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라더니 오는 둥 마는 둥 내리는 빗속을 걸으며 친구를 만나러 갔다.
태우러 오겠다는 친구에게 걷는 게 좋다고 말했는데 이런, 중간에 우산이 고장나 버렸다.
하필 그 시점에서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고 순간적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올케언니가 쓰라고 선물한 우산인데 무늬며 색깔이 예뻐서 좋아라 했지만 한 일 년이나 썼나.
인도 한복판에서 우산을 오므렸다 폈다 하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눈길을 피해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 그 동작을 반복했다.
차츰 머리에서 식은땀이 날 무렵, 시간이 지나도 보이지 않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고 내가 건물 정문이 아니라 옆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타고난 길치이며 방향치인 나에겐 너무나도 비일비재한 일이라 서로 대수롭잖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저 쪽에서 친구의 모습이 보였고 고장난 우산을 접어든 나는 쪼루루 친구에게 달려갔다.
보자마자 나보고 얼굴이 반쪽이란다. 공부하기 힘드냐면서.
화사한 원피스와 꽃장식 샌들을 신은 친구에게선 여성미가 물씬 풍겼다.
둔탱이인 나도 필시 뭔 좋은 일이 있는 것이여, 직감했다.
해물탕을 먹고 친구가 사는 아파트로 갔다.
넓은 평수는 아닌데 혼자 살기엔 대궐 같았다.
그녀에게 생긴 좋은 일이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온 집안이 선물의 도가니탕이란 것.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야, 이거 초상화 아냐. 그 분이 직접 그린거야??
아녀, 후배가 내 사진 보고 그린 거라던데.
우아, 좋겠다... 멋지다...
뭘, 나랑 하나도 안 닮았구만.
야, 이건 사진이야, 그림이야? 연필이야, 목탄이야?? 근사하당...
뭘, 사진기가 좋은 게지.
왠 꽃다발이 세 개나 있어? 다 그 분이 준거야? 그럼 꽃병에 꽂아야지.
뭘, 꽃병 같은 게 어딨어. 지가 알아서 마르겄지.
6개월 정도 만났으면 지금이 한참 좋을 때 아냐? 부럽다...
뭘, 삼 년 넘게 만나도 그냥 그런 사람들도 많더만.
대략 위와 같은 패턴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두 사람은 다섯 살이란 터울에도 불구하고 서로 꼬박꼬박 극존칭을 쓰고 있었고, 좁혀지지 않는 거리 때문에 남자 편에서 다소 안달하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그 분을 아저씨라 부르고 그 분은 그녀를 00씨라고 부른단다.
건전무쌍하다 못해, 근래 들어 보기 드문 참으로 기묘한 커플이었다.
원래 느긋한 친구였다.
뭔가 하나 일이 생기면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안달복달하고 주변사람까지 달달 볶아대는 나에 비해, 그녀는 뭔가 중대한 일이 발생해도 잠깐 고민하는 듯 싶다가 어느 새 드르렁드르렁 코를 곯아버리는 식이었다.
배포가 크고 듬직한 그녀와 여리고 소심한 나는 그런데로 궁합이 잘 맞았다.
물론 긴 우정을 쌓아오는 동안 갈등이 없지야 않았지만 인연이 되려는 모양인지, 틀어진 다음에도 서로를 놓지 못했다.
늘 콩닥거리는 가슴을 주체 못하는 나야 크고 작은 연애비화들이 많았지만, 왠만한 남자 정도는 같잖게 여기던 그녀에게 남친이 생겼다는 건 뉴스 중의 뉴스였다.
가만 이야길 들어보니 남자 분이 다정다감하고 애교가 많은 타입인 것 같았다.
아저씨를 만나도 설레지도 않고 이런 건 사랑이 아닌 것 같다고, 그만두자는 식으로 말했더니 남자 분이 크게 웃더란다.
사랑이란 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면서 이후에 더 지극정성으로 잘해주더란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아프면 죽 사서 현관 문고리에 걸어놓고 가고 오로지 최고급 유기농 과일만을 엄선해서 대령하는.
그녀는 이게 꼬시려는 건지, 진심인지가 헷갈린다고 하는데 엄마한테 평소 들어오던 말을 전했다.
야, 우리 아빠도 처음에 엄마 만날 땐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대. 어차피 결혼해서 세월 지나면 남자는 열이면 열, 다 변한다는데 기왕 변할거면, 처음에라도 잘해주는 남자가 낫지 않을까?
그녀는 조만간 커플 동반으로 우리집에 방문하기로 했다.
우리 엄마의 객관적인 평가를 듣고 싶다고.
특출한 관심법으로 딸내미와 엮이는 남자들을 모조리 재단하고 있는 우리 엄마라면, 보나마나 그녀가 아깝다고 할 것이지만.
팔이 심하게 안으로 굽는 나도 그녀가 더더더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그래도 일생의 첫 연애인데 다정하고 배려심 있는 남자를 만나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돌아와서 엄마께 말씀드렸더니 혼자 객지에 나와 있어서 외로워서 더 흔들릴 수도 있는거다, 결정을 내리기엔 뭔가 아쉬운 게 있으니 마음이 확 동하지 않는 거라면서 역시나... 남자를 보나마나 그녀가 아깝다는 결론을 내리셨다.
바보 소리 듣는 찌질이 같은 연애만 해온 나나 연애경험이 전무후무한 그녀나 우리에게 사랑의 자발성, 연애의 자율성이란 게 과연 있기는 있는 건가 싶다.
우리는 스타일은 다르지만 둘 다 참 겁이 많은 것 같다.
항상 누군가를 만나면서도 마음 한 귀퉁이를 꼭 붙잡은 채, 전부를 내어준 적이 없는 나나 본인의 마음을 잘 몰라서 참고인들의 의견에 경청하고 있는 그녀나, 우리는 올인다운 올인을 해보지도 못하고 그냥 여차저차 하다가 타이밍 맞춰 나타나는 사람과 맺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녀는 나처럼 파견으로 대학원에 오고싶다고 했고 담임도 안식년이 필요하다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고3 담임을 맡은 그녀는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으로 체력이 바닥날 지경이란다.
교단에선 젊은 게 죄다, 너도 이제 좀 숨돌릴 때 되었어... 남겨두었던 수험자료를 모두 넘겨주기로 했고 도울 게 있으면 돕겠다고 말했다.
나는 연애하는 그녀를 부러워하며, 그녀는 공부하는 나를 부러워하며, 각자의 일상에 최선을 다하기로 부추겨준 다음 헤어졌다.
선머슴처럼 까칠하게 캠퍼스를 누비던 우리는 어느새 서로의 귓볼에서 반짝이는 귀걸이를 흘끔거리는 숙녀(?)가 되었다.
사는 데엔 나름 열심이어도 여전히 남자, 하면 해저2만리요, 연애, 하면 겁나먼왕국인 숙맥들이지만 이 모든 것이 성숙의 한 과정이라면 우리도 언젠가는 사랑과 연애에서도 건강한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완벽한 인생, 완전한 성숙이란 없겠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