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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시험이 끝났고 감정이 고양되어 흥분된 주말을 보냈다. 아직 꽃이 피지도 않은 적막한 숲길을 걸으며 작은 새소리에도 환호성을 질렀다. 시험 때문에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겨울의 끄트머리부터 속으로는 꾸준히 신경을 쓰고 있었나 보다. 어쨌든 끝났다! 회상을 즐기는 성격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이쯤에서 잊고 싶다. 이제 남은 건 다음 달에 있을 프로포절인데 모든 구상물들이 갈팡질팡하다가 두둥실 공중에 떠버린 것 같다. 확실한 건 여전히 확실한데, 그 안에 담을 것들이 김 서린 안경 너머로 바라보는 사물들처럼 희뿌옇구나. 누군가 알록달록 열기구라도 타고 내려와 나를 멀리 머-얼리 실어가 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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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월급을 탄 친구가 진주귀걸이를 선물해줬다. 항상 수수한 것만 하고 다녀서 좀 화려한 것을 주고 싶었는데 나에겐 무용지물이 될까봐 그냥 무난한 것으로 골랐단다. 디자인은 심플한 것인데도 진주의 느낌이 화사해서 특별한 날에 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나를 생각해준 그 마음씀씀이가 참 고마웠다. 비록 조금 늦게 교단에 섰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초임 때의 나보다 훨씬 더 인내심 있고 너그럽게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녀는 무엇이든 빠르다고 좋기만 한 것도, 조금 늦어진다고 나쁠 것도 없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검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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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중한 건 아무도 안 보는 곳에 숨겨두고, 간직하고 싶어요. 가끔씩만 나 혼자 꺼내보고 말이죠.” “아, 나는 소중한 것일수록 자주 꺼내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랑하고 싶던데요.” 그저 개인차일까. 아니면 남녀의 차이일까. 요즘의 나는 일기도 잘 쓰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며 대화하지도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나 떠오르는 감정은 이따금 봄바람에 묻어 보내고 그 또는 그녀를 만났을 땐, 내가 지어보일 수 있는 가장 밝고 상냥한 표정을 짓곤 한다. 위선도, 유혹도 아니고 그저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예민한 친구 하나가 이런 내 모습을 알아채고 추궁했지만 짐짓 모른 척 했다. 사실은 나도 이런 내 모습을 스스로 모른 척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변덕스런 일교차만큼 시시각각 변하는 자잘한 감정들 속에 견고하고 꾸준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 봄이 오는 부산한 소리들을 음미하는 가운데 내 마음의 소리에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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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해야겠다. 알라디너들이 보고 싶었다고. 상경 일자를 잡았으나 나의 불찰로 무산되어 4월을 기다리고 있다. 십년을 넘게 사귄 친구에게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안다는 엄마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을 이곳에 와서는 참 잘도 한다. 나의 결점이라든가,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나 다음으론 알라디너들 같다. 누군가와 진지한 대화를 하다가도 그냥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페이퍼를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만큼 이곳에 쟁여둔 내 마음의 부피와 밀도가 무척 큰가 보다. 내가 스스로를 치유하고 보듬으며 성장해가는 동안 적절한 거리를 두고 나를 읽어주고 지켜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오프에서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많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도 마음이 두 개인 모양이다. 이런 나를 향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게 어쩐지 조금 슬프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