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애호박과 팽이버섯을 넣고 끓여주신 된장찌개와 흑미밥을 먹고 출근을 해서 아침에 묽게 탄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쉬는 시간에 흰우유 한 팩과 쵸코파이를 먹었으며 점심 급식 메뉴로는 잔새우와 신김치를 넣고 함께 끓인 국, 닭다리 튀김, 오이와 상추 무침, 깍두기가 나왔는데 어쩐지 닭다리에 붙은 살점도 너무 부실해 보이고 밥의 양도 다소 적은듯 해서 남몰래 한탄하며 식사를 마쳤다. 밥이 적더라도 더 달라는 소리는 절대 하지 말라는 엄마의 당부 때문에 섭섭하다고 호소하는 배를 움켜쥐고 짐짓 배부른 표정을 지으며 급식실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결국 퇴근을 하자마자 가자미 구이와 미역나물 등으로 밥 한 공기를 순식간에 뚝딱 해치웠다. 나는 알고 있다. 모양만 한 그릇이지 엄마가 내 밥의 양에 대해 얼마나 인색한지를. 그러면서도 늘 주장하신다. "다른 애들은 네가 하루에 먹는 거 1/3도 안 먹을거다. 무슨 처녀애가 하루 세 끼를 다 고봉밥으로 먹으려고 하냐. 너 하룻동안 먹은 걸 다 쏟아보면 세숫대야로 한 대야는 나올거다." 내가 지금 하룻동안 먹은 음식들을 헤아리며 한창 먹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지금, 바로 이 시간,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저녁에 잠시 외출한 뒤 소쿠리에 담겨 있던 쑥떡을 홀라당 잡숴치웠으며(안 그러면 내가 먹을까봐) 냉장고를 열고 아이스크림을 꺼내려는 나에게 버럭 호통을 치시며 얼른 오이 두 쪽을 내미셨다. "요거 아삭하니 맛있다. 먹어봐. 얼굴에도 붙일래?"  쳇쳇쳇! "엄마, 나 진짜 괜찮은데 한... 2% 부족하지?" "아니, 50%는 부족하지. 넌 남들보다 1세기는 뒤떨어졌어. 정신이나 몸매나." 흥흥흥! 나의 자존감을 가장 심하게 무너뜨리는 장본인은 늘 우리 엄마다. 분명 친어머니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음식 다 필요없다. 난 한식을 좋아하니까 밥과 국과 반찬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는 나라가 있다면 그 곳이 곧 나의 유토피아, 지상천국이리라.

점심식사를 하면서 윤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일과계를 맡은 후로는 얼굴이 새카맣게 반쪽이 되었다. 마주치면 내 어깨를 툭 치거나 뒤에서 허리를 확 안거나 하는 못말리는 애교쟁이인데 오늘은 그녀의 입 밖으로 '공허'니 '허무'니 하는 생뚱맞은 말들이 나왔다. 생활기록부 행동발달상황 평어식으로 말하면 매사 성실근면하며 성품 또한 명랑쾌활한 그녀인데 요즘 들어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과에 지쳐 있는 것 같았다. 본래 성취지향적인 사람이 그 날이 그 날인 일과조정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고 있으니 그럴만도 했다. 우리가 배웠던 것, 우리가 알고 있었던 지식이 아이들 앞에서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도 동감했다. 점점 비어가는 심심한 내면과 점점 시스템에 길들어가는 우둔한 몸뚱아리. 혹자는 우리에게 연애를 권해보기도 하지만 '줏대 없지 않으면서 친절하고, 중심을 지키면서 재미있고, 성공의 외적인 지표만 추구하지 않으면서 자기 일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필요함. 잘난 체하지 않으면서 지성적인 사람. 그녀가 주차할 때 아무리 헤매도 윽박지르지 않을 성인군자.(p.386 l 우리는 사랑일까ㅣ알랭 드 보통)'가 나타나더라도 결국엔 다시 스스로의 몫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책을 읽지는 않고 그 책을 읽어본 사람과 친해지는 노력부터 하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랄까. 게으른 욕심꾸러기 같으니라구. 학급 아이들에게 동사변화를 특별한 방법 없이 그냥 암기하도록 해도 괜찮겠냐고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그녀가 예뻤다. 날마다 과목별 아침자습을 따로 내어주고 지도하는 담임이라니 훌륭하오. 그러나 구닥다리식의 학습방법을 고수하고 있는 나로써는 안타깝게도 할 말이 '그 미련해 뵈는 방법 뿐이오.' 뿐이었다. 저런! 어쨌거나 매사 의욕적인 윤샘이나 50% 부족한 나나 자기계발에 대한 모색이 필요한 시점인듯 하다. 슬렁슬렁 내려왔으니 다시 힘들여 올라갈 시점.  

온라인 상의 지인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글을 읽고 문득 마음이 싸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공감, 또 공감했다. 온전한 나만의 공간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 세월이 흐를수록 그 느낌은 더해진다. 무수한 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방음이 잘 되어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만한 나만의 서재. 글 아래에 실어놓은 사진도 인상적이었다. 작지만 오래된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서재였다. 아마도 밑줄이 군데군데 쳐져 있고 포스트잇이 여기저기 붙어 있을법한 책상 위의 책들을 보며 왠지 모를 포만감을 느꼈다. 그처럼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한 켠에 놓인 넓고 튼튼한 책상 앞에 앉아  한없이 읽고 한없이 쓰고 싶다. 요즘처럼 흐리고 스산한 봄날. 기장을 섞어 지은 밥과 쑥을 넣고 끓인 향긋한 된장국으로 가볍게 아침을 먹고 온종일 서재에 박혀 있다가 허기가 느껴지면 서재를 빠져나와 속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밥과 봄나물들로 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산책을 한 바퀴 하고 돌아와 다시 서재에 파묻힐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배가 고픈 탓인가. 잘 나가다가 왠 음식 타령이란 말인가.) 내게 그런 봄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올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식욕도 성취욕도 중요하지만 역시 자유에 대한 욕망만큼 강렬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나에게.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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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6-04-0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침자습, 아침자습~~ 저희 학년도 시작했는데, 영어 단어 10개랑 수학 3문제. 수학을 풀어줄 수 없는 이 문과계 담임 때문에 애들 글씨 연습만 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깐따삐야 2006-04-0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 아이들이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소심한 담임입니다.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