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딘가 좀 부족하고, 나이 들었다는 것을 실감할 때는 S와 데이트를 할 때이다. S가 슈퍼주니어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S는 올해 5학년에 다니고 있는 외사촌 동생이다. 세월의 갭으로 인해 그녀의 잽싼 사고력과 현란한 제스처, 신선한 아이디어를 따라잡기엔 두뇌와 근력이 모두 달린다. 그녀가 내게 자주 하는 말 중의 하나는 "언니는 참 오죽잖아." 인데 그녀의 어투 그대로 하자면 "언닌 진짜 으짓잖어." 이다. 아마도 우리 엄마가 내게 하는 지청구를 듣고 따라하는 것 같다. 이번에 단발머리로 자른 내 머리를 보곤 사정없이 비웃어주더니만 말아톤의 초원이 흉내를 내며 언니의 별명은 이제부터 초원이야, 라고 명명했다. 그녀와 함께 있다보면 나는 오분도 채 안 되어, 어딘가 좀 많이 모자란데다 데려갈 남자 하나 없는 대책없는 노처녀로 자리매김한다. 어떨 땐 함께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혼나기 위해 만나는 것도 같다. 이제는 이러한 SM 구도에 완벽하게 적응이 되어버려서 그래도 언니도 머 나름 귀여운 데가 있어, 라고 말해주면 나는 눈물 콧물 뒤범벅이 되어 황송해할 지경에 이른다. 단순한 내가 조금이라도 눈을 빛내며 좋아하는 기색을 비추면 "그걸 또 곰방곰방 믿냐?" 라며 깔깔대곤 하지만.
그러나 이번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상콤발랄함에도 불구하고 전에 비해 학업의 부담으로 다소 지쳐보였다. 영어와 수학, 학원을 두 군데만 다니기 때문에 다른 초등학생들에 비해선 적은 편이지만 엄청난 숙제량과 따라가기 힘든 수업 수준에 버거워하고 있었다. 좀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킨다는 명목으로 부모가 전학을 시켰고, 이사간 동네의 새 학원에 들어간 탓에 진도가 맞지 않아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학교 성적이 좋은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새로 들어간 학원에서는 벌써 중학교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듯 헤매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래도 언니가 명색이 영어 선생이라고 간간히 질문을 해오는데 명색이 영어 선생이란 사람이 "야, 벌써 이런 걸 왜 해? 언니는 이런 거 중3 때 배웠어." 라고 말했다는. 그러자 그녀로부터 돌아오는 말이 명언이었다. "언니, 이젠 시대가 바뀌었잖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애들보다 뒤떨어지게 돼 있어." 어린 것이 버얼써. 하지만 나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야, 언니가 예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공부보단 예체능에 소질이 있다니깐. 싫은 거 억지로 하지 말고 너 좋은 거 해. 너 좋은 거.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고 살아야 행복한 거야." 그러자 그녀로부터 돌아오는 말이 또 가관이었다. "언니, 우리나라에서 예체능으로 성공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난 그냥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님 할거야. 초등학교 선생님. 안정적이잖아." 옆에 계셨던 엄마는 너는 어떻게 초딩인 동생만도 못하냐고 혀를 차셨지만, 나는 그렇듯 예쁘고 재주 많은 그녀의 입에서 시대니 안정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 참 안타까웠다. 몇 년 전만 해도 짱구는 못말려, 명탐정 코난을 같이 보며 웃고 행복해하던 그녀였는데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같이 좋아할 땐 언제고, 이제는 영화마을에 가도 유치한 애니메이션은 별로란다. 만약 계속 고집을 피우다간 주먹과 함께 지청구가 날아오기 때문에 나는 그냥 그녀가 고르는대로 기다렸다가 순순히 대여료만 지불하고 나오는 정도.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비교 설명 해줄 때를 보면 역시 초딩은 초딩이구나, 싶다가도 그렇듯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나는 미용실에 가도 그냥 멍하니 있다가 견습미용사의 마루타가 될 때가 많은데 그녀는 단지 앞머리를 자르러 갔을 뿐인데도 어찌나 설명을 세세하게 하던지, 저런 점은 반드쉬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내에 나갔다가 계란빵 리어카 옆을 지나치면서 "계란빵은 좀 느끼하지 않냐?" 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가 또 한대 맞을 뻔 했다는. "언니는 지금 계란빵 리어카 옆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한참 팔고 있는데 눈치 없이."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이 너무도 옳아서 눈치 젬병인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싶었다면 오버고, 정말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더니 당장에 S언니~ 라고 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결국 주말 내내 그녀가 너무도 존경스러웠던 나는 S의 얼굴이 작게 보일 수 있도록, 그녀가 시키는대로 카메라 앞으로 내 얼굴만 냅다 들이밀어 주시고 친오라버님께서 장착해 놓은 무수리 모드로 급, 전환해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그녀를 보필했다. 아무리 심한 욕을 들어도 카드를 박박 긁었으며 맛있는 것들을 계속 입에 물려드렸다. "언니만 돈을 다 써서 어떡해..."라고 말하면서도 깍쟁이 S의 지갑은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것이 한 가지 있는데 내 차가운 손을 그녀가 꼬옥 잡아주었다는 것. 겨울만 되면 손끝이 꽁꽁 어는 나를 위해 그녀는 나와 다니는 동안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는 정말 진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도 얼른 좋은 남자 만나야 할텐데..." "하핫, 고마워." "근데 있잖아, 왠지 그러기 힘들 것 같지 않아?" -_-;;
완벽한 S는 어쩌면 만만한 나를 상대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건지도. 이 나이에 대충 어벙벙하게 사는 것도 때론 힘든데, 그 어린 나이에 그처럼 야무지고 옴팡지게 살려니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그녀로부터 이야기를 듣다보면 아이들의 인간관계 또한 정치색이 짙다. S를 비롯해서 요즘 아이들이 자꾸만 더 영악하고 냉정해지는 것은, 어떤 정확한 논리에서라기보다 어른들로부터 무작위로 답습한 생존방식의 영향이 크다. 제대로 된 실체를 모르면서도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 같은 막연한 초조와 공포에 등떠밀려 김밥이나 닭꼬치를 손에 쥔 채 학원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S는 그런 살벌한 세상에 속해 있다가, 이 나이를 먹고도 맛있는 것 이외에는 큰 욕심이 없어 뵈는 나를 보면서 위안을 얻고 가는 것일까. "아... 정말 학원 다 폭파해버리고 싶어." 우리 사이에 오갔던 많은 말들 중에서 그 말이 가슴에 콕, 걸렸고 어쩌면 그것이 도도한 S의 은밀한 진심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나는 까칠한 그녀가 겁나먼 학업의 여정을 마칠 때까지 그녀의 닳지 않는 샌드백으로서 맡은 바 기능을 다해야겠지. 팔자려니 하면서도 대체 내가 무슨 죄냐고, 이 썩을노무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