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0-05 오후 9:56:56
여기는 해남입니다요.
으아아아...뻗겠슴다. 지금은 해남의 시외버스터미날 앞 PC방임다. 근데 이 놈의 인터넷이 어찌나 느린지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요. ^^
날라리 회사원, 제가 또 떴습니다. 뭐, 명목은 그럴싸 했지요. 답사 할 일이 있었거든요. 진실은 놀러 온 거지만요. 근데 놀기는 커녕 고생만 죽어라 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왜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지만요, 정말 좋아요. 피곤해 죽을 것 같아도 말입니다. 아마 체질인가 봅니다. 하하하
언제나처럼 밤기차 타는 걸 좋아하는 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10월 4일 금요일 밤 11시 34분발 광주행 기차를 탔습니다. 근데 지난번 경주여행때도 마주앉은 자리의 아저씨가 다리를 제쪽으로 올리는 바람에 거의 잠을 못 이뤘었는데, 이번에는 제 옆자리 건너편 아저씨가 술이 거하게 드셨는지 우렁찬 목소리로 밤새 떠드시는 겁니다. 이런... 아무래도 밤차와 저는 궁합이 너무너무 잘 맞나 봅니다. ㅡㅡ;
10월 5일 새벽 4시 17분 광주역에 떨어졌습니다.
어쨌거나 자다 깬 몽롱한 정신을 좀 깨워야 겠기에 광주시의 새벽공기 맛도 볼겸, 일단 광주역 바깥으로 나갔죠. 안개짙은 어둠이 조용히 감싸고 있었습니다. 일단 기지개 한 판 하고 나서, 다시 역내 대합실에 자리를 잡았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열심히 궁리를 해야 하니까요. 대충 자료야 미리 뽑아 왔지만, 구체적인 시간표는 아직 정하지 않았거든요. 근데 어쩌다보니 원래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본의아니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의 남도답사 일번지의 코스와 어느 정도 비슷해지더군요.
일단 월출산 무위사를 가기로 했습니다. 친절한 택시 아저씨가 터미날까지 모셔다 주셨습니다. 오예!
오전 6:00 ~ 7:20 광주터미날에서 강진공용버스정류장으로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차비6,400원)
사실 졸려서 죽을 뻔 했지만, 광주에서 강진으로 넘어오는 길에 시뻘건 남도 황토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열심히 졸린 눈 비벼가며 잔뜩 부라리고 봤지만, 아닌지 맞는지 가물가물할 만큼 조그만 부분의 붉은 황토를 스치듯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남도의 풍경은, 참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었어요. 전체적인 느낌은 참 나즈막하다고나 할까요.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로 온 천지가 황금빛 물결에, 나즈막하고 동그스름한 언덕같은 산이 저멀리 보이고, 역시 나즈막한 집들과 전봇대들이 앙증맞게 정겹더라구요. 제가 알고있는 경상도의 들판과는 왠지 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길가엔 코스모스가 만발하여 산들거리고, 제가 듣고 있는 퉁소의 퉁명스럽지만 독특한 음색이 제가 보고 있는 풍경과 잘 어우러지는 듯한 느낌이 정말 좋았죠. 근데 월출산에 가까와 질수록 산이 조금씩 높아지고 공기도 차가워져서 시야가 흐릴 정도로 자욱한 안개가 밀려왔습니다.
