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라는 건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다가도 한해의 끄트머리엔 어김없이 나이를 셈해보곤 한다. 일본여행, 편입고사 등을 준비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촌은 올해 스물하나란다. 무척이나 생경하게 들리는 나이. 그때 나는 이런저런 고민들로 우울했던 것 같은데 그녀는 걱정은 있어도 밝아 보였다. 요즘 아이들은 똑똑해지고 가벼워졌다.
돌아보면 스무 살 이전의 삶이란 게 나에게 있기나 했나 싶다. 대학에 왔을 때 가끔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즐겁게 조잘대는 친구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 또래만이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힘들고 막막했던 기억들. 생뚱맞고 쑥스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원래 낭만적 기질이 다분한 몽상가로 타고났다. 당최 쿨하지를 못하고 촌스럽고 청승맞다. 그런 내가 고향 언저리의 어느 낯선 도시, 잇속 바른 아이들 틈에 섞여 3년을 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향과 지리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개발사업이 진행중이었던 그 곳엔 뜨내기들이 유독 많았고 그들과, 그들의 아이들은 매사에 영악하고 극성스러웠다. 중학교 때는 고향 한번 벗어나보겠다고 아둥바둥했는데 고등학교에 와서는 그 지랄맞은 아이들 틈에서 자존심을 다치지 않아가며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거의 두 얼굴을 지닌 채로 지냈던 듯 싶다. 어떤 친구들은 나를 좋아해주었고 어떤 아이들은 나를 어려워했다. 그런데 나는 내심으론 모두를 경계했다. 나빠서가 아니다. 약해서였다. 교사가 된 지금에도 내 모습과 비슷한 아이를 발견하면 마음 한켠이 아릿해진다.
그럼에도 묵묵히 버틸 수 있었던 건 징글맞은 희망 때문이었겠지. 고생 끝에 낙이 온다거나, 갑작스레 멋진 신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나이를 한 살 더 먹음으로서 꿈과 한발짝 더 가까워지리라는 그 설렘이 좋았던 것 같다. 학생과 아이라는 신분은 굴레 같았다. 당시의 나는 참으로 오만하게도, 어른으로 인정해주는 나이만 주어진다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할 자신이 있었다. 투덜거리는 사람들은 많지만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이 악물고 매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젊음의 특성이 본래 그러하듯 열정적이었고 자신만만했다. 시시각각 침입하던 우울감의 정체는 열정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세상과, 자신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이었다.
한번 무언가에 마음이 동하면 며칠씩 잠을 안 자고 밥을 안 먹고도 초롱초롱 불 밝히고 눈 밝힌 채 완벽히 몰두했다. 어느 날 밤인가. 문득 서정주의 시들이 너무 좋아져 '국화 옆에서'라는 시집을 밤을 꼬박 새워 필사한 적도 있었다. 반면에 한번 외면해버린 무언가에 대해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정해지고 무력해졌다. 그간의 정황을 살펴 신중히 숙고하고 판단해야 할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나는 "싫어" 한 마디로 일갈해 버리곤 했다. 그야말로 명명백백한 시절이었다. 누군가는 솔직하다 말했고 누군가는 까다롭다고 지적했다. 호오의 격차로 인해 여지가 없는 사람, 여백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고마운 줄도 몰랐고 누군가 반감을 표시하면 날선 고양이마냥 갸르릉거렸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남다른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는데 알라딘의 메모스토펠레모님이 스스로를 가리켜 신기주의라고 하시는 것처럼 나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신기주의 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깐따삐야 걘 재밌고 좋긴 한데 어떨 땐 정말 덩어리야, 덩어리. 짜증덩어리!" 그런 말도 들어보았고 나 스스로도 틀린 말은 아니구나 싶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평생을 헤매는 게 사람이라지만 유난히 자아집중력이 강한 시기가 또 어린시절 아니겠는가. 내가 나한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남들은 나에 대해 뭐라고 할까. 내 진짜 모습은 대체 어떤 걸까, 사람들은 날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을까. 어른들 고견으로 볼 때야 별로 쓰잘데기도 없이 밥만 축내는 질문들이련만 그때는 나름 굉장히 심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마치 이 모든 것들이 찬란한 페인트 모션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나는 어느 순간 현실에 뭉근히 안착한다.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돌아온 너구리였다. 좋아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현실감각도 잃지 않는 타협안을 모색한 이후엔 오감을 아예 닫아버린다. 배신이 아니라 운신이라고 믿었다. 복학을 했던 첫 학기. 교양사회학 수업 중에 일명 그린호프가 벌어진 날이 있었다. 게시판에서의 토론자들이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교수님은 멍석만 깔아주시곤 자리를 뜨셨다. 캔맥주 몇 개로 소일하던 수강생들은 어둑어둑해질 무렵 2차를 공모하기 시작했고 나는 슬슬 다음날 오후에 있을 영작문 시험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능글맞게 생긴 예비역 하나가 토익점수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냐고 운을 떼더니만 시험공부는 내일 아침에 해도 되지 않느냐고, 벌써 다 해놓고 엄살 피우는 거 아니냐고 회유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라면 한 두배 쯤 더 느물거리며 대거리 해줄 수 있다면 오버고, 그 능청스런 제스처를 보아하니 아주 거나한 2차를 염두해두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참으로 재수없게도 나 혼자(!)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모인 사람들의 숫자도 많은 건 아니었지만 함께 2차를 가지 못한 것은 저녁 알바를 마치고 곧 합류하겠다며 자리를 뜬 사람과 나, 이렇게 둘 뿐이었다. 더욱 재수없는 것은 혼자 집에 돌아와 나 자신에게 정말 잘했다고 칭찬까지 해줬다는 사실. 어차피 밤새 딴짓거리를 하다가 다음 날 오전에 느지막히 일어나서야 한번 쭉 훑어보고 시험 보러 갈거였으면서 왜 그렇게 야무진 척, 철저한 척 했는지 내 마음 나도 모를 일. 아마 그 무렵의 모토가 '무심코 마신 술 한잔, 망가지는 학점' 그 쯤 됐나보다.
