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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흑설공주 이야기 ㅣ 흑설공주 1
노경실 외 지음, 윤종태 그림 / 뜨인돌어린이 / 2006년 6월
평점 :
얼마전 어느 모임에 갔을 때였다.
이야기 도중에 어떤 남자선생님이 나에게 묻기를, "파마는 왜 하신거에요?"
퍼뜩 들었던 생각은 파마 머리가 나한테 그렇게 안 어울리나, 이제 좀 안면 트고 지내게 생겼다지만 별걸 다 묻고 그러네, 였다.
"생머리보다 관리하기 편해서 하는데요."
"요즘 대개 파마를 안하지 않나요? 생머리들 많이 하고 파마를 하더라도 길러서들 하고..."
"예... 그렇긴 하죠. 근데 저는 이 머리가 편하고 좋으네요."
"그런데 렌즈는 안하세요?"
"눈동자에 직접 닿는거라서 아플까봐 못해요."
별걸 다 묻는 남자 선생님과 대화하던 중 끼어드신 또 다른 남자 선생님 왈, "근데 웨딩촬영 하면 이쁘시겠다."
"그래요? 근데 현 상태로는 맞는 웨딩드레스가 있을라나 모르겠네요. 흐흐."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우리는 성별 구분이 없는 동료 내지 친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나는 저런 질문들 속에서 잠시 당황했다.
아마도 그 선생님들은 "살은 언제 빼실 거에요? 치마는 안 입으시나요?" 이런 질문들이 목구멍까지 치미는 것을 간신히 참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처음 보자마자 묻고 싶었던 것을 그래도 예의 상, 체면 상, 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가 많이 변했고 앞으로 더 빠른 속도로, 더 크게 변하겠지만 저런 종류의 질문들을 즐겨 받는 쪽은 여전히 여자들이다.
시각에 약한 남자의 본능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이성과 합리의 시대에 언제까지 짐승처럼 본능, 본능하면서 떼만 쓰고 있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린이를 위한 흑설공주 이야기>에는 그러한 남성 중심의 전근대적 고정관념을 뒤엎는 여섯 편의 패러디 동화들이 실려 있다.
이것이 어찌 '어린이를 위한' 것이기만 하겠는가.
남자 어린이 뿐만 아니라 남자 어른에게도 두루두루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입으로는 개성 추구를 외치고 있지만 남자들이 요기 좀 봐주었으면 하는 심사로 온갖 겉치레를 하면서 백마탄 왕자님, 외제차 모는 재벌을 기다리는 여자 어른들도 읽어보면 좋겠다.
이미 굵어지고 굳어진 머리는 바뀌지 않더라도, 외모만 중요하게 여기는 왕자에게 실망하고 유리 구두를 자기 발로 깨부수는 신데렐라나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여 항해사로 새출발을 하는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 편이 쉽다, 는 아니어도 이 편도 괜찮다, 라는 감 정도는 오지 않을까 싶다.
여섯편의 동화들이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 읽는 맛, 읽는 재미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정성껏 매만졌다 싶은 친절한 우리말로, 진정한 행복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통해서 성취해야 한다는 씩씩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텔레비전 속의 드라마는 여전히 능력 있는 남자를 가운데 두고 여자들끼리 치고박고 하는 구도를 이루지만 아마 머잖아 능력 있는 여자를 가운데 두고 남자들끼리 죽네사네 하는 화면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뭐든 바람직하진 않지만 남자들이 긴장을 탈 필요는 있지 않을까.
그 착하디 착한 콩쥐도, 신데렐라도, 인어공주도, 사또니 왕자니 다 필요없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