오전 8:38 ~ 9:00 강진에서 무위사로 가다 (군내버스 1,150원)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국보 제 13호라죠. 1983년 옥개부이상을 해체보수할 때 중앙간 종도리 장혀에서 "선덕오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 12년(1430년)에 건립된 것임이 밝혀졌다고 하는데요, 그런 역사적 사실은 별도로 하고 그냥 제가 받은 느낌은 참 소박하고 군더더기없는, 그렇지만 왠지 단아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홍준씨도 얘기하지만, 용마루의 직선을 살짝 둥글린 것이 단번에 눈에 들어오더군요. 슬며시 미소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제 마음을 끄는 것은, 거기서 나온 후불탱화들이었습니다. 극락보전의 정면에 있는 아미타여래와 지장,관음 두 협시보살의 벽화보다도 극락보전 앞 벽화보존각에 보관,전시되어 있는 "아미타여래내영도"와 "석가여래설법도"가 더 제 흥미를 끌었죠. 직접 가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미타여래의 내영도를 보면, 아미타여래 양 옆으로 8보살과 8비구(나한)이 구름위에서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는데요, 여래부터 보살,비구에 이르기까지 지그시 뜬 눈의 그 두터운 눈꺼풀과 도톰한 입술을 오그리고 있는 모양이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석가여래 설법도에서도 역시 그런 두터운 눈꺼풀로 지그시 내려다 보는, 그리고 오므리고 있는 입모양 뿐만 아니라 여래 오른쪽 보살 옆의 수염한 비구나, 여래 옆의 긴 흰눈썹의 늙은 비구의 입모양이나 표정 등이 제각각 특색있고 익살맞기까지 해서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지더군요. 휙휙 그려낸 너울과 옷자락이 멋있는 해수관음좌상도, 보살좌상도, 오불도, 그 외 훨훨 너울대는 옷자락으로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여러 모습의 비천선인도(이 비천선인도의 구름은 모두 길상무늬더군요) 등 총 29점이 유리장 안에 보관되어 있답니다. 저는 습기로 흐려진 유리창을 닦아내면서 열심히 들여다 봤습니다. ^^
오전 10:20 ~ 10:50 무위사에서 강진으로 가다
강진에서 무위사로 들어갈 때와는 다른 길로 나왔는데요, 이 길이 정말 끝내줍니다. 무위사에 나오자마자 일단 오른쪽으로 푸른 태평양 설록차 밭이 펼쳐지구요, 왼쪽의 경포대 매표소를 지나서 월남사지 근처로 오게 되면, 빨갛게 익어가는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자그마한 감나무들과 나즈막한 돌담길의 마을이 얼마나 예쁘던지, 정말 맘 같아선 뛰어내리고 싶었죠. 제가 차만 있었어도 거기서 오래오래 즐겼을텐데, 정말 아쉬웠습니다. 얼핏 스치듯 보았지만 월남사자의 삼층석탑의 늘씬하고 준수한 모습은 왜 그리도 눈에 밟히는지... 흑흑
무위사 가실 분들은 영암쪽으로 오다가 왼쪽으로 무위사 가는 표지판을 절대로 지나치셔서 월남사지,경포대 방향으로 가시기를 정말 권해드립니다. (유홍준씨도 얘기하시는 군요. 이건 정말이지 공감 또 공감합니다)
오전 11:00 해태식당에서 퇴짜맞다
유홍준씨가 추천하길래, 모처럼 큰 맘 먹고 들어갔더니, 저 혼자라서 안된다는 군요. 2인이상이어야 된데요. 혼자 다니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뜻인가. (거기서 옆의 화경식당을 권하길래 거기서 백반정식을 청해 먹었지요. 역시 해물이 많이 나오더라구요. ^^ 가격은 7,000원)
오전 11:45 ~ 12 :10 드디어 강진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다
이곳이 저의 원래 목표지였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흔적을 더듬어 보다, 뭐 대충 그런 의도였지요. ^^ 다산 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첨엔 좀 헤맸습니다만, 방향감각은 나름대로 있는 저라서 옳게 찾아갔지요.^^; 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오래된 나무줄기가 멋스런 계단이 되어주고, 양 옆으로 대나무와 동백나무, 측백나무인지 편백나무인지 아무튼 쭉 뻗은 멋쟁이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꽤나 가파른 길이었습니다. 앞에 나무들로 꽉 막힌 조금은 답답한 그런 곳에, 다산초당과 동암, 서암 등이 세워져 있는데요, 지금의 다산 초당은 세월이 흐르고 무너져 폐가가 된 것을 1958년에 다산유적보존회가 현재의 5칸도리 단층기와집으로, 그 후에 동암과 서암을 다시 복원하였다지요. 아마 모르는 사람은 지금 이 다산초당을 보고, 다산이 참 복에 겨웠다고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산초당과 서암 사이에는 '정석'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초당과 동암 사이에는 '약전'이라는 작은 옹달샘(이건 저도 정확하게 보지 못했습니다)과, 연지석가산이, 그리고 초당 앞에는 다산이 솔방울을 지펴서 차를 끓여 마셨다던 넓적한 바위인 '다조'가 있습니다. 이렇게 4가지를 다산 4경이라고 한다네요. ^^ 아무튼 거긴 조금 답답했습니다만, 유배당한 선비가 틀여박혀서 책을 연구하고 쓰기에는 좋을 듯도 싶습니다.
