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 눈이 뜨인다. 그녀들은 아직 잠에 빠져있고, 내 부실한 몸뚱이는 밤새 열기에 조금 시달렸는지 땀으로 약간 끈적거린다. 잠시동안 정신을 추스리며 누워있다가 선선한 아침바닷바람을 쐬고 싶은지 왠지 근질거려서 서둘러 디카를 들고 방을 나섰다. 바다도 그제서야 부스스 눈을 뜨는 것 같다.

오렌지 클럽 앞 바닷가-고기잡는 어부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한적한 바닷가를 걷는다.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공기 속에 슬며시 퍼지고, 멀리 작은 부둣가에서 고기잡는 어부의 모습이 한폭의 풍경화같이 아름답다. 오렌지 다이버 클럽은 미술을 전공하신 사장님이 손수 만드신 곳이다. 곳곳에 그려져 있는 다이버나 물고기 벽화들 역시 그분의 솜씨다.

오렌지 클럽 앞뜰

낭만적인 열대의 밤을 보냈던 그 자리
오렌지클럽에 멀지 않은 작은 부둣가에 배 한척이 묶여 있다. 우리가 다이빙을 하러 갈 때 탄 배다. 배 사진을 찍으러 가까이 가다가 물이끼에 미끄러졌다. 그 와중에도 카메라만은 살리겠다고 팔꿈치가 까진 것도 몰랐다. 자꾸만 샌들이 미끄러져서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 올랐다.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웃음이 나왔다. 혼자서만 즐기기엔 너무 아까워~~ 괜스레 자고 있는 애들을 깨웠다.
아침을 먹고 배를 타기 전에 잠수복으로 갈아 입었다. 배만 볼록 튀어나온 모양이 꼭 텔레토비같다. 게다가 이때를 대비해서 한국에서 공수해간 캡짱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내려쓴 내 모습은 내가 상상해도 웃긴다. 크크크. 점심때 먹을 먹거리를 기다리는데 햇볕이 따갑고 두꺼운 잠수복을 입고 있으니 조금 후덥지근하다. 필리핀 다이버가 오리발에 바닷물을 담아 목덜미에 부어줬다. 아! 목에서 등줄기를 지나 다리끝까지 타고 내려오는 시원함이란!! 소스라친다. 배는 전체적으로 길죽한 모양에 양 옆엔 균형을 잡기 위한 지지대가 달려있다. 이윽고 배는 출발하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뺨을 스친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이 뺨에 스치는 기분이 상쾌하다. 2,30분쯤 달려 어느 한적한 바닷가에 도착했다. 필리핀 원주민의 원두막같다. 그늘진 원두막 아래 나무의자에 누워 있으니 산들거리는 바람이 딱 기분좋을 정도다. 허니랑 신애랑 먼저 잠수를 시도한다. 수영을 전혀 못해서 겁이 난다던 미니는 왠걸 제일 오랫동안 바닷속에 머물러 있다. 원진은 생각보다 일찍 물속에서 나온다. 귀가 뚫리지 않아 두려웠단다. 마지막으로 내가 들어갔다. 두번이나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나는, 처음에 물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나보다도 덩치가 작은 다이버의 손을 꼭 잡고 머리를 물 속에 겨우 넣는데,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으니 순간 호흡기로 숨을 쉬는 걸 까먹을 정도로 당황했다. 코를 막고 귀를 뚫리게 만드는 일은 잘된 건지 귀가 아프진 않았지만, 아플까봐 계속 두려웠다. 바다속은 평온했다. 거기의 시간은 바깥세상과는 달리 느릿하게 흐르는 것 같았다. 바닥에 깔려 있는 돌들의 이끼들을 보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지만, 뜻대로 몸이 움직여주질 않아 여전히 두려웠다. 다이버의 오케이 신호에 나도 모르게 오케이 신호로 답했지만, 사실 두려움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왔다. 낭패감과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한번 다이빙을 시도하기로 했다. 이번엔 배에서 바로 잠수를 시도하는 거다. 사실 초보들에겐 힘든 일이긴 했지만. 그런데 잠수할 장소에 배를 세우자 높은 파도에 배가 기우뚱거린다. 배가 금세라도 뒤집어질 듯 출렁거려서 결국 포기하고 리조트 앞 바다에서 한번 더 시도하기로 했다. 짙은 남청빛 바다가 꿈틀거린다. 내가 타고 있는 배가 난파한다면 난 꼼짝없이 죽을테지. 깊은 바닷속으로 내 몸은 한없이 가라앉을테고. 어떤 느낌일까. 죽음은, 내 영혼은 평화로울까. 숨이 막힐 것 같은, 폐속을 차 오르는 바닷물을 시시각각 느끼면서 공포감에 사로잡히지는 않을까...... 파도의 움직임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바다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다. 좌우로 위아래로 내 머리와 몸은 출렁거린다. 문득 눈을 떠보니, 그들은 웃고 있다. 내가 조는줄 알았단다. 씨익 웃어준다. 어느 새 난 파도가 되어 깊고 푸른 바다를 떠돌고 있다.
리조트 앞바다에서 다시한번 다이빙을 시도하기로 했다. 파도가 꽤 높았지만, 바다 속 세상은 오히려 평화롭다고 한다. 난 용기 내어 두번째 시도를 했다. 결과는 실패작이었다. 물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는 것은 여전히 무서웠고, 높은 파도 탓인지 몸을 더욱 가눌 수 없어서 두려움은 더 커졌다. 난 엉겹결에 호흡기를 빼버렸다. 코로 숨을 쉬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정신을 잃었다. 끔찍했다. 실패했다는 자괴감과 비겁함에 분노를 느꼈다. 분해서, 눈물이 나왔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뜨거운 햇살아래 우두커니 바다만 바라보았다......
다이빙만 25년을 하셨다는 오렌지클럽 사장님이, 파도가 거울처럼 잔잔해져서 마치 바다가 호수같아질때 다시 한번 시도해보라고 힘을 주셨다. 과연 나도 이 공포증을 극복하고, 그 아름다운 푸른빛 세상을 볼 수 있을까.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다는 그 공감대와 동질감을 나도 느낄 수 있을까......

