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대학 후배 J가 내가 사는 동네에 놀러왔었다. 영어학원에서 강사 일을 하고 있는 후배인데 혈색 좋고 토실토실한 나에 비해 40킬로그램도 채 나가지 않는 아주 왜소하고 가냘픈 사람이다. J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엄마는 그녀의 자그마한 체구에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시더니 이튿날 그녀가 돌아간 다음 난생 처음으로 나의 튼실함에 대해 안도하셨다.

J와는 어떻게 친해졌는지 뚜렷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 시절, 내가 살던 자취방 근처에서 그녀도 자취를하고 있어서 가끔 캠퍼스 주변의 놀이터에 나와 커피를 마시거나 아이스크림을 먹곤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J는 학교생활을 매우 힘들어하고 있었다. 함께 자취하는 친구와의 불화 때문에도 그러했고 교생실습 기간 중에는 담당 학급 학생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늘 우울한 얼굴을 하고 다녔다. 교생이란 타이틀이 주는 특혜가 으레 그러하듯 실습생들은 대개 New Face란 이유 하나로 아이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기 마련이어서 실습 기간 내내 다들 물 만난 물고기처럼 들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경험은 매우 생소하고도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 때 나는 그녀의 사연을 듣고 나서 그저 운이 나쁜 정도로 여기라고, 사소한 경험에 구애받지 말고 네 갈 길 계속 열심히 가라고, 방송용어 같은 식상한 충고만 해줬더랬다. 비슷한 길을 가고 있던 우리들은 대개 코앞에 닥친 시험에 반쯤 미쳐 있다시피 했고 진로에 대한 회의나 불안을 다시 끄집어낼 여유가 없었다. 나는 더욱이 물리적인 조건의 안정이 심리적인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에 의지하고 있었다. 현재의 불안과 미혹은 졸업 이후 진로가 확실히 결정되고 나면 저절로 해소되리라고. 그 시간을 지나온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긴 하다. 사는 것이 그렇게 단순명료하다면 무엇이 고민이겠는가.

어쨌든 졸업을 하고 J와 나는 서로 다른 지방에서 각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 해 봄 즈음해서 J가 먼저 연락을 취해 왔고 예전처럼 무엇인가로 아주 힘들어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각자 사회에 나온 이후 다시 만난 그녀는 학부 시절에 비해 몰라보게 여위어 있었고 나이든 사람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일견 차분해 보이지만 눈동자에는 원망과 오기 비슷한 것이 서려 있었고 학원 아이들이 지어주었다는 별명인 '살인미수'처럼 그녀의 미소는 좋아서 웃는 그런 단순한 미소가 아니었다. 냉소와 체념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미끄러져 나오는 웃음이랄까. 화창했던 봄날 오후 시내의 한 카페에서 주말의 들뜬 분위기를 한참 즐기고 있던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녀가 그렇게 웃고 우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J 주변에는 온통 그녀에게 짐을 지우는 사람, 상처를 주는 사람들로 그득한 것처럼 보였고 그녀는 힘에 부치고 고독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굵다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우는 사람이란 걸 그 때 알았다. 남자들이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고들 하는데 나란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일단 우는 사람 앞에서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속수무책이 되곤 한다. 얼른 울음을 그쳤으면 좋겠다는, 얼른 울음을 그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마구마구 드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 앞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내게 화를 내거나 대드는 아이는 무섭지 않은데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아이는 정말이지 감당이 안 된다. 그 날 오후의 느낌도 그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멀리 사는 내게 와서 눈물까지 보일까 싶어서 그 날 저녁 늦도록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버스표를 끊어서 집에 보냈더랬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이따금씩 주말이나 휴일에 만나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식사를 하기도 했다. J는 주기적으로 나를 찾았고 나를 보고 싶어 했다. 나는 그녀가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내 앞에서 자기 속내를 다 보여주고 눈물까지 보였다는 것 때문에라도 그녀와 매우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코니 팔멘의 소설, <자명한 이치>에 '플라톤적인 창녀'라는 말이 나오는데 나도 어쩌면 그런 사람일지 모른다. 일전에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아주 적확한 표현이라는 듯 공감하며 말씀하시길, 몸이 헤픈 것보다 가슴이 헤픈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하셨다. 엄마가 보기에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가리지 못하고 호기심 만땅에 마음만 너무 좋은 가슴이 헤픈 여자였다. 막말로 겁대가X 없이 마구잡이로 사람들과 친해져 버리는. 엄마, 나란 사람은 인덕이 없나봐. 네년이 사람 볼 줄을 몰라서 그렇지. 누구나 깊숙이 알고 보면 다들 착하지 않나? 시간도 많다, 깊숙이 알게. 상대는 네가 백퍼센트 에너지를 다 쓰면서 충실할 때 십퍼센트도 쓰지 않는데 그래도 좋더냐?

