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을 잤다. 오늘은 남편이 동료 선생님들과 제주도 여행을 가는 날이다. 알람을 맞춰 놓았지만 둘 중 누구도 알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남편 말로는 소리를 들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꺼버린 것 같다고. 급기야 전화벨 소리조차 알람인 줄 알고 꺼버리더니 갑자기 허둥지둥. 시계를 보니 만나기로 한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얼른 세수만 해요, 세수만. 어, 난 머리 꼭 감아야 하는데. 그나마 어젯밤에 미리 짐을 싸놓은 게 다행이었다. 뭐 빠뜨린 것 없어요? 아아, 다 챙겼어요. 하지만 그가 나가고 난 후 면도기를 빠뜨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대략 난감. 새벽에 잠깐 깼을 때 시계를 보니 4시여서 아직 잘 시간이 많이 남았음을 흡족해 했는데 그냥 내리 자버린 것이 잘못이었다. 평소에 늑장 부리는 일 없이 잘 일어나는 남편을 마냥 믿은 것도 잘못이었다. 내 딴엔 아침에 누룽지라도 끓여 먹이면서 몇 가지 잔소리를 할 계획이었는데 뛰지 말고 걸어가요, 라는 말 밖에는 못했다.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 두고 보시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궤변을 듣느라고 늦게 잠자리에 든 것이 문제였다. 남편은 재미없다, 지루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보기 시작한 거 끝까지 봐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무슨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결국 들으나마나한 내용이었는데. 오랜만에 동료들과 놀러가는 아침에 지각이나 하게 만들고. 후회막급이다.

  오늘은 친정에 가서 자야겠다. 가깝게 살지만 결혼 한 후로 자고 온 적은 별로 없는데 오랜만에 예전 내방에서 자게 생겼다. 요즘 엄마가 심신이 많이 지쳐 있는 상태다. 엄마는 다른 복은 없는데 일복만 타고난 사람 같다. 장성한 자식들도 엄마 곁에만 가면 아기가 되어버리고 아빠 역시 엄마를 무슨 로봇인간 쯤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결혼한 이후로는 신기하게도 엄마한테 잘못했던 것만 새록새록 생각난다. 왜 그랬을까, 지금이라면 안 그럴 텐데. 꼭 지나봐야만 알고, 알았을 땐 늦어버리는 경우도 많은데 더 늦기 전에 정신 차려야지.

  그러면서도 내가 하는 일이란 해주시는 음식, 꼬박꼬박 받아먹는 일 뿐. 나중에는 육아까지 부탁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가장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은 엄마다보니 나 마음 편하자고 마냥 이기적으로 군다. 전에 엄마가 뿔났다, 라는 드라마에서 김혜자가 독립선언을 했을 때 그나마 대신할 사람이 있으니 저럴 수도 있는 거지, 씁쓸하게 바라본 적이 있다. 할 일을 할 만큼 하고도, 어쩌면 다른 사람 몫까지 더 하고도, 여전히 빼도 박도 못하는 삶도 있다.

  돌이켜보니 엄마 인생에 한 번도 지각이란 없었다. 나처럼 늦잠 자느라 가족들 아침을 굶겨 보내거나, 챙겨 보낼 것을 못 챙기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엄마도 잠을 자기는 자는 걸까, 싶을 정도로 바지런하셨다. 결혼을 해보니 남편 말로는 부지런하시다는 시어머니도 내가 보기에는 그런가, 하는 정도였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빈틈없이 살림 솜씨를 발휘하는 엄마와 비교하면 나는 발끝에도 못 미치는 수준. 엄마는 타고난 체력은 빈약한데 오로지 기로 움직이는 사람 같다.

  엄마와 무엇을 하면 좋을까. 남편도 놀러가서 재미있을 테니 우리도 재미있게 지내야지. 집에서 뭘 해먹으면 엄마가 또 움직이셔야 하니까 외식을 할까. 아기 가졌을 땐 사 먹는 음식 조심해야 한다고 안 된다고 하시겠지. 뭐든지 됐다고 하시는 엄마와 할 수 있는 일도 참 없다. 결혼 전에 엄마와 단 둘이 여행 가는 것도 생각만 하다하다 실천을 못한 것이 지금 와서 아쉽다.   

