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아일랜드는, 평소에 내가 제일 가고 싶어하던 나라도, 내가 좋아하는 미남배우들의 나라도 아닌, 그냥 드라마 아일랜드다.
인정옥 작가의 '네 멋대로 해라'를 정말 좋아했다. 대사가 죽음이라고 생각했고, 어찌보면 순정만화같고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어수룩한 캐릭터가 맘에 들었다. 양동근이란 배우를 다시 보게 됐고, 자폐아같은 이나영을 여전히 좋아하게 됐다.
아일랜드는 나에게 있어선 어쩐지 '네 멋대로 해라'를 뛰어넘을 만큼은 아닌 것 같다. 네멋만큼 대사 한 마디 마디가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가끔은 따로 놀고 있는 것 같다. 드라마를 보다가 배우보다도 한발 앞서 혹은 동시에, 그 다음 대사가 내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난 아일랜드를 본다. 아일랜드를 보면서 현실의 사랑을 저울질한다. 순전히 나쁘지도 착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맘에 든다. 설사 넷의 사랑이 하나도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비극적인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강 국(현빈)은 항상 누군가를 보호해주고 싶어하지만, 사실 그는 외롭고 약한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국과 중아(이나영)는 잘 어울린다. 둘의 분위기가 비슷하다. 순수함이랄까. 하지만 국이가 중아를 보호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어쩐지 중아에게 국이가 기대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둘이 남매같다. 누나와 남동생.
이 재복(김민준)은 세상의 뒷면을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바람같다. 그는 애로배우 시연(김민정)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한다. 그런 그를 시연은 사랑했지만, 그는 비굴하지만 비참하지는 않을 만큼만 시연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중아를 사랑한다. 겉으로 보면, 재복과 시연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지만, 그래서 겉으론 시연이 더 강해 보이고 재복이 시연에게 빌붙어 살고 있지만, 실은 시연이 재복에게 마음을 더 의지하고 있었던 거다. 머리 아프지 않고 나름대로 행복했던 동거생활을 끝낸 건 재복의 의지였다. 그는 이제 누구에겐가 빌붙지 않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보호할 수 있고, 한 남자로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다. 국이가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중아를 사랑한다.
중아는 처음 공항에서 국이를 만났을 때 부서질 듯 약해보였지만, 기억을 지우고 슬픔과 아픔을 잊을 수 있을 만큼 강하다. 그 기억이 때때로 그녈 괴롭힐지라도 그녀는 그 기억을 안고 묵묵히 살아나갈 거다. 가족을 잃는 슬픔을 아는 그녀는 뱃속의 아기를 혼자서 키우면서 씩씩하게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거다. 어쩌면 언젠가는 그 누구도 필요없을 만큼 강해질지도 모른다.
시연은 더러운 물 속에서 피는 연꽃같다. 때론 세상과 타협도 하겠지만, 그녀는 날개를 달고 날아갈 거다. 마음 속 눈물대신 욕을 내뱉지만, 사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 그런 그녀를 보다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 재복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이제 국의 사랑을 욕심낸다. 한순간에 마음이 변하더라지만, 이제 그녀의 외로움을 제대로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은 국일지도 모른다. 재복의 마음은 떠났으니까.
책임과 자유. 결혼의 책임.
혹자는 그렇게 말할 거다. 국이와 중아는 결혼을 했고, 이제 둘 사이에 아이도 생겼으니, 충실히 결혼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결혼이 애들 장난이냐고. 그래, 결혼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결혼의 서약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쉽게 저버리기보단 분명 서로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결혼이 잘못 끼워진 단추라면, 서로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더 행복하다면, 빈 껍데기만 안고 그 결혼을 계속 유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처음부터 중아는 국이를 사랑하지 않고, 재복은 시연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과 시연의 사랑도 변하고 있다. 지랄같은 얘기겠지만, 그래서 행복하다면 서로의 사랑을 찾으면 어떤가. 굳이 이혼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또 이혼한다고 해서 네 사람이 남남처럼 살 것 같지도 않다. 작가의 의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 네 사람은 어떤 상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서로 의지하고 행복하게 살 것 같다. 지금은 상처가 될지도 모르지만, 고름을 터뜨리고 나면 아물기 마련이다. 난 어쩐지 네 사람이 서로 상처주지 않고 받지도 않고 아이를 잘 키우면서 다같이 행복하게 살 것 같다. 그래서 현실이 아니라 드라마일지도 모르지만.
이혼에 있어서 당사자 못지 않게 아이가 중요하다는 것 안다. 우리 부모님도 한때 힘든 시기가 있었고, 그 시기를 잘 넘기고 우리 곁에 남아주셔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잘 넘긴 부부가 이혼해서 재혼한 부부들보다 더 행복감을 느낀다는 연구결과도 있듯이, 이혼을 쉽게 결정하기 전에 다시 한번 심사숙고하고 서로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조건 참고 사는 게 능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혼 후의 힘든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차라리 이혼해서 더 행복하다면, 사는 게 아니라 죽음같은 결혼생활이라면, 아이들도 이혼을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라면, 이혼을 하는 게 어쩌면 아이들에게도 더 나은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이후에 아이들의 상실감과 빈자리를 어루만져줄 사랑과 관심, 서로간의 이해가 아닐까. 문득 엄마만의 행복이 아니라, 엄마가 행복하면 아이도 행복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음...어쩌면 굳이 결혼이란 틀에 매일 필요가 없지 않을까. 결혼해도 행복하지 않다면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하지도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