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달이가 잠들면 마음대로 TV를 볼 수 없어 DMB를 애용하곤 하는데 지난 금요일 밤 어떤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신승훈이 나와 반가웠고 앗, 이은미도 보이네. 국내와 해외 각지에서 모인 도전자들은 우리 노래에 대한 관심과 열정에 비해 비교적 평범. 지루해하던 찰나 국민할매 김태원이 졸음을 확 떨궈내 주신다. 

  한때 우울증을 앓으며 힘든 시절을 보냈다는 도전자가 소위 우는 창법으로 노래를 불렀다. 자신만의 독특함이 없다는 신승훈의 지적처럼 그간 SG워너비나 씨야 등으로부터 고막이 닳도록 들어온 목소리잖아 했는데 김태원이 이런 말을 한다. 슬픈 노래를 슬프게 부르면 덜 슬프다. 슬픈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지 말고 승리와 비장함이 담긴 영화를 보고 희열의 눈물을 흘리는 습관을 갖기 바란다. 이만큼 들어도 참 쩐다고 생각했는데 우울증에 관한 개인적 소견을 밝힘으로써 제대로 쩔어 주신다. 

  "우울증은 기다림을 망각한 병입니다."  

  그는 본인도 한때 우울증을 겪었다고 고백하며 사람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평소처럼 새카만 썬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나는 도전자가 김태원의 눈빛을 분명히 읽었고 무척 감동했을 거라고 믿는다. 하나에 완전히 미치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명언은 쉽게 인용되곤 하지만 처음 그 말을 했던 사람은 그 한 줄의 정의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통과 고독의 세월을 보냈을 것인가.   

  주저없이 무릎을 꿇고 싶었는데 또 다른 명언으로 희망을 주신다. '네버엔딩 스토리'를 잘 부를 수 있는 방법. 이승철의 노래를 잘 따라 부르기란 어렵다. 소녀시대처럼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부른다면 모를까. 그럼에도 노랫말과 멜로디가 아름다워 제대로 한번 불러보고픈 소망이 있는데 의외로 방법은 간단하다.  

  "두 키를 낮춰 부르세요."      

  웃음이 터지고 만다. 남들은 살아가는 동안 한번 겪을까 말까 한 별별 우여곡절을 다 겪은 김태원의 아내를 떠올리며 참 위대한 여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만큼 근사한 남자를 사랑하는데 어찌 안 위대해질 수 있나 싶기도. 그날 밤, 우리 영달이가 나만큼 귀가 얇으면 남자의 그럴듯한 한 마디에 훅 가겠구나 우려하며 마지막 콘서트를 흥얼거리다 잠이 들었다. 내 죽기 전에 부활 콘서트에 꼭 가서 김태원이 기타 치는 모습을 기어이 보고야 말리라 다짐. 더불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그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박진영이나 김태원, 심형래 등 한 가지에 미쳐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입에서 출발한 말들은 모두 어록감인데 보고 있는 나는 당최 할 말이 없다. 제대로 미친 이 앞에서 나의 내면은 그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일 뿐. 다 버리고 한 가지만 남는다면, 그것에 완벽히 미치고 싶다면, 그것이 내겐 무엇일까. 마냥 영달이만 떠오르는데 머잖아 영달이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슬프다. 결국 나 같은 사람은 쪼금쪼금씩 요기조기 애정과 에너지를 분배하며 복닥거리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가 보다. 가끔 미친 이들의 쩌는 한 마디에 입이나 떡떡 벌려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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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1-1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왜 두 키를 낮춰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요? 저는 김태원에 대한 어떤 감정도 가지고있질 않은데 두 키를 낮춰 부르세요, 는 명언이네요, 정말. 우울증에 대한 것보다 이 말이 더 멋져요.

마지막에 쓰신 것처럼, 완벽히 미쳐야 할 대상이 '사람'인 것은 상대도 나에게 완벽하게 미치지 않는한-그럴일은 좀처럼 없죠- 그다지 좋은 대상은 못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반드시 미쳐야만 하는건 아닌 것 같으니 지금처럼 그냥 요기조기 애정을 분배하며 살아봅시다,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11-01-17 15:10   좋아요 0 | URL
정말 멋있죠? 좋아하는 뮤지션에 떡하니 U2를 써놓고는 기타 매고 소심하게 서 있는 청년에게 김태원이 또 한 마디 날립니다. "U2는 연주할 때 다리를 모으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쓰러졌어요. 날카롭지만 차갑지 않기란 쉽지 않은데 김태원이 그래요.