이번에 J를 만나서는 근처 국립공원의 사찰에 다녀왔다. 산책로를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J는 나에게 수녀나 비구니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냐고 물었다. 예전에 아주 절망적이었을 때. 저는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해요.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너희 부모님이 너무 마음 아프지 않을까? 그래도 제 삶이잖아요. 그야 그렇지. J는 사람들이 너무 현실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현실에만 너무 천착해서 산다고. 나란 사람도 시계추처럼 현실과 이상 사이를 갈팡질팡 하는 것이 말 속에서 드러난다고 했다. 어떨 때는 소녀처럼 순수했다가 어떨 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사람들은 다 그러고 살지 않니. 현실과 이상을 갈팡질팡 하면서 말야. 저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것이 싫어요. 왜 사람들은 그렇게 이기적이고 속물적인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람은 누구한테나 배울 점이 한 가지씩은 있잖아. 나는 예전에 속물적인 삶을 경멸하면서도 그와 같은 삶을 은근히 동경했었어. 속물적인 삶이야 말로 지상의 행복을 그야말로 온전히 누리는 삶이라고 생각했거든. 같이 일하던 언니가 이런 저를 보면 답답해 미치겠다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했어요. 헐,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함부로 말하냐고 물어보고 냅다 싸워보지 그랬어. 저는 싸우지 않아요. 싸워야 겹치는 부분을 찾든 절충점을 찾든 영영 안보고 지내든 결단이 나지. 저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해버려요. 기분이 좋진 않지만 싸우고 싶진 않아요. 그 언니가 저보다 나이는 많지만 정신적인 나이는 저보다 어리다고 생각해요. 사회에 나와 대학 때 보던 모습보다는 많이 성숙해졌지만 그래도 자기밖에 모르고 사람을 겉만 본다는 점에서는 역시나 어려요. 솔직히 그걸 다 말해보지 그랬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그럼 그냥 그러고 마는거야? 연애를  한 번 해보는 건 어때. 남자를 만날 기회도 없고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워요. 하지만 저는 제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성공시킬 자신이 있어요. 그런데 일단 만나보고 교제를 해봐야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알지. 별로 그런 노력은 하고 싶지 않아요. 나타날 사람이면 나타나겠지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모름지기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울해하기 위해서, 슬퍼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일부러 만나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J가 말한 것들을 나는 부메랑처럼 그녀에게 되돌려 보내주고 싶었다. 아마 내가 변한 탓도 있을 것이다. J가 불편한 것은. 그녀가 나를 계속해서 찾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현실과 이상을 갈팡질팡 하며 저 자신 하나 추스리지 못하고 사는 나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으러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오는 까닭이 뭘까. 어차피 사방으로부터 귀를 막고 살며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내치기만 하는 그녀가 나를 만나 다행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왜 그녀를 위해 시간을 내고 그녀를 계속 만나왔던 것일까. 어둡고 우울한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나면 온몸의 에너지가 몽땅 소진되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왜 번번히 약속을 잡고 만남을 이어왔던 것일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정신을 팔고 다니는 플라톤적인 창녀라서? <자명한 이치>의 마리는 남성 편력을 통해 정신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면 나는? J와 함께 했던 주말, 나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홀로 고상한 사람보다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반짝반짝 구두를 닦을 줄 아는 사람이 훨씬 더 멋있는 사람 아닐까. 나는 J가 세상을 향해 무작정 고집와 오기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그렇듯 한 가지 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닐텐데. 나는 그녀가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싸웠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고 가슴에 피를 흘리고 무릎을 꿇고 꽝꽝 가슴을 쳐 봤으면 좋겠다. 겁대가X 없이 사람들과 친해지고 그들로부터 상처 받고 그러다가 진짜로 친해지는 경험을 해 봤으면 좋겠다. 백 명 중에 딱 한 명 건지는 싸움이라고 해도 멀찌감치 서서 관조만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박진감 넘치고 다이나믹한 삶이 되지 않을까. J를 보면서 삶 앞에서 보다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내치지는 않았는지, 알려고 노력해보지도 않고 누군가를 함부로 깎아내리진 않았는지. 나는 사람들도 굴광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밝고 낙천적인 사람들 편으로 모이는 습성. 똑같이 배당받은 시간을 누군가는 즐겁게 보내고 누군가는 우울하게 보낸다.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똑같은 비판을 하고 있다면, 하나 둘 씩 내 곁을 떠나가고 있다면 그 사람들을 원망하며 우울해 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렇듯 인생의 기본기에 충실한 것이 정말로 순수한 것 아닐까. J가 귀를 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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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0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4-20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든든한 방공호도 못되면서 쉽게 틈을 내주었던 저 자신에게 책임이 큰 것 같습니다.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는 어른들의 충고가 가슴에 콕, 하니 와 박힙니다.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마음에 드는 가방을 발견한 나.

