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의 자리 트리플 18
이주혜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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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의 자리, 이주혜




너와 나의 자리, 우리의 자리


<누의 자리>


나는 우리 속에 들어간 적이 별로 없어. 누구도 나를 우리라는 이름으로 환대해주지 않았어. 네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넌 달라. 넌 나를 우리라고 불러주었어. 그런 너를 흔한 말 속에 가두고 싶지 않아. 바흐친이 그랬어. 각 단어는 서로 다른 방향의 사회적 힘들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하나의 작은 무대라고. '누'라는 무대에 오직 너와 나, 단 두 사람만 올리고 싶어. 이제 '누'는 너와 나만의 단어야. 내가 그렇게 언명했어. 그 자에서 우리는 함께 춤을 출거야. 그때 너의 눈빛이 얼마나 번들거렸던가. 나는 너의 열렬함이 부담스러워 팔에 솟은 소름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p.25


이혼당한 여자, 빨판, 교수 자리 욕심내 꼬시려고 한 여자. 그렇게 환대받지 못한 네가 있다. 그런 네가 죽어도 장례식을 지킬 수도, 뼛가루를 가질 수도, 유품인 만년필을 가질 수도 없었다. 너와 나에겐 자리가 없다. 그런 너에게 나는 자리를 만들어준다. 


<소금의 맛>


걸핏하면 서로의 뺨을 어루만졌다. 로프웨이를 타고 하코다테산에 올라가 야경을 보았다. 하늘에 불꽃놀이가 펼쳐졌던 날에는 저 멀리 검은 물 위로 주황색 불꽃이 밤의 태양처럼 쏘아올려질 때마다 입을 맞추었다. 그런 우리를 이상한 시선으로 흘끔거린 사람들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오직 상대방만 보느라 다른 시선을 알아볼 수 없었다. 신들의 언덕 아래에서 우리는 인간끼리 맘껏 사랑했다. p.59


인간끼리 맘껏 사랑했다는 문장이 오래오래 읽는다. '이 사랑은 고통이다. 그게 이 사랑의 값이고 대가이다. 소금은 짜서 소금이고 이 사랑은 고통이지만 끝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끝내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서로의 언어로 <소금의 값>을 번역하는 일에 몰두하고 그러다 신들의 언덕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둘의 결말이 아름답다.


그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그렇지 않아? p.67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인간끼리. 


<골목의 근태>

왔어?

빛 한가운데 앉아 있던 여자가 너를 반겼다.

춥지?

여자는 앉은 자세 그대로 엉덩이만 움직여 너에게 난로 옆자리를 내주었다. p.83


자리없는 여성들. 자신의 일을 하면 엄마자격을 운운하고, 자신의 몸을 위해 임신을 중단하면 이기적인 여성가 되고, 여성으 욕망이 부정이 되고, 부모와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여성의 자리. 여성이 여성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장면은 그래서 애틋하면서 아프다. 제비뜨개방을 찾아가는 길이 언뜻 신비롭고 세상에 없는 환상의 공간으로 가는 길 같다. 그곳에서 함께 리스를 만들고 팥죽을 먹는다. 그곳에선 그저 오롯이 나 자신이다.

이주혜의 소설들은 여성성에 근거해 여성에 부여된 자리들에 대한 고발이자 자리 없는 여자들에 대한 구원의 이야기이다. p.126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사람을 위해 끝내 자리를 마련해주고, 사랑을 하고, 사랑이 멀어지고, 사랑을 되찾고, 따뜻한 환대를 받는 이야기. 인간끼리 사랑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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