불과하다.


사임당은 현모양처(賢母良妻)일뿐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로서도 인정을 받는다.

사임당 이전에는 재능이 있는 여성이 없는가? 사임당 이후 조선에는 정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없었는지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사임당 이전에도 재능이 있는 사람은 있었을 것이다. 사임당 이전에도 사임당을 능가하는 재능이 있었던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왜 사임당은 오늘날 한사람의 예술가로 자리를 잡을까? 생각 해 볼 문제다.

나는 사임당의 예술 세계에 대하여는 잘 모르겠다. 다만 사임당이 예술가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외적인 요인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 보았다.

우선,

사임당은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고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셋째 친정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을 해 준 시어머니의 배려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환경적 요인이 신사임당이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적 요인이라면 신사임당이 오늘날 예술가로서의 평가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신사임당이 위대한 학자를 길러 낸 어머니라는 사회적 위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 한권으로 그 사람을 얼마나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기는 하지만 <치마폭에 꿈을 그린 신사임당>이란 책은 읽히는 것은 쉬운데 신사임당에 대한 전체적인 틀을 잡는 데는 많이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치마폭에 포도를 그린 신사임당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책 이름으로 인하여 이 작품이 예술가 신사임당을 보다 비중 있게 다룰 줄 알았다. 신사임당이 현모양처라는 부분만 크게 다루고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은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그럴 바에는 초점이나 분명하게 현모양처의 표본 신사임당이란 타이틀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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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족의 숲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16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비룡소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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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족의 숲>은 이사벨 아옌데가 자신의 손자들을 위하여 쓴 이야기기의 3부작 중 맨 나중의 작품이다.

1편 <야수의 도시>는 아마존 밀림을 배경으로 한 안개족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이 부리는 욕심과 환경, 자연보호는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2편 <황금용 왕국>은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한 황금용 왕국은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를 더 존중하며 각별히 자연을 보호하기 때문에 천혜의 자연의 보고로 평가 받는 나라며 가급적 외지인들의 방문을 여간해서는 허락하지 않기에 '금지 된 왕국'으로 불리는 나라다.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황금용 왕국의 국보인 황금용 상을 둘러싼 사건을 중심으로 이미 많은 것을 가졌지만 더 많은 것을 갖질 못해 불행한 인간들이 벌이는 사건을 해결하면서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 준다.


황금용 왕국에서의 일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되어 갈 즈음 케이트는 인터내셔널 지오그래픽사에서 전화를 받게 된다. 아프리카 취재에 대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전화 한통으로 황금용 왕국에 있던 일행은 아프리카 케냐로 날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시장에 도착하여 시장을 둘러볼 때 시장에서 마방헤세라는 예언가를 만나게 된다.

마방헤세는 라디아와 알렉스의 운명을 보여주면서 알렉스와 라디아는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들은 마방헤세의 예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알렉스는 아프리카여행에서 야생 동물들과 아프리카의 자연스러움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케냐의 잘 다듬어진 모습과 안전과 편안함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보호구역내의 동물들의 모습에 알렉스는 실망을 한다. 케냐를 떠날 준비를 하던 알렉스 일행 앞에 나타난 선교사와 알렉스 일행은  행방불명된 동료선교사들을 찾아 소인족인 피그미 족이 사는 원시림으로 향한다. 그 숲에서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막강한 힘을 가진 반투족의 왕 코송고와  엠벰벨레 사령관, 그리고 주술사 솜베는 피그미족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살인과 약탈, 밀엽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알렉스 일행은 피그미족의 자유를 찾아준다.

작가 이사벨 아옌데는

백인들이 자기네 신앙은 '종교'라 부르고 다른 사람의 신앙은 '미신'이라고 부르며 백인들이 만든 것은 '예술'이고 다른 인종이 만든 것은 '수공예품'이라고 한다며 케이트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이는 백인 우월 중심의 문화 인식을 비판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인 편견을 이야기 한 것일 수도 있다.