"엄마, 나 요즘 왜 이런 걸 보면 사고 싶지?"

"이제서야 정신을 차린 게지."

"이게 어떻게 정신을 차린 거야. 자꾸 돈을 쓰는 사태만 불러오는데."

"그래도 그 사태보다는 이 사태가 낫지."

그 사태(실속 없는 연애질) < 이 사태(그나마 물건은 남는 쇼핑질)

엄마의 마음에 쏘옥 드는 딸이 되고싶다.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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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4-18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실족 없는 연애질(?) 잘 합니다. ㅡㅡ;;;;

Kitty 2006-04-19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족 없는 연애질은 어떤 연애질인가요 히히

비로그인 2006-04-19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핫 그럼 저는..흐흑

Mephistopheles 2006-04-1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뒤늦게 들어와서는 제목만 보고 아롱사태를 생각했군요..
금육을 해야 겠습니다...

깐따삐야 2006-04-1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그러고보니 연애란 건 실족을 하는 일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

Kitty님, 안녕하세요. 제 서재에서는 첨 뵙는 것 같네요. 반갑습니다!

Jude님, 님의 빼어난 안목만 같으면 저희 어머니도 저런 반응을 보이시진 않을 거에요. 저 자신조차 사람이나 물건을 보는 제 안목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으니 말 다했지요. ㅜ.ㅜ

메피스토님, 금육이라니요. 그 사태나 이 사태가 아롱사태처럼 맛있기만 하다면야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ㅋㅋ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 분)

햇볕 따듯했지만 바람은 찼던 어제. 소심한 청년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그 청년을 닮아 있었다.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지만 세심했으며 등장인물은 제각기 귀엽고 매력적이었다. 크고 검은 눈동자 속에 지성과 장난기를 함께 머금은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 분)는 아름답고 싱그러웠으며, 오만한 남자의 진실, 무뚝뚝한 남자의 로망이 뭔지를 보여주겠다는 듯 영화 시작부터 엔딩까지 진지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다아시(매튜 맥파든 분)는 의젓하고도 어쩐지 귀여웠다. 미스터 다아시처럼 악의가 없는 채로 겉과 속이 영 딴판인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딘지 수줍고 귀여운 데가 있다. 멋진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영화 속 다아시의 표정과 마주친다면 쿡, 하고 웃음이 터질 것만 같다.

