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S의 어머니는 곧 재혼을 하게 되었다며 S의 앞으로의 진로 및 거처에 대해 나와 의논하기를 원했다. 통화를 하면서 그 동안 모르고 있었던 부분까지 다 알게 된 셈이었는데 별다른 생각은 나지 않고 난 줄곧 "S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란 아이같은 말만 나왔다. 다행히 재혼을 계기로 살림을 합쳐 같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사정이 더 나쁘다고 하더라도 아직 미성년인 아이에겐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어머니가 필요하고, 어머니가 없다면 어머니를 대신할 사람이라도 필요한 법이다. 일 년을 보내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아이고 나를 가장 실망시켰던 아이지만 S를 알면 알수록 저만큼 커 주는 것도 다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환경이 불우하다. 그렇다고 부모를 탓하자니 그의 어머니는 가장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혼자 억척스럽게 살아가기엔 너무 곱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걷어차이면 걷어차일수록 더 강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걷어차인 이후 그 상처를 그대로 내보이며 사는 연약한 사람도 있는 것이니까. 어쨌든 S는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졸업을 하게 되었고 가까운 상업고등학교로 원서를 낸 상태다.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되어 새 교복도 입을 것이지만 어머니와 떨어져 살면서도 꼿꼿이 자신을 추스리기엔 너무 마음이 좋고 심하게 외로움을 타는 성격이다. 나는 자기 자식을 믿지 못하는 부모들도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자식을 너무 믿는 부모들 역시 나쁘다고 생각한다. 자식에게 해줘야 될 기본적인 것들을 해주지 않으면서 "저는 제 자식을 믿으니까요."라고 말하는 것은 "저는 제 자식이 어찌 되든 상관 없습니다."와 똑같은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S의 어머니가 좀더 용기를 내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란 멀리 떨어져서 무언의 사랑과 응원을 보내는 것보다 엄마가 차려주는 따듯한 밥상 한 번을 더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이 S를 키우되 치명적인 독이 되지 않기를 마음 속 깊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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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 대문 中 - 진아와 혜미 >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과정을 유심히 봤다. 역시 추측했던 대로 김기덕 감독의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김기덕 작품의 영화는 <나쁜 남자>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전부인데 케이블 tv에서 하는 이 영화를 보고 김기덕을 떠올렸다. 김기덕 감독 작품같은데, 김기덕 감독 작품 아닐까.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혜미네 집이다. 혜미네 집은 새장여인숙이라는 여관을 운영한다. 방 하나에 아가씨를 들이고 그 아가씨가 밤에 묵어가는 손님들로부터 벌어들이는 화대가 혜미네 식구의 밥벌이가 되어 왔다. 여대생인 혜미는 이 사실을 한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녀는 새로 들어온 아가씨인 진아를 자기와는 전혀 다른 부류, 전혀 다른 계급 정도로 무시하고 진아가 있다는 이유로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오는 것을 거부한다.

진아는 금붕어와 곰인형을 좋아하고 그림에 재능도 있지만 매일 밤 자신의 몸을 내주어 돈을 번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다. 그녀에게도 꽃봉아리같은 여고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화가를 꿈꾸던 소녀 시절이 있었을 테지만 지금의 진아는 비 오는 날 우산을 내주어도 욕을 들을만큼 무시와 냉대 속에서 살고 있다.

이렇듯 다른 두 여자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영화 속에서 혜미(이혜은 분)가 늘 짧은 머리에 바지를 입고 진아(이지은 분)는 늘 긴 생머리에 치마나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서로 완벽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혜미가 혼전 순결을 이유로 남자친구와의 섹스를 끈질기게 거부해 왔다는 점에서,  진아가 밥벌이의 수단이거나 혹은 사람끼리의 외로움을 달래는 위안의 방식으로 섹스를 지속해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들의 차이점은 확연히 드러난다.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면서까지 섹스를 신성시하는 혜미와 달리 진아에게 그것은 아침에 양치질을 하는 것처럼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두 여자가 계속 갈등하다 화해의 길목에 들어서는 지점은 진아의 방을 둘러 본 후 혜미가 진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더럽고 불순한 여자라고 생각한 진아의 방은 의외로 매우 소박하고 깨끗했으며 밥을 먹으면서 우연히 찍인 혜미와의 사진 한 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늘 들고 다니던 스케치북에는 혜미네 집 식구들의 모습이 섬세하고 따듯한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이후 혜미는 진아의 뒤를 밟으며 그녀가 낮 동안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훔쳐본다. 미술학원에 다니고 북적거리는 골목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동전 노래방에 가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노점상에 놓인 머리핀을 구경하는 진아는 지극히 평범한 이십대 아가씨의 모습이다.