언젠가 인류학을 공부한 사람에게서 "문명은 선진과 후진이 있을 수 있지만 문화는 선진과 후진이 있을 수 없다. 문화는 그 문화의 주인들의 삶 그 자체로 인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아프리카의 소인족인 피그미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외지에서 들어 온 사람들로부터 문제는 생겼다. 그들의 삶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문명이 들어 왔고, 새로운 가치관을 강요했다.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가치관에 자신들의 욕심을 교묘히 포장했다. 원주민들은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었고 새로운 가치관은 자신들의 문화를 부끄럽게 여겼다. 피그미족이 누렸던 자유와 평화는 이제 없다. 자신들의 문화는 낡은 구시대의 유물이며 버려야 할 것이다. 새로운 물질문명만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증명해준다. 외지인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서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 시켜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피그미족들이 원하는 것을 처음에는 거저 주었지만 나중에는 구걸을 했고 그다음에는 사정을 했고 절대 복종을 해야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조금 얻을 수 있다고 이사벨 아옌데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알렉스가 피그미족 스스로 엠벰벨레와 맞상대를 하게 한 것은 생각 해 볼 여지가 많다.

공으로 얻은 것은 절대 자기 것이 되지 않더라는 말이 있듯 자유도 외부에서 주어졌을 때 그 자유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그 자유를 유지하기도 힘들다고 본다. 피그미족은 그간의 고통으로 자유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억압했던 자들과 맞상대를 하면서 스스로의 자유와 자존심을 되찾았다.

자유인이 된 피그미족은 깊은 숲으로 들어 가 평화롭게 살고 저 했다. 그러나 알렉스 일행은 이미맛본 문명의 세계가 피그미족에게는 달콤하지만은 않았지만 원하던 원치 않았던 생활 속으로 들어 와있는데 그것을 쳐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보았다. 들어 온 것을 내치기보다는 수용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화와 자신들의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현명하다고 보았다.

새로운 문화와 문명은 바람처럼 우리 주변에 다가 온다. 그 변화의 바람을 내 것과 얼마나 잘 조화시킬 수 있느냐가 문화 수용의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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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는 모임에서 읽기로 한 책 외에 내가 꼭 보고 싶은 목록을 만들어야 겠다. 그래야만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꼼꼼히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제목: 희망의 이유 / 제인구달 / 궁리

   사람도 자연의 일부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곧잘 잊곤한다.   사람이 곧 희망이라는 이야기를 내 안에 새겨 봐야겠다. 

 

 

 

 제목 :조화로운 삶/ 스코트 니어링, 헤렌 니어링/보리

 저 잘난 맛에 인간이 산다고 하지만 부조화는 역겨움일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자성의 질문으로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

 

 

 제목: 우리문장쓰기/이오덕/한길사

 문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특히 우리문장의 필요성을 느낀다. 철저한 자기 반성과 연습 없이는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가로세로 세계사,/이원복/ 김영사

 

 

유럽중심의 세계사에서 틀을 벗어났다고 한다.  동남아사아와 발칸반도에 관한 것, 동양의 문화에 대한 것을 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위지확인을 다시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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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6-11-23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화로운 삶을 보고 싶네요..
 