부유하고 명망 있는 집안으로 다섯 딸들을 시집 보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삶고 있는 수선스런 어머니와 딸을 조용하고 너그럽게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자매들과 함께 북적거리며 살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믿고 늘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낭만적이고도 총명한 아가씨다. 아무런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하고 지루한 시골 마을에 어느 날 '빙리'라는 신사와 그의 친구 '다아시'가 여름 동안 저택에 머물게 되고 댄스파티에서 마주친 빙리와 엘리자베스의 언니는 첫눈에 호감을 갖게 된다. 반면에 다아시로부터 함께 춤을 추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엘리자베스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되고 그에게 이끌리면서도 그를 멀리하려고 한다.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고 빙리와 언니를 헤어지게 만든 장본인이 다아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다아시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반감은 더욱 커지기만 한다. 두 집안의 수준 차이 때문에 결혼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고 솔직히 말하는 다아시를 엘리자베스는 오만에 찬 속물로 여기고 거부하지만, 이후 동생의 결혼을 도와주고 빙리와 언니를 다시 맺어주려고 노력하는 다아시의 모습을 보면서 엘리자베스는 스스로가 다아시에 대해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조금씩 그의 진실을 향해 마음을 연다. 이렇듯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거쳐서 결국 극성스런 어머니의 바람대로 빙리는 언니와,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와 맺어지게 된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나왔던 '마크 다아시' 또한 '다아시'였는데 그 다아시 또한 처음에는 브리짓에게 무관심했고 퉁명스러웠다. 마치 처음 보는 여자에게는 무심한 듯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진실한 남자의 징표이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그들이 지닌 태생적, 본래적 고지식함은 고귀한 것이다. 요즘 세상엔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부러 고지식한 척 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물론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그들이 그 고지식함과 무뚝뚝함 때문에 사랑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외연에 불과할 뿐, 내포는 역시 진실일테니깐. 게다가 브리짓처럼, 엘리자베스처럼, 처음에 대개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기 십상이다. 대학 새내기 시절. 나도 어떤 고지식한 예비역으로부터 빌어먹을(!) 상처를 받은 기억이 있다. 조별로 토론을 거친 다음 결과물을 제출해야 하는 수업이었는데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서로 낯설었던 조원들은 다들 본숭만숭. 결국 성질머리 급한 내가 "서로 이름부터 소개하면 좋지 않을까요?"라고 운을 띄우자 가장 연세 지긋해 뵈는 예비역 어르신이 팔짱을 풀며 하던 말, "계속 모일 것도 아닌데 꼭 이름을 알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같았으면 어이, 노땅, 너 잘났다 뿡! 해버리면 그만인데 순진무구한(?) 새내기였던 당시의 나는 약간 민망한 분위기인 건 감지했으면서도 여전히 분위기 파악 못하고 고집을 부려대며 그래도 이름을 알아야 어쩌구... 하고 앉아있고 옆에 있던 친구 내 팔뚝을 쿡 찌르며 귓속말로 "야, 저 XX 재수 없다. 고만둬." 결국 그 날의 토론은 흐지부지 그만두게 되었고 교재와 머릿속을 오가며 대충 퍼즐 맞추듯 짜집기한 내용으로 레포트를 내고 했던 것 같다. 그 때의 기억이 오롯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퉁명스런 남자의 매력까진 모르겠고 평균적인 수준보다 좀더 퉁명스런 남자가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는 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결혼을 향한 지점까지 서로 자존심 대결을 벌이며 갖가지 오해와 편견 속에서 아웅다웅 하는 양상은 19세기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어 보인다. 그렇듯 서로 다른 타인이 우연히 만나서 이리저리 부딪치고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결혼까지 하는 것을 보면 사랑의 에너지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예나 지금이나 사회 안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새삼 재확인하게 된다. 물론 현실의 삶들이 죄다 영화처럼 서로의 진실에 반해 사랑하고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앤딩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건 픽션일 뿐인데."라고 냉소하지 않고 유쾌하고도 따뜻해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걸 보면 어떤 현실을 살고 있든, 현실이 진실이든 페인트 모션이든, 역시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삶은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진실에 반하고 싶고 진실에 반해 사랑하고 싶고 손톱 끝 발톱 끝까지 그 사람 앞에서 진실하고 싶은 것. 오만과 편견의 긴장과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싶은 그런 것.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기 위해서 이만치 열렬히 싸우는 무리들은 오직 인간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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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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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씨 이 분 사랑에 대해 너무 많이 안다.

그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독자의 무릎을 치게 만드는 연애박사란 감이 오면서 과연 스스로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지 무척 궁금하다.

그의 책을 읽고나서 그에게 다가서는 여인은 등에 식은땀이 졸졸 흐르지 않을까.

내 눈빛 한 조각에서도 심리학적 의제를 발견하고 내가 말하는 모습과 내용을 바탕으로 철학사를 훑어내리며 서너번 정도 만나고 나면 언제쯤 쫑이 날 것인지도 미루어 짐작 가능할지 모르니까.

사랑의 낭만성과 합리성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남자, 이상과 현실을 총체적으로 이해한 후 바람직한 결과까지 도출할 수 있는 남자는 무진장 매력적인데다 존경스럽겠지만 그만큼 드물고도 순간, 공포스럽지 않은가.

이 책의 줄거리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만큼이나 단순하다.

