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란 대문 中 - 진아와 혜미 >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과정을 유심히 봤다. 역시 추측했던 대로 김기덕 감독의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김기덕 작품의 영화는 <나쁜 남자>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전부인데 케이블 tv에서 하는 이 영화를 보고 김기덕을 떠올렸다. 김기덕 감독 작품같은데, 김기덕 감독 작품 아닐까.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혜미네 집이다. 혜미네 집은 새장여인숙이라는 여관을 운영한다. 방 하나에 아가씨를 들이고 그 아가씨가 밤에 묵어가는 손님들로부터 벌어들이는 화대가 혜미네 식구의 밥벌이가 되어 왔다. 여대생인 혜미는 이 사실을 한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녀는 새로 들어온 아가씨인 진아를 자기와는 전혀 다른 부류, 전혀 다른 계급 정도로 무시하고 진아가 있다는 이유로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오는 것을 거부한다.

진아는 금붕어와 곰인형을 좋아하고 그림에 재능도 있지만 매일 밤 자신의 몸을 내주어 돈을 번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다. 그녀에게도 꽃봉아리같은 여고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화가를 꿈꾸던 소녀 시절이 있었을 테지만 지금의 진아는 비 오는 날 우산을 내주어도 욕을 들을만큼 무시와 냉대 속에서 살고 있다.

이렇듯 다른 두 여자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영화 속에서 혜미(이혜은 분)가 늘 짧은 머리에 바지를 입고 진아(이지은 분)는 늘 긴 생머리에 치마나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서로 완벽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혜미가 혼전 순결을 이유로 남자친구와의 섹스를 끈질기게 거부해 왔다는 점에서,  진아가 밥벌이의 수단이거나 혹은 사람끼리의 외로움을 달래는 위안의 방식으로 섹스를 지속해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들의 차이점은 확연히 드러난다.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면서까지 섹스를 신성시하는 혜미와 달리 진아에게 그것은 아침에 양치질을 하는 것처럼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두 여자가 계속 갈등하다 화해의 길목에 들어서는 지점은 진아의 방을 둘러 본 후 혜미가 진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더럽고 불순한 여자라고 생각한 진아의 방은 의외로 매우 소박하고 깨끗했으며 밥을 먹으면서 우연히 찍인 혜미와의 사진 한 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늘 들고 다니던 스케치북에는 혜미네 집 식구들의 모습이 섬세하고 따듯한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이후 혜미는 진아의 뒤를 밟으며 그녀가 낮 동안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훔쳐본다. 미술학원에 다니고 북적거리는 골목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동전 노래방에 가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노점상에 놓인 머리핀을 구경하는 진아는 지극히 평범한 이십대 아가씨의 모습이다.

진아를 향해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는 혜미. 결국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性이라는 이질감은 점점 화해의 모드로 바뀌고 급기야는 진아가 아플 때 혜미가 대신 손님 방에 들면서, 혜미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편견과 두려움 속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들은 푸른 새장 속에서 웃으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영화 속에서 혜미의 아버지(장항선 분)가 혜미의 신고로 진아와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했던 말이 있다. "너만 벗고 사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다 벗고 산다."는 말. 몸을 파는 것은 죄가 되고 양심을 파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 사회를 조롱한 말은 아닐까. 진아는 착하고 동정심이 넘치고 그림을 잘 그리는 모든 점이 아름다운 여자이지만 몸을 판다는 점에서 손가락질을 받는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진아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건 그녀의 몸 뿐이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먹고 산다는 면에서 정직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엔 하루에도 몇 번 씩 거짓말을 해서 남을 속이고 다른 사람의 것을 뺏어서 부자가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것은 하나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남의 것을 교묘하게 훔쳐오는 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간혹 돈을 주고 진아와 같은 여자들을 사기도 하고 하룻밤에도 몇 번 씩 다른 여자를 상상하며 아내와 섹스를 하지만 이튿날 새하얀 비즈니스 셔츠와 고급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에겐 돌을 던지지 않고 굽실거리며 인사를 건넨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벗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으며 때론 존경까지 받는다.

창녀와 여대생, 다소 작위적이고 극단적인 구도일수도 있지만 감독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라는 선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모두 챙겨본 것은 아니었고, <나쁜 남자>를 보면서 심히 마음이 거북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만지면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이 된다는 점에서 시선의 새로움과 재능의 탁월함을 느끼게 한다. 앞으로 어떤 소재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사회 안에 격리된 미추의 룰을 깨뜨릴 것인지 기대되는 작가이며 감독이다.

아, 그리고 그가 배우를 보는 눈 또한 빼어나다고 하겠다. 순진과 퇴폐, 아름다움과 슬픔을 두루 갖춘 "순수한" 얼굴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쁜 남자>의 서원이나 <파란 대문>의 이지은이 그림같은 표정과 독특한 아우라가 있긴 하지만 대사 전달력 면에서는 다소 부족한 게 아닐까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5-12-2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봤어요. 보통 많은 여자들이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치를 떠는데, 그건 '외견상' 그렇게 보이는거죠. 흠. 볼 때 가끔 불쾌한 기분이 들때도 있지만 감독의 의도를 일부러 변형시키는건 옳지 않다고 봐요. 님 영화감상 잘 보고 가요. 정말 잘 쓰셨어요.

깐따삐야 2005-12-27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쾌한 것 뿐만 아니라 불쾌한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감독인 것 같아요. 그 불쾌함도 다만 익숙하지 않은 데서 오는 충격 같은 것일테구요. 기회 되면 이 영화 꼭 보시기 바래요. 케이블 tv에서 종종 우려먹곤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