거기의 하일라이트는 당연히 '천일각'이었습니다. 원래는 이 천일각이 없었다고 해요. 원래는 다산이 앉아서 형 정약전이나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앉아있곤 하던 언덕에, 후에 다산유적보존회에서 세운 것이라네요. 아무튼 덕분에 저는 신발 벗고 편하게 양반다리하고 앉아서 멀리 강진만을 내려다보면서 새소리, 바람소리 풍류를 즐겼답니다. 오늘따라 안개가 많이 껴서 멀리 강진만의 푸른 바다빛을 볼 수는 없었지만, 누런 들판의 여유로움과 바람결에 스치우는 나뭇잎들의 윙윙,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만끽하면서 시원하게 말이죠. 하하하 아마 저처럼 정약용도 시원한 풍광을 벗삼아 시름을 달랬겠죠.
천일각 옆으로 백련사로 넘어가는 오솔길이 나오는데요, 인적이 드물긴 하지만 다산과 혜장선사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서 이 길을 걷는 상상을 하면서 걸으니 그렇게 무섭진 않았습니다. 여러 나무들과 친구하면서 말이죠. 그러다가 말이죠, 한참 산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벌이 윙윙, 파리가 쌩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헐떡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겁이 배밖에 나온 저라고 하더라도 조금 쫄았더랬습니다. 얼핏 들으니 꼭 멧돼지의 숨소리 같더라구요. (사실 멧돼지 숨소리를 실제로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 근데 알고 보니, 히히히, 전투긴지 뭔지가 저공비행하며 지나가는 소리였습니다.
백련사로 넘어가는 그늘진 산길을 넘어 숲을 빠져나가면 그 순간 눈 앞에서 강진만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동시에 좌우로 동백림이 늘어서 있구요. 아마 봄에는 빨간 동백꽃으로 만발해서 정말 아름다울겁니다. 백련사 대웅전 옆의 배롱나무에는 꽃이 피었습니다. 배롱나무꽃이라고 하면 전 왜 <상도>가 생각나는지... ^^
만덕산 백련사를 뒤로 하고 강진만을 내려다 보면서 내려오는 길은 꽤 좋았습니다.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이 좀 재미를 덜하긴 했지만요. 내려오면서 뒤돌아 보는 만덕산은 꽤 풍치있어 보였습니다. 아무튼 두 팔 벌려 바람을 가득 안으며 진짜 한가롭고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면서 한참을 내려왔죠. 뭐, 정류장에서 좀 많이 기다리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옛날을 추억하면 한번쯤 해볼만한 경험이었습니다.
문득 느낀 건데, 다산초당과 백련사 부근은 인가가 많지 않더라구요. 차도 그리 많이 다니는 길은 아니구요. 다산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외롭지 않았을까요.