작은 녀석이 사춘기인가보다. 툴툴대고 툭툭대고 신경질을 부린다. 그럴때마다 음마! 주춤대게 된다.  큰녀석이 사춘기 일때, "엄마, 엄마가 참아. 언니가 사춘기라서 그래. 지나면 괜찮을꺼야." 운운해 사겸서 날 위로 해주던 녀석이었는데 저도 절 어쩔 수 없나보다.  그래서 녀석도 힘이든가보다. 툭 던져 놓고 '이게 안니데 싶으니까 힘이드나보다. 얼마나 기다려 주어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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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6-11-23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서 또 훌쩍 몸도 맘도 크겠지요??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 청년사 고학년 문고 5
최나미 지음, 정용연 그림 / 청년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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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엄마가 이상하다'고 했을 때 남편은  "엄마가 치매라는 말이냐"며 쓸데 없는 말 하지 말라며 일축을 한다. 아내의 말을 귀담아 듣기보다는 아내의 말을 무시하거나 적당히 응수하는 많은 이 땅의 남성들이 오버랩된다.늘 당하는 일, 적게 상처 입기 위하여 아내는 웬만한 일은 스치는 말로 간단하게 남편에게  이야기 한다. 표면상으로는 조용하다. 그러다가 정말 중요한 일이 터지면 당신은 이런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뭐했느냐고 아내에게  소리를 친다. 이야기를 했다고, 몇번이나 이야기를 했다고 말을하지만 남편은 믿지를 않는다. 가영의 아빠도 그랬다. 엄마가 이야기를 할 때는 쓸데없는 이야기를하고 있다고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엄마의 직장문제를 두고 엄마와 아빠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  아빠는 시어머니가 아픈 이 싯점에 꼭 밖의 일을 해야 하느냐는 아빠와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 더 늦으면 안 된다는 엄마의 의견대립. 아빠와 아빠는 이야기의 결말을 내지 못한채 자기 편한대로 해석하고 행동에 들어 간다. 엄마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조금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 아빠와 아빠에게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이해 시키려하는 노력없이 일을 강행하는 엄마.

엄마의 직장 생활은 가족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중 3인 가희는 엄마가 사주는 도시락 대신 학교 단체 급식을 먹는데 급식비 내는 것을 낌빡하기도 하고 가끔은 치맛단이 터진 것을 수리해 주지 못했고 속옷을 제때에 챙겨 사주지도 못했다. 보통의 며느리라면 치매인 시어머니를 돌보기 위하여 밖의 일을 접고 집으로 돌아오데 직장을 다니겠다고 선언하며 시어머니를 시누들이 낮시간 돌아가며 보살피고 남편도 틈틈히 엄마를 돌보아 줄것을 강요(?)받는다. 가족들은 새롭게 주어진 자신의 일들에 당황하고 불만이 생긴다.

왜 내 마누라는(우리 엄마는) 보통의 아내(엄마)같지 않을까? 왜 유별나게 굴까? 남편과 큰딸 가희는 자기들에게 전해지는 불편함만 생각 했지 아내이자 엄마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들어 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빠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일들 -학교 자원교사와 전시회-를 두고 가희는 엄마에게 묻는다. 아빠를 속이고 하는 일들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엄마는 속인게 아니라 말을하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을 한다. 속이는 것과 말을 하지 않은 것 의미는 어떻게 다를까?  과연 엄마는 말을 하지 않은것인가 아니면 다른 요소가 엄마에게 말을 하지 못하게 한것은 아닐까?

엄마는 왜 아빠에게 말을 하지 않았을까?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이해 시키고 동의를 구한다는 전제하에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는 아빠에게 이해를 받기를 원하지 않았거나 아빠를 납득 시킬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말을 해 보았자 이해를 얻기는 고사하고 상처를 입을 것이 너무나 뻔하기에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말을 하지 않는 방법을 취한  것이 아닐까 

가끔은 세상의 잣대는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살아간다. 내 상식으로 이해를 할 수 없으면 그것은 다 이상한것이라는게 우리 보통의 생각이다. 아빠가 그렇고 언니인 가희가 그렇다. 그들도 자기 중신으로 잣대를 들이대며 세상을 재고 있음에도 상대에게도 상대의 잣대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가영이는 외갓집에서 엄마의 어렸을때 사진들을 보면서 엄마에게도 어렸을때가 있었고 잠든체 누워있다가 엄마와 외할머니의 대화를 들을면서 엄마에게도 엄마가 바라보는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할머니의 죽음과 부모의 별거 속에서 가영이는  "엄마 아빠의 딸이기도 하지만 나 혼자 살아 가야 할 시간이 따로 있다." 고 생각을 한다. 가영이는 남자, 여자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 누구에게든 각자의 몫으로의 자기만의 시간이 있음을 알게 도니다.

뱀발) 열 한살짜리 가영이가 과연 삶의 이 깊은 의미를 알았을까? 가희와 가영이의 나이를 좀 더 높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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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0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