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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삐에로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경쾌한 문체와 길지 않은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일견 가벼운 듯 읽히지만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소설이 전하는 진지한 메시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몹시 슬프고 비극적으로 읽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강간범의 유전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하루는 아버지의 신실한 사랑과 우정과도 같은 형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결국 강간범의 DNA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심하게 증오하고 거부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속박당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루가 고스란히 강간범의 DNA를 물려받아 비슷한 길을 걸었다면, 나 자신 쾌락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결코 악이 아니다, 라고 말할만큼 철저한 악인이었다면 하루는 오히려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난 아버지를 닮아서 이런거라구. 이러한 DNA 결정론자같은 선언이란 얼마나 무모하고도 속 편한가.
인간이 그렇듯 DNA만으로 결정지워지는 존재라면, 인간성과 도덕률마저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 DNA 안에 담겨 있다면, 아마 전 지구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갈등과 전쟁, 대량학살이 끊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피는 못 속인다, 는 말은 그만큼 피에 연연하며 살고, 혈연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그것에 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하루는 자신의 DNA를 미워함으로써, 자신이 친아버지와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위험하고도 피로한 삶을 택했다.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넘어서기 위해서, 연쇄방화사건을 일으켰으며 친아버지를 찾아내어 살해하고 하루 자신도 이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어릴적부터 하루의 뇌리 속에 강간범의 자식이라는 쐐기를 박아놓은 사회의 편견 탓이 크겠지만 말이다.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멋진 화가로, 한 여자와 따듯한 사랑을 나눌 줄 아는 평범한 청년으로 살 수도 있었던 하루가 중력을 거스르려는 삐에로의 몸짓처럼, 웃고 있지만 힘에 겨운 곡예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픽션임에도 유감스럽고 안타까웠다.
하루의 말처럼 즐겁게 살면 지구의 중력 같은 건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DNA답게가 아니라,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즐거운 삶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평범한 하루가 연쇄방화범, 존속살해범이 된 것은 DNA가 아니라 DNA에 얽매였던 하루 자신과 사회의 고정관념 때문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볼 때, 그 어둡고 진중한 메시지를 되새겨볼 때, 책 겉표지에 실린 '그래, 가끔은 생의 중력을 잊고 사는 거야, 그네를 타고 하늘을 씽씽 나는 피에로처럼' 이란 글귀는 우스꽝스럽다 못해 슬프기 짝이 없다.
그네를 타고 씽씽 나는 피에로처럼 읽어야 할 소설을 그렇게 읽어내지 못한 내가 이상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