  평소처럼 수다 떨면서 뭘 할지, 생각해 봐야겠다. 내가 뭘 하자고 하거나, 어딜 가자고 하면 엄마가 한번이라도 그래! 하고 따라나서 보셨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나와의 1박 2일이 휴식이 필요한 엄마를 더 피곤하게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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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9-11-2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 야간자율을 하고 와보니 3개 공중파 방송국이 다 똑같은 프로그램을 내보내서 질려버렸는데, 댁에서는 끝까지 다 보셨군요.
엄마는 타고난 체력은 빈약한데 오로지 기로 움직이는 사람 같다. -> 절절하게 공감하네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기로 약해지시더라구요. 걱정을 사서 한다, 펀하게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어렵게 산다고 가끔 화도 내보지만..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깐따삐야 2009-11-30 15:44   좋아요 0 | URL
왜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ㅠ

맞아요. 이제는 엄마도 나이를 생각해! 얘기도 하는데 그 동안 살아오던 것이 있으니 안 바뀌죠. 저는 결혼하고 나서 더 짐이 된 것 같아요. 남편까지 하나 더 붙어온 셈이죠. 저 역시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레와 2009-11-3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하고 불러만 봐도 울컥해요..


깐따삐야 2009-11-30 15:45   좋아요 0 | URL
에궁~ 착하신 레와님.^^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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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서른 살과는 먼 나이 즈음 신문 지면을 꽉 채운 그녀와 그녀의 시집을 보았다. 왠지 내 나이와 맞지 않는 것 같아 새 시인이 등단했나 보군, 하고 지나쳤다가 대학생이 되고 난 후에 그 시집을 읽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일에 동요하고 아파하던 시기여서 그랬는지 책 속의 많은 시들이 마음을 끌었다. 이후에 그녀와 관련된 기사 및 평론들까지 찾아 읽게 되었는데 베스트셀러가 된 첫 시집 한권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 책에서 그때의 유감을 뒤늦게 고백하고 있다.

  당시 평론가들과 최영미 시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말이 오갔든, 나는 그녀의 시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은 독자였다. 굳이 혁명이니, 80년대니, 이데올로기니, 그런 무거운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다음과 같은 시에서 시인으로서의 날카로운 감수성을 읽었다. 우연히 동승한 타인의 차/안전벨트로 조여오는 침묵의 힘/다리를 꼰 채 유리 속에 갇힌 相思/밀고 밀리며/스스로를 묶어내는, 살떨리는 집중이여 -‘짝사랑’ 전문. 갖가지 육중한 용어를 써가며 숨은 뜻을 찾아내려는 몇몇 평론가들도 있는 듯 했지만 나는 그녀의 시를 아주 단순하게, 청춘을 보내는 고통의 연가쯤으로 읽었다.

  그 후로 그녀는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간간히 산문집도 내곤 했다. 첫 시집만큼 이렇다할만한 책이 없었던 것은 독자로서의 내 취향이 변한 탓인지, 그녀도 장정일이나 이문재처럼 처녀작이 워낙에 대단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주문했는데 오랜만에 읽는 맛이 나는 산문을 접한 기분이다. 나도 그녀처럼 오프사이드를 겨우 이해한 축구광이고, 이종욱과 고영민이 있는 두산베어스의 팬인데다, 덩치 큰 화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런 공통분모 덕도 있겠지만 재미있게 읽히는 까닭은 행간마다 묻어나는 그녀의 ‘솔직함’ 때문인 것 같다. 시인 김용택이 최영미를 가리켜 ‘응큼떨지 않는 서울내기 시인’이라고 했는데 아주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어딘가 까탈스럽기는 해도 인정이 있어서 함께 있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친해지는 사람이 있는데 최영미 시인도 그런 타입의 사람이지 싶다.

