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22일 저녁 10시 50분경
밤기차를 타기 전에 허기진 배를 햄버거로 때우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본다. 오늘따라 읽을 책도 가져 오지 않았고, 음악 역시 듣고 싶지 않다. 내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는, 자신이 옥스퍼드 출신이라는 건 아무도 모를 거라는 둥, 알고보면 제비라는 둥,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열심히 중얼거린다. 가끔 영어도 섞어가며. 어쩌면 그도 정말 예전엔 한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앞날이란 모르는 것이다. 문득 가슴이 뭉클해진다. 혼자 떠나는 게 처음도 아닌데, 왠지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날 것 같다. 감기가 오려는지 슬금슬금 몸에 열기운이 뻗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아프면 안되는데 싶어 쌍화탕을 하나 사서 입안에 털어넣는다.
2004년 10월 23일 03:15
장성역에 도착했다. 알싸하고 서늘한 공기로 허파 속을 가득채운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가끔 다니는 택시가 눈에 띌 뿐 걸어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심호흡 한번 하고 나서 피씨방을 찾아 두리번 거린다. 필요한 정보를 뽑고 나니 얼추 5시가 다 됐다. 어디서 아침을 먹을까 기웃거리다가, <원진네 해장국>이란 간판에 남다른 친근감을 느끼고 들어섰는데, 그날따라 계모임이라도 하는지 갑자기 청소부 아저씨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금새 방안을 가득 메운다. 따가운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시원한 콩나물 해장국 한 그릇으로 뱃속을 달래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 장성버스터미날의 아저씨들은 혼자 다니는 내가 신기했던지 나서서 친절한 말을 던지신다. 때론 친절이 지나쳐 약간 오버하기도 한다. 아가씨, 나 오늘 5시에 마치거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웃음으로 받아 넘기고 6시 30분에 떠나는 백양사행 첫차에 몸을 싣는다.
2004년 10월 23일 07:10
그 시간에 버스를 타고 백양사에서 내리는 사람은 나뿐이다. 꽤 이른 시간인데도, 매표소엔 벌써 사람이 나와 있다. 젠장, 이렇게 이른 시간에도 나와 있단 말인가. 곧 단풍철이라서 그렇단다. 다른 곳에 비해 꽤 비싸게 느껴지는 입장료(3,400원)를 내는 수밖에. 어쨌거나 기분은 상쾌하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살 것 같다. 바쁜 일 없으니 슬슬 걷는다. 단풍을 감상하기엔 좀 이른 시기지만, 성질 급한 낙엽들이 쌓여 있는 곳을 밟으면서 부스럭 소리도 즐긴다.

연못에 비친 쌍계루의 풍경
쌍계루 근처 연못에서 사진 찍느라 여념없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나도 쌍계루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음과 카메라에 담는다. 저만치 앞에서 혼자 걷고 있는 여인을 따라 정신없이 올라가보니, 청진암이다. 혼자 오셨어요? 뒤돌아 말을 걸어주는 것이 못내 고맙고 반가워서 금새 친해졌다. 알고보니, 나보다 몇 살 연상이다. 남편분이랑 함께 여행중이라는데, 남편은 주차장에서 자고 있을 거란다. 여행을 시작한지 열흘쯤 지났는데, 지난 밤엔 차에서 주무셨다고.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이런 저런 얘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수다를 늘어놓았더니, 언니 그런 내가 맘에 드신단다. 여자에게 헌팅당하기는 처음이다. ^^;; 기꺼이 서로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속초에 오면 놀러오라고 하신다. 앗싸!

백양사 대웅전-뒤에 펼쳐지는 병풍같은 학바위가 일품이다 - 사진이 원작을 못 따라감이 아쉽다

속초에 사신다는 길조 언니를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백양사 뒤 계곡을 따라 3.5km쯤 올라간 곳에 자리잡은 운문암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가장 좋다는데, 이번엔 처음부터 등산보다는 그냥 여유있게 걷겠다고 마음 먹은 터라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린다. 주차장에서 길조 언니와 아쉬운 이별을 하고 천천히 내려와서 좀 기다리는데, 버스가 한 대 들어오길래 봤더니 아침에 백양사로 올 때 탔던 버스의 그 운전기사 아저씨가 아닌가. 어, 아침이랑 좀 달라보이시네요. 어허, 아가씨가 아침엔 정말 비몽사몽이었나보네. 네, 그랬나봐요. 하하하. 커피 한 잔 주고받으면서 기분좋게 얘기를 나눈다. 장성터미널에서 잠깐 뵜던 다른 아저씨가 오셨는데, 백양사역은 왜 가냐고 물으시길래, 김제로 일몰을 보러 간댔더니, 어허, 아가씨 사랑의 아픔이 있나부네, 하신다. 아, 그런가. 마음이 조금 뜨끔하다. 11시 40분경, 손주가 보고 싶어 아들 집에 가신다는 한 할아버지의 묵직한 보따리짐들이 너무 무거워보여 잠깐 들어드린다.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오직 그 할아버지와 나 뿐이다. 기분좋은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평화로운 기분이다.
2004년 10월 23일 12:19 김제역
하마터면 졸다가 못 내릴 뻔 했다. 역 앞 기사 식당에서 육개장 한 그릇 먹고 거전마을로 가는 버스를 탔다. 만경강 하구의 거전마을로 가는 길은, 우리 나라 유일의 지평선 축제가 열릴 정도로 드넓은 벌판을 끼고 수십분 동안 시원스레 달릴 수 있는 길이다.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산들이 흐릿하게 보일 때는 정말 지평선만 있는 것같기도 하다. 거전마을의 오솔길을 조금 걸어 들어가면 눈 앞에 고즈넉한 갯벌이 펼쳐진다.

