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을 나서는데 그가 서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그 상황 자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비가 마구 쏟아지고 있었고,
빨간 우산을 내미는데 속으로 조금 감동했다.
그는 던킨도너츠에서 산 쵸코렛과 음료수를 주었고,
고마웠지만 바로 쳐다볼 수는 없어 눈을 피했다.

그가 내 마음에 들었다면,
나는 집에 좀더 늦게 오는 대신 어디라도 들어가 그와 이야길 나누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있기 위해서.
하지만 나는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이 우산 집에 가져가면 곤란한데, 라는 서운한 말만 남긴 채.

그는 참 좋은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대신, 너는 참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내게 넌 날 힘들게 하지만, 그래도 네가 좋다고 말한다.
너를 좋아하게 되면서 담배만 늘었어.
그 하소연을 나는 못 들은 척 했다.

항상 더 많이 사랑해 왔다고 믿었던 나는,
누군가 나를 많이 위해주고 아껴주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 바람이 하늘에 닿았는지 마치 천사라도 된냥, 내게 베풀기만 하면서도 내게서 돌려받는 것은 투정과 신경질 뿐인 남자가 등장했고,
그의 출현이 황송하면서도, 목에 걸린 가시처럼 찝찝하고 불편한 건 왜일까.

나는 메리도 아닌데 그는 내겐 특별한 뭔가가 있다고 말했고,
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열심히 살아온 것에 비해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해 땡깡만 부려대는 꼬맹이라면서,
왜 그렇게 스스로를 힘들게 하냐며 오빠처럼 굴었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나를 통찰해 준 것이 고마우면서도,
성실한 애정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나는 어째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긴 시간 곁에서 나를 보아온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엄살이 심할 뿐, 이상만 더럽게 높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가 건네는 모든 것들이
그의 마음 같아서,
받아드는 내 폼이 주춤거리고 어색하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내가 싫고,
그 모습에 서운해 할 그의 눈빛을 피하는 일도 버겁다.
네 마음이니 내 알바 아니라고 말한 적도 있지만,
그는 나란 사람이, 마구 내뱉어대는 독설 이면에 한없이 물렁한 내면을 숨긴 갑각류라는 것 마저도 아는 사람이다.
너는 곧 내게서 도망치게 될거야, 내가 얼마나 시커멓고 우울한 사람인지 안다면.
내쳐도 내쳐지지 않으니 알아서 나가 떨어지게 되리라는 주문이었지만,
저런 말에 좌절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탄력을 받아 더욱 최선을 다하는 인간도 있다는 걸,
그가 후자일 확률이 높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너는 내 스타일이 아니야.
노력해도 소용 없어.
그 말을 하다가 밀양의 한 장면이 떠올라 속으로 흠칫했다.
하지만 난 전도연이 아니고 그는 송강호도 아니니까.

내가 마음에 둔 남자는,
곧 보러오겠다는 기약 없는 연락 뿐이고
나를 마음에 둔 그 남자는,
허탕을 치더라도 근처에서 서성댄다.
그리고 나는,
늦게 결혼해야 할 것 같다는... 생뚱맞은 결론을 내린다.
수많은 인연을 거치고 또 거친 후에야 '그'를 만날 것 같은 힘겨운 느낌이 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7-07-0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가 그가 아님이 애석하고 아쉬울 뿐이군요..^^
나머지는 노코멘트..^^

깐따삐야 2007-07-10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이럴 땐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등의 말이 하나도 재수없게 들리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