오렌지 클럽의 해넘이
물에 대한 공포감도 내 식욕을 꺾지는 못한 듯 했다. 참치회의 감칠맛이 혀끝을 감돌고, 얇은 만두피같은 걸로 싸여있는 바나나롤은 겉은 아삭하고 속은 입안에서 살살 녹을만큼 맛있다. 망고쥬스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반해버린 망고의 부드러움. 우리나라 고구마 비슷한 것이 있는데, 우리 고구마보단 단맛이 덜했다.

오렌지클럽 최후의 만찬-참치회와 고구마?

살살녹는 바나나롤-옆의 팩소주를 생각해보면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크크크

즐거운 추억을 함께 한 우리들

왼쪽에서부터 원진,신애,미니, 그리고 뒷모습은 오렌지 사장님 ^^
서툰 솜씨탓에 담아낸 모습들이 뚜렷하지 않고 어둡게 나와서 우리 지인들은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난 외려 그 어슴푸레하고 아스라한 느낌이 좋다. ^^

마지막 노을- 오른쪽 푸른 하늘 위에 어슴프레 보이는 하얀 점이 바로 달(moon)이다
오렌지빛 아름다운 노을을 뒤로 하고 마닐라로 돌아왔지만, 그 밤을 그대로 보낼 순 없었다. 그래서 내가 평상시에 노래부르던 나이트클럽 비스무레한 바에서 마지막을 보내기로 했다. 이름하야 '하바나 클럽' 오!! 이름부터 근사하고 뭔가 그럴듯한 냄새를 풍기지 않는가! 쿠바의 하바나 나이트를 떠올리게 하는 하바나 클럽. 크크크. 귓가에 살사 음악이 흘러들어오는 순간부터 내 가슴은 하릴없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음악이 날 부르는 거다. 바 내부는 그리 크지는 않았는데, 벌써부터 살사 춤에 정신없이 빠져있는 사람들이 쌍쌍이 공간을 차지하고 춤을 추고 있었다. 다행히도 우린 들어가자마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맥주 한 병씩 시켜 얼음과 함께 들이키면서 슬슬 분위기에 취하기 시작했다. 머리 희끗한 할아버지는 한 젊은 여성과 춤 삼매경에 빠져있고, 아마도 쿠바 사람임이 틀림없을 듯한 역시 머리 희끗한 흑인 할아버지는 음악에 맞춰 자유롭고 능숙하게 살사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뒷쪽 구석에 있던 게이 오빠 한 쌍이 나와서 능숙하기 이를 데 없는 쇼맨쉽-눈을 마주치면 윙크를 하거나 우아하게 살짝 머리를 넘기는-을 발휘하면서 빠른 스핀과 다소 과장된 듯 하지만 지극히 전문가다운 폼을 보란듯이 선보이는 게 아닌가. 아! 그들이 무대에 나타나면 다른 이들은 빛을 잃었다. 내 앞에 혹은 내 뒤에 앉아 있던 남자는 춤을 추고 싶지만 파트너가 없는 듯 이러저리 눈치를 보면서 가슴 속 열망을 조금씩 비치고, 약간 정신 나간 듯한 한 아줌마는-아마도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걸로 봐선 스페인이나 남미쪽의 사람일 듯한- 내가 보기엔 조금 이상한 리듬이지만 충실하게 음악을 느끼는 스텝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안달했다. 우리들도 슬슬 음악을 느끼고 분위기에 취해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금발머리의 아가씨가 나와서 브라질 삼바를 추기 시작하면서 바의 열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고, 그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게이 커플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서 한산해질 무렵, 브라질 댄서 출신이라던 그 아가씨의 룸메이트가 우리 자리로 와서 그 브라질 댄서가 원진이가 참 예쁘다고 했다면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몇가지 살사스텝을 가르쳐 주었다. 드디어 미니를 제외한 우리 일행은 모두 몸을 일으켜 그녀가 가르쳐 주는 스텝을 밟으면서 흥겨워했다. 허니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꼭 살사댄스를 배워야겠다면서 깊은 관심과 굳은 결의를 표명했고, 우린 아쉽지만 그 곳을 마지막으로 미니와 허니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 밤의 열기를 가슴 깊이 간직하며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