만경강 하구의 거전마을에서 보는 갯벌풍경

아무 방파제나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갯벌을 바라본다. 낡은 배들의 시체(?)들이 다소 쇠락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어쩐지 한적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마을 입구에선 몇 명의 낚시꾼들이 망둥어를 잡느라 여념없다.

거전마을 - 낚시꾼의 하루

다리 위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의 그림자

만경강 하구의 어느 풍경
만경강 하구 ....이준관
만나자.
만날 테면 만경강 하구에서 만나자.
만나면, 우리는 머나면 서해 바다가 된다.
숭어잡이에서 돌아온 배에서
지느러미가 푸른 숭어를 보자.
숭어야, 비안도 앞바다의 푸른 파도는 잘 있는가.
보름달 뜨면 알을 까러 바닷가로 몰려나오던
게들은 잘 있는가
마늘을 뽑는 아낙네들이 강을 바라본다.
물빛을 닮은 그네들의 눈 밑까지 강물이 넘실대고,
갈대뿌리를 쪼아대던 물새떼들이 강물을 차고 날아 오른다.
아낙네들의 등적삼이 파랗게 젖는다.
무당집이 있는 언덕을 올라가면,
서러웁게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무당집 딸.
낮달 속에 숨은 무당집 딸.
서러운가? 서러우면 밥풀꽃 속에 코를 묻고
미치도록 강물 냄새를 맡아라.
슬픔은 저 혼자 깊어져 강바닥에 닿아라 하자.
바지락을 캐고,
고기 대신, 새우 그물에 노을을 뜨는,
낮은 처마에 불을 켜는 사람들.
만나자.
만날 테면 만경강 하구에서 만나자.
http://blog.naver.com/123jina/3620179에서 발췌
아마도 난 제대로 된 만경강 하구를 보지 못한 것이리라. 하지만 '슬픔이 저 혼자 깊어서 강바닥에 닿는' 듯한 느낌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쇠락한 슬픔.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님의 총총 걸음에서도. 안타깝다.
거전마을에서 되돌아나와 10여분쯤 달리면 멀리 사보이모텔을 지나 망해사 표지판이 나온다. 왼쪽의 오르막길로 접어들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왼쪽 길은 낙조대로 오른쪽 길로 내려가면 망해사다. 망해사는 그다지 큰 절은 아니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아늑하고, 바닷가 벼랑위에 세워진 범종각 뒤로 펼쳐지는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자판기 커피 한 잔의 따뜻함을 안고서 낙조대로 올라간다. 해가 지려면 아직도 두 시간 남짓 남았는데, 쉴새없이 몰아치는 바람이 꽤 차갑다. 낙조대에서는 갯벌도, 넓은 들판도 한눈에 들어온다. 갯벌을 보다가 뒤를 돌아보면 추수가 끝난 누런 들판에서 짚 태우는 연기가 안개처럼 퍼진다.

망해사 옆 낙조대에서 바라본 들
오후 5시가 넘어간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수록 낙조대에 몰아치는 바람은 매섭고 차갑기 그지없다. 따뜻한 차를 마셔대도 잠시 뿐이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옷이란 옷은 몽땅 꺼내입고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다.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만치 덜덜 떨려도 절대로 포기할 순 없다. 절박한 기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일몰을 보기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낙조대에서 보는 주홍빛 하늘

어느덧 해는 산 뒤로 넘어가고, 금새 주위는 어둑어둑해진다. 언덕을 내려와 심포항쪽으로 가는 길에 하늘은 금방 깜깜해졌다. 나처럼 걷는 사람은, 아니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서 조금 무섭다. 쌀쌀한 바람에 코 끝이 알싸하다. 시골에서는 밤이 깊고 길어 해가 넘어갈 즈음엔 모두들 따뜻한 방에서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겠지. 따뜻하고 아늑한 불빛을 볼때마다 몹시도 절박하고 필사적인 기분이 된다. 밤길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이 이랬을까. 아직 묵을 곳을 찾지 못했던 나는, 미리 적어놓았던 <사보이모텔>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혹시나 방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방이 있단다. 일단 마음이 놓였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대충 봐뒀던 길이건만, 밤에 걸으니 낯설다. 그래도 씩씩하고 용감하게 팔을 휘휘 내저으며 걸어간다. 이것도 재밌는 경험이군. 왠지 즐거워진다. 심포항에는 횟집뿐이라 저녁은 굶게 생겼다. 모텔 주인아줌마에게 요기할만한 곳을 물어 찾아갔지만, 계모임 손님이 우선이라 백반은 사절이란다. 한참동안 슈퍼를 찾아 구한 과자 몇 봉지가 그 날 나의 저녁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