진아를 향해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는 혜미. 결국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性이라는 이질감은 점점 화해의 모드로 바뀌고 급기야는 진아가 아플 때 혜미가 대신 손님 방에 들면서, 혜미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편견과 두려움 속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들은 푸른 새장 속에서 웃으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영화 속에서 혜미의 아버지(장항선 분)가 혜미의 신고로 진아와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했던 말이 있다. "너만 벗고 사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다 벗고 산다."는 말. 몸을 파는 것은 죄가 되고 양심을 파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 사회를 조롱한 말은 아닐까. 진아는 착하고 동정심이 넘치고 그림을 잘 그리는 모든 점이 아름다운 여자이지만 몸을 판다는 점에서 손가락질을 받는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진아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건 그녀의 몸 뿐이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먹고 산다는 면에서 정직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엔 하루에도 몇 번 씩 거짓말을 해서 남을 속이고 다른 사람의 것을 뺏어서 부자가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것은 하나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남의 것을 교묘하게 훔쳐오는 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간혹 돈을 주고 진아와 같은 여자들을 사기도 하고 하룻밤에도 몇 번 씩 다른 여자를 상상하며 아내와 섹스를 하지만 이튿날 새하얀 비즈니스 셔츠와 고급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에겐 돌을 던지지 않고 굽실거리며 인사를 건넨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벗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으며 때론 존경까지 받는다.

창녀와 여대생, 다소 작위적이고 극단적인 구도일수도 있지만 감독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라는 선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모두 챙겨본 것은 아니었고, <나쁜 남자>를 보면서 심히 마음이 거북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만지면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이 된다는 점에서 시선의 새로움과 재능의 탁월함을 느끼게 한다. 앞으로 어떤 소재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사회 안에 격리된 미추의 룰을 깨뜨릴 것인지 기대되는 작가이며 감독이다.

아, 그리고 그가 배우를 보는 눈 또한 빼어나다고 하겠다. 순진과 퇴폐, 아름다움과 슬픔을 두루 갖춘 "순수한" 얼굴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쁜 남자>의 서원이나 <파란 대문>의 이지은이 그림같은 표정과 독특한 아우라가 있긴 하지만 대사 전달력 면에서는 다소 부족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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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12-2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봤어요. 보통 많은 여자들이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치를 떠는데, 그건 '외견상' 그렇게 보이는거죠. 흠. 볼 때 가끔 불쾌한 기분이 들때도 있지만 감독의 의도를 일부러 변형시키는건 옳지 않다고 봐요. 님 영화감상 잘 보고 가요. 정말 잘 쓰셨어요.

깐따삐야 2005-12-27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쾌한 것 뿐만 아니라 불쾌한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감독인 것 같아요. 그 불쾌함도 다만 익숙하지 않은 데서 오는 충격 같은 것일테구요. 기회 되면 이 영화 꼭 보시기 바래요. 케이블 tv에서 종종 우려먹곤 하더군요.
 