제발 나에게 미쳐달래서 미쳐드렸더니 미친 거 아니냐는 말만 돌아오는 게 인간사이죠. 다락방님 지적처럼 그다지 좋은 대상이 못 되요. 지금처럼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위안하며 부활 콘서트와 심형래 감독의 신작 영화를 기다려 볼랍니다.^^

레와 2011-01-17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블에서 하던 방송을 지상파에서 따라한다고 처음엔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솔직히 언제 방송되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지지난주 처음 보고 우리 교주님(이은미님의 오랜 팬입니다.ㅋ)의 촌철살인 평과 김태원 아저씨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곤 챙겨봐야겠구나 생각했지요.
어째건 시작은 구리지만, 패널들의 평과 어린 참가자들의 열정은 후아.. 말 문이 막히더군요.
난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맨날 잃어버렸다는 꿈은 대체 있긴 있었나 자문하게 되구요.

TV보면서 흑흑 우는일이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

깐따삐야 2011-01-18 09:4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김태원 때문에 끝까지 봤어요. 레와님은 이은미의 팬이셨군요. 콘서트에 가서 그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 소름이 확 돋겠죠?
분위기 산만하고 참가자들의 실력도 뒤죽박죽이지만 아주 건질 것이 없는 프로그램은 아닌 것 같아요. 레와님처럼 저도 대체 나는 뭣인가,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자문하게 되었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그렇듯 영달이한테나 신경 써! ^^

저도 요즘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ㅠ

Mephistopheles 2011-01-17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커로써 김태원은....난 70살까지만 살고 싶어...라고 하더군요...^^

깐따삐야 2011-01-18 09:50   좋아요 0 | URL
골골 백살 간다고 어쩐지 더 오래 살 것 같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이 들수록 더 멋진 곡을 만들고 더 멋진 말을 하지 않을까요? ^^

무해한모리군 2011-01-17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하 저도 그 부분에서 빵 터졌어요.
멋져요. 자신의 분야에서 거칠것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깐따삐야 2011-01-18 09:53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도 보셨군요.^^
거칠 것 없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한 마디에 꿈쩍 못하게 만들려면 얼마나 갈고 닦고 후비고 파면서 스스로와 싸워야 할까요. 한 가지에 홀려서 완벽히 미친다는 것. 상상 이상의 일이겠죠?

웽스북스 2011-01-1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정말. 여긴 심사위원들이 짱이네. ㅎㅎ

깐따삐야 2011-01-18 09:55   좋아요 0 | URL
와! 소리가 나오는 도전자는 아직 못 본 것 같은데 심사위원인 김태원의 한 마디에 와! 소리가 나와버렸어요. ㅎㅎ 도전자는 노래를 부르는데 김태원은 도전자의 인생을 듣고 있더라구요. 신들렸다고 밖에는 표현이 안 되요.

무스탕 2011-01-18 11:08   좋아요 0 | URL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는건 아는데 본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김태원에 대한 깐따삐야님의 시선이 제겐 더 매력적이네요.
'도전자의 인생을 듣고 있다'
김태원은 확실히 난사람이군요 ^^

깐따삐야 2011-01-19 11:57   좋아요 0 | URL
이승철이 워낙 유명하지만 아름다운 이승철의 노래들이 김태원에게서 나왔더라구요. 예전에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이후부터 눈여겨 보았더랬어요. 그때 했던 말들도 너무 멋졌거든요. 그는 진정 뮤지션이고 확실히 난사람이죠.^^

헤라 2011-01-18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모르게 <네버엔딩 스토리>를 두 키 낮춰 부르고 있네요^^

깐따삐야 2011-01-19 12:00   좋아요 0 | URL
처음 이 노래를 듣고 <마법의 성>을 들었을 때의 감동 그 이상의 감동이 밀려왔었어요. 아름답다... 그때가 복학해서 3학년 때였나 그랬을 거에요. 언제 노래방 가면 두 키 낮춰서 도전해 볼래요.^^

잘잘라 2011-01-26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침없는 명언 행진, 어록종결자.. 그런 자막까지 나왔던거, 기억나요.

김태원. 음악을 얘기할때 그는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버지, 인기인, 연예인, 국민할매.. 그 누구도 아니고 바로 김태원 자신이 되는 거 같아요. 저는 김태원이 음악에 대해 얘기할 때 정확하게 '카리스마'라는 말을 이해했어요. 그런 김태원을 자주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 저두 그거 꼭 챙겨서 봐요. ㅎㅎ

깐따삐야 2011-01-28 12:0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카리스마.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로 알려진 '회상3'을 김태원의 목소리로 들으면 카리스마 아주 제대로입니다. 지금은 목소리가 많이 상했지만 그는 보컬로서도 매력과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멋진 사람이에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