오후 3:30 ~ 4:00 강진에서 해남으로 가다
오후 4:30 ~ 4:50 해남에서 대흥사로 가다
원래는 해남을 돌아볼 계획이 예정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다산초당에 백련사까지 다녀오니 시간이 좀 남더라구요. 그래서 가까운 해남을 좀 돌아보기로 했죠. 대흥사가 괜찮다길래 해남에서 대흥사로 갔습니다. 아! 정말 대흥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정말 후회할 뻔 했습니다. 모든 걸 다 집어치우고, 대흥사를 감싸고 있는 두륜산과 대둔산의 그 장엄함이라니...
대흥사 입구 주차장의 여러 유흥시설들은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만, 매표소에서 대흥사로 올라가는 길의 그 울창한 숲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운치있게 드리워서 시원한 그늘로 덮여진 그 길은 특히 사랑하는 연인들이 함께 걷는다면 더할 나위없는 멋진 길이지요.
그보다도 대흥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산의 경치는, 정말 폭 안기고 싶을 만치 멋진 남자의 품처럼 포근하고 웅장하고 시원하다 못해 제 입에서 서산대사가 '대흥'이라고 한 말에 정말 절로 맞장구를 치고 싶은 심정일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답답한 속이 탁 터지는 시원한 풍광, 상상이 되세요? 정말 직접 보지 않구선 알 수 없을 겁니다. 대흥사 가람 자체는 그리 매력적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만, 그 모든 걸 감싸고 장점으로 만들 만큼 멋진 풍경이었습니다. 정말 늦은 시간이 원통할 지경이었습니다.
저 혼자 보기엔 정말 아까와서 혼났습니다. 이번 겨울에 친구랑 다시 한번 꼭 들러야 겠습니다.
대흥사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내려오다가 군밤 파는 아줌마의 꼬임에 넘어가 삼천원에 밤 한봉지 사고 해남읍까지 차를 빌려타고 돌아왔습니다. 원래는 땅끝까지 갔다가 광주에 가서 하룻밤 묵을 예정이었습니다만, 대둔산(엄밀히 따지자면 두륜산이지요) 대흥사에서의 마지막이 너무 압권이어서 기력을 잃어버리고 말았군요.
다행히도 이 좁은 해남 바닥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24시간 찜질방에 관한 정보를 군밤 아줌마에게서 전해듣고 오늘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예정입니다. 내일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땅끝으로 가볼까 합니다.
재미없이 긴 얘기 읽느라 고생하셨구요, 즐거운 밤, 포근한 밤 되세요.
해남에서 무탄트 이수진이었습니다. ^^
1. 김선미(10/5,22:35): 다산초당-백련사오솔길에한표!산행즐기는분은월출산권합니다.저는땅끝마을전망대꼭대기에혼자텐트치고잠을청한다음날바닷가바위에붙은정체모를해산물을따서날걸로먹었던기억이..(이런고전적인여행을..)어쨌든부럽습니다.
2. 성수선(10/6,2:11): 무탄트,멋있어요! 한비야 책을 읽고 있는 것 같네.해태 식당 얘기들으니깐, 아쉬워요,같이 갔음 좋았을껄...
3. 박은선(10/6,16:0): 저도 이번 여름에 무탄트님이 가셨던 길을 열심히 도보로 답사했었는데...기억이 새롭네요. 가을에 가보는 남도는 더 멋질것 같아요. 저는 지난 금-토 부안에 다녀왔답니다. 전북도 남도못지 않더군요. ^^
4. 백수연(10/6,18:49): fighting!! sister~~^_^
5. 유경화(10/6,21:54): 월출산은 좀 험합니다, 두륜산이 완만하고 정상에 바다가 보여서 더 좋다고 하시데요 전 월출산행에 지쳐서 두륜산은 포기했는데
6. 유경화(10/6,21:55): 해남 터미널 뒤쪽으로 있는 한국관이란 식당에서 오천원짜리 정식이 어찌나 거하게 나오던지 눈물 뿌렸던 기억도 나네요.. 흐흐흐 (언니 부러워~~~)
2002-10-07 오전 3:11:03
어제 몹시 피곤했음에도 찜질방에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주인아저씨가 깨워주셔서 새벽 5시 30분쯤 일어났는데도, 생각보다는 몸이 가뿐하더군요. 단, 넙적다리와 종아리에 알이 배서 아픈 것만 빼구요. 근데 눈을 뜨니 비가 퍼붓고 있더군요. 어쩌나 하면서도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빗줄기가 좀 약해지더군요. 모자를 뒤집어 쓰고 찜질방을 나와서 해남터미날로 갔습니다.