헤어짐이라는 게 그렇다. 스무살 때 보다 스물 세 살 때가 좀 덜 아프고 스물 세 살 때 보다는 스물 여섯 일 때가 훨씬 덜 아프다. 이별의 경계에 선 그 순간의 통증만큼은 과거와 비견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지속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확연하다. 어쨌든 내가 이렇게 멀쩡하다는 것이 결코 그를 덜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그와 헤어진 지 훌쩍 시간이 지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아직도 그의 안부를 물어온다는 것은 참으로 생뚱맞은 일이다.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 누군가 그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순간 난감했다. 그가 떠올라서 마음이 아팠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린 끝났어요, 라고 말을 해줘야 앞으로는 더 이상 저런 소리를 듣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누군가 사귀고 있었다는 걸 드러냈던 나 자신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내가 아플 때 헤어졌다는 사실 하나가 그를 좋지 못한 남자로, 아플 때 헤어짐을 당했다는 사실 하나가 나를 안된 여자로 만든다는 것도 그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시작이든 끝이든 연애는 당사자의 몫이다. 나는 한 때나마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 한 전력이 있었던 내 자신이 우스웠다. 주변 사람들이란 연인들을 하나의 풍경, 벽에 걸린 그림처럼 바라보고 웅성거리기 밖에 더 하겠는가. 끝났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를 궁금해하지 않고 그가 남들보다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는 나와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혼자서 그의 길을 가는 것이다. 떠난 사람도, 남은 사람도 그들만의 몫이 있다. 그들이 잠시 겹쳐 있었던 그 추억이야말로 풍경으로 남는 것이다. 풍경은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고 우리에게 답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풍경은 풍경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은가.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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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다소 호들갑스럽게 나를 반가워하던 막내 이모가 오늘 입원을 했다. 유머가 있고 낙천적인 이모는 자궁에 물혹을 키우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웃는 얼굴을 했던 것이다. 내가 스물두 살이었던 그해, 엄마가 똑같은 병명으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의사가 소독을 할 때마다 마치 상해버린 비엔나 소시지처럼 드러났던 엄마의 수술 자국은 시간이 꽤 흐른 지금에도 내 눈에 선하다. 내가 옆에 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술 후 통증 때문에 눈을 떠서 나를 보지 못했던 엄마. 수술 이후에 엄마는 눈에 띄게 늙어갔고 마흔이 넘어도 비교적 낭창낭창했던 허리 부근에 보호막처럼 살이 붙기 시작했다. 엄마 왜 이렇게 살이 쪘어, 예전엔 안그랬잖아. 이 정도 표현 밖에 못하는 무뚝뚝한 딸이지만 나라고 속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모가 아프다는 것은 엄마가 아픈 느낌이랑 많이 비슷한 것 같다. 누구든지 아픈 것은 참 안된 일이지만 큰어머니가 편찮으셨을 때와는 다가오는 느낌이 좀 다른 것 같다.

이모에게는 올해 수능을 친 채 스물도 되지 않은 딸이 하나 있고 심하게 엄마 탐을 하는 철딱서니 아들도 하나 있다. 이모가 아니면 고지서 하나 제때로 떼어 올 줄도 모르는 심약한 남편도 있고 수시로 드나들며 두 달에 한 번 꼴로 건강검진을 받는 꼬장꼬장한 시부모님도 있다. 그 뿐인가. 엄마 노릇을 대신 해줘야 하는 열 살 배기 조카와 그 조카의 아빠인 여리고 게으른 남동생도 있다. 그렇게 많은 역할들 속에서도 지친 내색 없이 항상 여유가 넘치고 씩씩하기만 했던 이모가 내일 수술을 앞두고 있다. 살고 죽는 문제를 떠나서 홀로 수술대에 오른다는 건 참으로 외롭고 두려운 일일 것이다. 항상 안타깝게 여기던 동생을 자신이 겪었던 똑같은 고통 속으로 말없이 보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을 다는 아니어도 대강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밖에 엄마로썬 상처의 세월이었던 어떤 시간이 떠올라 저렇듯 잠못 이루고 계신 건지도 모르겠다. 이럴 땐 좀더 살갑고 좀더 다정하지 못한 내가 참 아쉽다. 하루 빨리 귀여운 막내이모가 넉넉한 온몸으로 나를 열렬히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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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 방이 두 개 있다. 블로그와 서재인데 오늘 블로그 디자인을 새롭게 바꾸어 봤다. 어차피 그래도 나는 나지만. 12월 말에 2005년을 정리하는 글을 한 편 올릴 셈이다. 블로그의 향방은 그 때 가서 결정하고 싶다. 방이 두 개라는 것은 번거로울 뿐이다. 용도가 다르다면야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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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12-2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미니홈피와 저만 드나드는 창고용 홈피, 그리고 이거 이렇게 세개에요. 미니홈피는 지인들과의 소통로고, 창고용 홈피는 제 글을 모아놓는 창고, 그리고 서재는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과 소통하고 만나기 위한 장이에요. 이곳에선 원래부터 저를 알고 있던 사람은 없죠. 새로운 관계의 형성. ^^

깐따삐야 2005-12-29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니홈피나 블로그는 왠지 다용도실 같은 느낌이 있는데 서재는 그냥 서재라서 좋더라구요. 서재는 저만의 다락방인 셈이죠. 소란한 지상으로부터 조금 더 올라온. ^^

마늘빵 2005-12-2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저와 관련된 사람들로부터의 도피성 성격도 있고,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거죠 머. 자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