  지금은 아마 속초에 살고 있나보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속초로 옮겨가니 집도 마련하고, 차도 생기고, 악다구니 같은 서울살이도 면하고. 자족하고 있는 듯 했다. 비좁고 말도 많은 동네이다 보니 나이 먹어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담담히 읊어주고 있다. 서른아홉의 그녀는 강둑에 앉아 남은 청춘을 방생하리라 다짐하며 서른인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른은 결코 한 해가 아니다. 언제든 자기 인생을 철저하게 뒤돌아 볼 때 우리는 영원히 서른 살이고, 부러진 뼈들을 추슬러 새로 시작할 수 있으리라. 가차 없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감히 믿는다. -p.149 철저하게, 가차 없이. 오랜만에 듣는 말들이다.

  서른 살의 고통스러웠던 잔치는 마흔 살의 보다 여유로운 고백으로 나아가면서도 철저하고 가차 없는 자기성찰 만큼은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그런 점이 믿을만하다. 치열했던 서른 살, 어쩌면 아직도 서른 살 같은 그녀와 달리, 나는 고작 서른임에도 듬성듬성 느슨해지는 사고를 온 심신으로 느끼는 중이다. 타인에게 관대해졌다기보다는 무심해진 것이 맞고, 스스로에게 가차 없기는커녕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대충 눈감아버리는 일이 많아졌다. 잘난 희망이 아니라 질긴 절망을 벗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오기가 무섭고도 부럽다. 어느 시점에는 이렇듯 잘 변하지 않는 사람과 재회하는 일이 반가울 때가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강단 있고, 외로워도 구차하지 않은, 그녀의 싱글라이프가 내내 건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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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25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관심이 가는 산문집이네요.
나도 그녀를 좋아하거든요.^^

깐따삐야 2009-11-27 21:25   좋아요 0 | URL
첫 시집 이후 조금 실망하기도 했는데 이번 산문집은 잘 읽혀요.^^
 

  어제는 진천에 있는 ‘이원아트빌리지’에 다녀왔다. 건축가인 남편과 사진가인 아내가 ‘마을만들기’를 주제로 조성한 문화공간이라고. 날씨가 추워서인지 마을 안에는 주인 부부와 우리뿐인 듯했다. 아기자기한 공간을 둘러보면서 처음 이런 곳을 꿈꾸고, 설계하고, 하나씩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그림과 조형물을 배치하면서 행복해했을 부부의 모습이 그려졌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 복 받은 일이기도 하고 많은 것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작가 김홍신이 그런 말을 했다. 글쓰기는 영혼을 출렁거리게 하는 일이라고, 써놓은 글을 읽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그 갈증 때문에 계속 쓰게 된다고. 그는『인간시장』을 썼고, 국회의원을 지냈고, 이제는 환갑을 넘겼다. 그런데도 눈빛에서는 앞으로 더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반짝거렸다.

  전업주부 생활을 시작한 지 꽤 되었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게을러지는 것도 싫고, 살찌는 것도 싫고, 별로 한 일도 없이 밥은 왜 먹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얘기가 달라지려나. 하지만 출퇴근이 없는 지금, 갑작스럽게 주어진 긴 여유에 점점 멍해지는 것 같다. 쇼핑과 취미생활로 소일하며 하늘하늘한 가운을 걸친 채 아파트 광고에나 나올법한 럭셔리 주부의 생활은 내 것은 아닌 듯하다. 나는 그저 내 밥은 내가 벌어먹어야 마음이 편하고 그밖에 다른 식의 주체적인 삶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어떤 면에서는 무지몽매한 사람인 것 같다.

  유시민의 신간을 읽다보니 책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했다는 말이 눈에 띈다. 그래서인가. 결혼하고 짐을 꾸리면서 세 개의 책장을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 그것도 선별한답시고 선별을 해서 가져왔는데 다시 손이 가는 일이 드물어졌다. 과거에 두근대는 감흥을 주었던 책들이 점점 죽은 장식물이 되어가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다른 것, 새로운 것, 하면서 또 다시 책을 찾는다. 하지만 요즘은 참 잘 만났다, 싶은 책보다는 잘못 질렀구나, 싶은 책들이 더 많다. 책은 그대로인데 내 안목이 변한 것일까.