엘리스란 여자가 에릭이란 남자를 만나서 연애를 하다가 헤어지고 필립이란 남자를 새로 만나서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다.

단순한 줄거리에 비해 보통씨 연애소설의 백미는 역시 연애 당사자들의 개성과 그들의 심리구조다.

몽상가인 엘리스는 사회적 의무를 함께 수행하는 동지로써의 남자(제인의 남자친구인 존), 미남인데다 능력있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에 번듯한 애인으로써의 남자(에릭)들에게서는 늘 이건 아니지 싶은 공허감을 느낀다.

엘리스의 눈에 비친 존은 성실하고 믿음직한 동지로써의 배우자이긴 해도 어딘가 로맨틱함과 섹시함이 부족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고등한 의지력에 비해 스스로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 하등한 이해력을 지닌 에릭 또한 경박하고 답답해 보였을 것이다.

내가 잘 아는 커플이 한 쌍 있는데 남자 쪽이 에릭과 다소 비슷하다.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심심해, 외로워, 우울해'란 세 마디 말을 가장 혐오하는 부류의 남자.

이렇게 시시각각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심심하고 외롭고 거기다 우울하기까지 할 틈이 어디 있냐고 버럭 호통을 치는 남자.  (ㅋㅋ~)

사회적인 관계 내에서는 똑똑하고 사람 좋다는 평을 듣지만 가까운 사람의 속내를 읽어주고 로맨틱한 무드를 잡는 데에는 영 젬병인.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남자는 엘리스같은 여자와 엮이지 않았다.

그 남자의 그녀는 어디서든 등만 대면 코를 골만큼 수더분하며 목표를 하나 정하면 치밀하게 밀고 나가는 남자에게서 한껏 존경을 느끼는 현실감 만땅인 사람이다.

엘리스는 에릭과 헤어지길 잘했고 필립과 잘 어울린다.

그녀에게는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그런 이유에서 그녀를 사랑하게 된 사람이라면, 독자 입장에서 얼마나 안심을 하며 책장을 덮을 것인지 영리한 보통씨는 이미 헤아리고 있었던 것일까.

전형적인 케릭터를 가지고 열연을 펼치는 인물들을 보면서 또 다시 무릎을 탁, 치는 유쾌하고도 만족스런 공감을 했지만 여전히 미진한 질문은 남는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도식적이란 말인가. 사랑은 공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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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애호박과 팽이버섯을 넣고 끓여주신 된장찌개와 흑미밥을 먹고 출근을 해서 아침에 묽게 탄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쉬는 시간에 흰우유 한 팩과 쵸코파이를 먹었으며 점심 급식 메뉴로는 잔새우와 신김치를 넣고 함께 끓인 국, 닭다리 튀김, 오이와 상추 무침, 깍두기가 나왔는데 어쩐지 닭다리에 붙은 살점도 너무 부실해 보이고 밥의 양도 다소 적은듯 해서 남몰래 한탄하며 식사를 마쳤다. 밥이 적더라도 더 달라는 소리는 절대 하지 말라는 엄마의 당부 때문에 섭섭하다고 호소하는 배를 움켜쥐고 짐짓 배부른 표정을 지으며 급식실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결국 퇴근을 하자마자 가자미 구이와 미역나물 등으로 밥 한 공기를 순식간에 뚝딱 해치웠다. 나는 알고 있다. 모양만 한 그릇이지 엄마가 내 밥의 양에 대해 얼마나 인색한지를. 그러면서도 늘 주장하신다. "다른 애들은 네가 하루에 먹는 거 1/3도 안 먹을거다. 무슨 처녀애가 하루 세 끼를 다 고봉밥으로 먹으려고 하냐. 너 하룻동안 먹은 걸 다 쏟아보면 세숫대야로 한 대야는 나올거다." 내가 지금 하룻동안 먹은 음식들을 헤아리며 한창 먹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지금, 바로 이 시간,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저녁에 잠시 외출한 뒤 소쿠리에 담겨 있던 쑥떡을 홀라당 잡숴치웠으며(안 그러면 내가 먹을까봐) 냉장고를 열고 아이스크림을 꺼내려는 나에게 버럭 호통을 치시며 얼른 오이 두 쪽을 내미셨다. "요거 아삭하니 맛있다. 먹어봐. 얼굴에도 붙일래?"  쳇쳇쳇! "엄마, 나 진짜 괜찮은데 한... 2% 부족하지?" "아니, 50%는 부족하지. 넌 남들보다 1세기는 뒤떨어졌어. 정신이나 몸매나." 흥흥흥! 나의 자존감을 가장 심하게 무너뜨리는 장본인은 늘 우리 엄마다. 분명 친어머니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음식 다 필요없다. 난 한식을 좋아하니까 밥과 국과 반찬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는 나라가 있다면 그 곳이 곧 나의 유토피아, 지상천국이리라.