이렇듯 돌아온 너구리는 두 눈 감아버리고 두 귀 막아버린 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다보면 좋아질지도 모르는 것들에 성실히 몰두하려 용쓰게 된다. 그리고는 그 지난한 과정 속에서 사뭇 현실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산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한다고 해서 꼭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걸. 사회에 나와 취직을 하고 인간관계의 변화를 보게 되면서 물리적인 환경에 따라 내 감정의 호오가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도 속물이 되어가는구나, 하는 자괴감보다는 이젠 내가 더 노력해야겠구나, 하는 긴장감이 생겼다. 생활력이라곤 터럭만큼도 없는 몽상가인 내가 고집부리고 청승을 떠는 동안, 밥 먹여주시고 옷 입혀주셨던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아마 세상의 모든 청춘들은 부모님의 나이드심과 함께 조금씩 철들어 가는 건지도. 이제 삼십대 중반이 코앞인 오빠를 보더라도 아무리 목석처럼 단단한 남자일지언정 때때로 양쪽 어깨가 무거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예전엔 오빠와 비교를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잔심부름에 시달려야 한다는 게 서운하기도 했지만 타고난 머리가 별로 좋지 않다는 자아비판, 부지런히 손발을 놀려야 인정받는다는 무수리 정신이 그나마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 또한 부모님과 오라버니가 교묘하게 주입시킨 세뇌정책이라고 해도 어쩔 순 없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해왔고, 앞으로도 좋아할 것들 중에 내곁에 남아있는 것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 기쁨을 준다. 책이 그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겠지.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읽고 쓰며 행복했다.
교사라는 직업은 처음부터 좋아한 것도, 하다보니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여자아이들이 간호사나 선생님에 대해 막연한 선망을 품는 것과 비슷한 심정으로 호감을 가진 적은 있었다. 진로를 선택할 때는 부모님의 입김이 많이 작용을 했었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두려운 것만 많았던 나는 다른 것을 주장할 여력이 못 되어서 어른들의 선택을 따르기로 했다. 여기엔 너라면 잘할 것 같다는 부추김도 어린 마음을 움직이는데 한몫을 했다. 잘할 것 같다고 토닥여주니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잘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고, 잘해야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는. 사실은 그래서 진로 선택을 두고 망설이는 아이들에게 종종 나에게 먹혔던 이 방법을 재활용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 근거치만 확보되면 우유부단한 아이들에겐 적절한 설득 과정이 때론 절반 이상의 효력을 발휘한다. 단, 나처럼 좀 단순한 데가 있어야 할 것.
하지만 백퍼센트 내 몫의 선택이 아니었기에 부작용 또한 컸다. 대학 다니는 내내 틈만 나면 칭얼거렸고, 동기들은 일사천리로 졸업하는 마당에 휴학을 감행했으며, 교사가 되어서도 시종일관 갸웃대며 어얼레- 여기가 아닌가보이-하면서 방황을 일삼았다. 안정된 직업이니 일등신부감이니 하는 세속의 찬사들은 차치하고, 학교와 아이들로부터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을 때 내가 힘들고 괴로웠다고 말한들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하고싶은 일만 계속 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한 사흘 동안 내리 잠만 자고, 그 다음 사흘 정도는 내리 소설책만 읽어대고, 또 다른 사흘 동안엔 블로그질만을 일삼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밤을 꼬박 새워가며 수다판을 벌이고 여행을 떠나보아도 상상했던 것만큼 신이 나거나 행복하지 않더라는. 누추하고 고달픈 현실이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주고 있기에 청량감이 더했을 뿐. 결국 귀환할 현실이 있어야만 여유와 일탈도 빛을 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의 십년에 다다르는 20대의 시간을 꼬박, 일상의 소중함 하나 발견하려고 그토록 비틀거리며 아둥바둥했다고 생각하면 살짝 허무해지기도.
나는 이제 마치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처럼 리뷰를 쓴다. 보다 어릴 적엔 책에 담긴 사연들만이 근사하고 무궁무진해 보였다. 이젠 나와, 나의 일상에 대해 조금씩 입을 열고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공감해 준다는 사실이 반갑고 기쁘다. 그만큼 나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뭇 사람들과 비슷한 무늬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천천히 적응해가고 있단 이야기겠지. 여전히 촌스러움을 버리지 못한데다 지지리 청승 떠는데 일가견이 있고 간혹 말도 안 되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통에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지만, 길고도 멀게만 느껴졌던 청춘의 한 시기를 건너고 있는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스무살 이전, 나를 부추기고 설득했던 사람들은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스스로 나를 부추겨주고 칭찬해줘야 함을 느낀다. 어느 시간, 어느 자리에 있든 삶의 주인은 나라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12월의 마지막 날 즈음해서 스물아홉이 되는 내게 편지를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