  고3 아이들 덕분에 반백수가 되어가는 남편이 끄적끄적 그림을 그렸다. 어제 미술관에 다녀오더니 필 받은 건지 미래의 우리 집이라고 그려놓았다. 나름 배산임수 지형이라고 설명하는데 내 눈엔 테니스코트만 보인다. 마치 미술치료를 하는 선생님처럼 그림 속에서 남편의 욕망을 엿본다. 한 가지 사실은, 사는 동안 우리는 참 유치해졌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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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9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0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09-11-1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요. 멋집니다..마치 이철수 판화를 연상하게 하네요.
이원아트빌리지 참 괜찮은데 찾는이가 별로 없는 듯하여 괜히 안쓰러워요.

깐따삐야 2009-11-20 09:28   좋아요 0 | URL
저렇게 혼자 붓 가지고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하더군요.^^
세실님도 가보셨군요. 규모는 크지 않지만 구조도 특이하고 관리도 잘 해놓았더라구요. 꽃피는 봄에 가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순오기 2009-11-25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산임수의 풍수에 맞춘 멋진 집인데요. 테니스장 있으면 좋지요~ ^^
작년 가을, 동서식품 문학기행에 당첨돼 정지용, 오장환문학관에 갈때
기차에서 김홍신씨가 내 짝이었어요.^^
덕분에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고 많은 이야기도 나눴는데 포스팅은 여직 못했지요.

깐따삐야 2009-11-27 21:32   좋아요 0 | URL
저는 텃밭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지용, 오장환 문학관이면 충북에 오셨었군요! 저는 가까운 데 사는데도 아직 못 가봤네요. 김홍신씨와 짝이었다니 즐거우셨겠어요. 무릎팍도사에서 보니 은근히 재밌으시던데. 순오기님 눈에 비친 그분은 어땠을까, 궁금해요.
 

  어제는 금방 비나 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는데 오늘 아침은 자욱했던 구름이 걷히고 반짝 햇볕이 난다. 라디오에서는 벌써 겨울 노래들이 흘러나온다. 몇 년 전 이맘때는 건스앤로지스의 November rain을 참 열심히 들었는데. 싱글인 친구들은 서울로 조만간 그들의 내한공연을 보러 간단다. H가 새로 산 차로 직접 운전을 하고 기타를 치는 K선배까지 동행한다고. 요즘 애들 말로 완전 대박. 부럽지만 별 수 있나. 묘사 잘하는 E에게 전해 듣는 수밖에.

  E는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단짝이었다. 미니홈피에 이상한 글을 써 놓아서 근황을 물었더니 “아 놔. 나는 왜 이렇게 애프터가 없지. 이젠 부모님까지 창피해 하신다.” 그런 말을 한다. 상대가 마음에 들던, 마음에 들지 않던, 일단 애프터는 받아야 안심이 되는 남녀생활백서에나 나올 법한 여자 심리. E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막상 누군가를 사귀기 시작해도 그다지 좋아하는 것을 못 보았다. 온몸에서 발산하는 빛으로 나 연애하고 있소, 라고 사방팔방 표내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나도 한때는 나 자신, 연애와 잘 맞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노랫말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한 사람을 마음에 두면 성실히 몰두하는 타입이었지만 그만큼 사소한 일에 쉽게 지치기도 했다. 들끓던 감정이 차가운 이기심으로 변질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나 이외에는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만남이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래 가고픈 인연일수록 더 그랬던 것 같다. 좋은 사람이라면 무턱대고 좋아하기부터 했던 과거와는 달리 좋은 사람일수록 조금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사랑을 하는 나 자신도, 사랑 자체도 믿지 못했기에 그만큼의 만남까지 망치게 될까봐 마음 단속을 철저히 했다. 그러다보니 상대의 감정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모르는 채, 내 마음 역시 확실히 드러내지 않은 채, 놓아버린 인연도 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도 잘한 것이 없다. 내 나이 서른, 여전히 젊은 나이인데 그때 좀 더 불태웠어야 했다. 그 무렵 나를 향한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등장한 사람이 남편이었다. 그가 두터운 콩깍지를 덮어쓴 채 내게 올인하지 않았다면, 둘 다 뜨뜻미지근한 감정이었다면, 만남이 인연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E는 시큰둥해할지 모르겠지만 사람 앞에 소심 가득한 것보다는 사랑 앞에 수심 가득한 편이 낫다. 이것은 결혼한 자의 호기가 아니라 이미 품절된 자의 질투 어린 조언이다. 가끔 거리를 지날 때 손을 잡지 않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는 남녀를 보곤 한다. 주변을 아우르는 아우라로 보건대 사랑할락 말락 할 즈음의 커플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 챈다.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좋았던 것 같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눈빛 한 점까지 조심스러웠지만 스멀스멀 차오르는 감정까지는 숨기지 못하던 그때. 막상 결혼을 하면 점점 능숙한 생활인으로 변모해가는 것을 피할 수 없고 그것이 꼭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을 보면 부러움만큼이나 그리움이 앞선다. 살아가는 동안 그렇듯 기억할만한 설렘은 생각만큼 흔하지 않다.