점심식사를 하면서 윤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일과계를 맡은 후로는 얼굴이 새카맣게 반쪽이 되었다. 마주치면 내 어깨를 툭 치거나 뒤에서 허리를 확 안거나 하는 못말리는 애교쟁이인데 오늘은 그녀의 입 밖으로 '공허'니 '허무'니 하는 생뚱맞은 말들이 나왔다. 생활기록부 행동발달상황 평어식으로 말하면 매사 성실근면하며 성품 또한 명랑쾌활한 그녀인데 요즘 들어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과에 지쳐 있는 것 같았다. 본래 성취지향적인 사람이 그 날이 그 날인 일과조정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고 있으니 그럴만도 했다. 우리가 배웠던 것, 우리가 알고 있었던 지식이 아이들 앞에서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도 동감했다. 점점 비어가는 심심한 내면과 점점 시스템에 길들어가는 우둔한 몸뚱아리. 혹자는 우리에게 연애를 권해보기도 하지만 '줏대 없지 않으면서 친절하고, 중심을 지키면서 재미있고, 성공의 외적인 지표만 추구하지 않으면서 자기 일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필요함. 잘난 체하지 않으면서 지성적인 사람. 그녀가 주차할 때 아무리 헤매도 윽박지르지 않을 성인군자.(p.386 l 우리는 사랑일까ㅣ알랭 드 보통)'가 나타나더라도 결국엔 다시 스스로의 몫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책을 읽지는 않고 그 책을 읽어본 사람과 친해지는 노력부터 하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랄까. 게으른 욕심꾸러기 같으니라구. 학급 아이들에게 동사변화를 특별한 방법 없이 그냥 암기하도록 해도 괜찮겠냐고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그녀가 예뻤다. 날마다 과목별 아침자습을 따로 내어주고 지도하는 담임이라니 훌륭하오. 그러나 구닥다리식의 학습방법을 고수하고 있는 나로써는 안타깝게도 할 말이 '그 미련해 뵈는 방법 뿐이오.' 뿐이었다. 저런! 어쨌거나 매사 의욕적인 윤샘이나 50% 부족한 나나 자기계발에 대한 모색이 필요한 시점인듯 하다. 슬렁슬렁 내려왔으니 다시 힘들여 올라갈 시점.  

온라인 상의 지인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글을 읽고 문득 마음이 싸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공감, 또 공감했다. 온전한 나만의 공간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 세월이 흐를수록 그 느낌은 더해진다. 무수한 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방음이 잘 되어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만한 나만의 서재. 글 아래에 실어놓은 사진도 인상적이었다. 작지만 오래된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서재였다. 아마도 밑줄이 군데군데 쳐져 있고 포스트잇이 여기저기 붙어 있을법한 책상 위의 책들을 보며 왠지 모를 포만감을 느꼈다. 그처럼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한 켠에 놓인 넓고 튼튼한 책상 앞에 앉아  한없이 읽고 한없이 쓰고 싶다. 요즘처럼 흐리고 스산한 봄날. 기장을 섞어 지은 밥과 쑥을 넣고 끓인 향긋한 된장국으로 가볍게 아침을 먹고 온종일 서재에 박혀 있다가 허기가 느껴지면 서재를 빠져나와 속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밥과 봄나물들로 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산책을 한 바퀴 하고 돌아와 다시 서재에 파묻힐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배가 고픈 탓인가. 잘 나가다가 왠 음식 타령이란 말인가.) 내게 그런 봄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올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식욕도 성취욕도 중요하지만 역시 자유에 대한 욕망만큼 강렬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나에게.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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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6-04-0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침자습, 아침자습~~ 저희 학년도 시작했는데, 영어 단어 10개랑 수학 3문제. 수학을 풀어줄 수 없는 이 문과계 담임 때문에 애들 글씨 연습만 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깐따삐야 2006-04-0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 아이들이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소심한 담임입니다.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