  나는 이제 모험이 두렵다 하고 남편은 모험이 귀찮다 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점점 더 그리 될 것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E의 푸념이 신선하게 들릴 정도라니 그새 확 늙어버린 느낌. 이쯤 되면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노화가 진행되는 사고가 문제다. 이것저것 가늠하느라 E가 불현듯 찾아오는 감정에 대해 저어하지 않았으면 한다. 미실은 사랑이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라 했다. 셸 실버스타인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무엇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내 안에 너무 많은 나 때문에 많이 주고 많이 빼앗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연애도 화장품 지르듯 과감하게 해보라구. 화장품 덜 써도 젊어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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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1-17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분에게 요즘 소지섭씨가 출연하는 뱅뱅 청바지 CF를 필독하시라고 전해주세요.

깐따삐야 2009-11-19 14:00   좋아요 0 | URL
소지섭 보면 눈만 더 높아집니다. 안 그래도 심각한데. ㅋㅋ

2009-11-17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9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돼지꿈』이후 다시 만나는 오정희 작가의 단편집이다. 앞선 책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여자로서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읽고 나면 언뜻 고루하거나 밋밋한 이야기 거리처럼 보이는데 그것을 빚어내는 솜씨가 역시 대작가구나 싶었다. 현실에 발 딛지 못하고 공중 부양하듯 무리한 상상력을 시도하는 젊은 작가들의 글을 대하다가 이렇듯 글쓰기의 고수와 재회하면 독자인 나마저 지상으로 안착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애호박과 소고기를 주재료로 만드는 ‘편수’라는 담백한 만두가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자극적인 맛을 최대한 배제한 깔끔한 편수와도 같다.

  작가가 그려내는 여인들의 모습을 읽다 보면 엄마가 떠오르기도 하고, 앞으로 더욱 나이 먹어갈 내 모습이 상상되기도 하고, 지나가는 여인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결혼을 하고나서야 나는 결혼과 잘 맞지 않는 인간인가보다, 생각했었다. 노력하거나 기다려 볼 틈도 없이 불편해하고 어색해했다.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주변으로 고개를 돌려보는 일이 도움이 된다.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는 삐걱대는 생활 속에서도 묵묵히 마음의 갈무리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보였다. 속속들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연과 회한 없는 이가 없는데 혼자만 너무 엄살을 부리는가 싶었다.

  허구라 해도 글 속에는 어떻게든 작가의 모습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다른 여자들처럼 아내이자 어머니, 며느리, 한편으로는 여전히 소싯적의 추억과 그리움을 곱씹는 여자이기도 한 작가의 모습이 그려졌다. 환갑의 세월을 지나오며 ‘환멸과 슬픔과 쓸쓸함 또한 우리의 생을 살게 하고 보다 높이 들어 올리는 힘이며, 인생은 바래지 않는 순정한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가 존경스럽다. 울다가 웃는 소녀를 본 듯하다. 이처럼 좋은 날과 좋지 않은 날, 그 모두를 삶이라고 긍정할 수 있다면 숨 쉬는 일이 좀 더 편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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