4월 6일 오전 6:20 ~ 6:56 해남에서 땅끝으로 가다
해남터미날에서 첫차를 타고 땅끝으로 가는 길은 터미날의 백발 아저씨의 구수한 사투리만큼이나 정겨운 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군밤파는 아줌마의 말씀이 생각나는 군요. 해남은 전란도 비껴간 살기좋은 동네랍니다. 큰 비도, 큰 가뭄도, 큰 바람도 없는,그래서 해남에서 인물좋다는 남자들은 다들 한량이 된다는 군요. 반대로 여자들은 더욱 억척스러워지구요. ㅋㅋㅋ 군밤 아줌마가 가을만 되면 이상하게도 외로워져서 내내 음악을 달고 살게 된다고 하시던 말씀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네요. 아무래도 옆자리에 앉은 연인들 때문인가 보죠. 하하하
제 옆자리에는 두 쌍의 연인들이 저마다 다정한 포즈-여자의 가슴쪽에 얼굴을 박고 엎어진 채로-로 잠이 들어 있습니다. 땅끝으로 가는 연인들입니다.
이른 아침, 어렴풋이 날이 밝아옵니다. 촉촉히 젖은 황금빛 들판이, 붉은 황토와 어우러져서 정말 멋지군요. 아! 바다가 보입니다.
땅끝입니다. 생각보다 크질 않군요. 자동차도 실을 만큼 적당히 큰 배 몇 척이 부두에 묶여 있습니다. 폭풍주의보가 내려서 한동안은 출항할 수 없대요. 부두 끝에 조그만 등대가 보입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천천히 방파제를 걸어 갑니다. 조그만 등대에 의지해서 비를 피하면서 멀리 바다를 바라봅니다. 원장현의 "항아의 노래" 가락에 맞춰 엷은 잿빛 구름이 흘러갑니다. 파도도 춤추듯 넘실거리는 군요. 매번 들을 때마다 다른 느낌이었는데, 이 땅끝 남도의 바다와도 정말 잘 어울리는 음악입니다. 갑자기 춤을 추고 싶어져서 잠시 가락에 맞춰 흥을 내 움직여 봅니다. 다음에는 한국무용이라도 배워서 제대로 한번 춰보고 싶네요. 땅끝 파도 소리에 맞춰 말입니다.
옆에는 몇 분의 아저씨들이 바다낚시를 하고 계시고, 저는 비가 내리는 하얀 바다를 보고 있습니다. 비 오는 바다를 보는 게 제 조그만 소원 중 하나였지요. 10년 만에 소원 풀었습니다. ^^ 날이 좋고 사람이 많은 보통 때 왔더라면 오히려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슬비 내리는 한적한 부둣가를 혼자 걷는 운치를 언제 또 맛보겠습니까. 하하하
극동식당이라는 곳에서 게와 새우, 조개 등 해물이 잔뜩 들어간 짭조롬하고 시원구수한 '해물된장찌개'로 아침 속을 달래고, 빗속을 뚫고 전망대까지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알이 배어 아픈 다리를 끌고 잘도 다니는 군요. 하지만, 땅끝까지 와서 왠지 그냥 가기가 서운했습니다. 한 맺힌 듯한 대금소리를 벗삼아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혼자 걷고 있으려니, 문득 <젊은 날의 초상>의 정보석이나, <생활의 발견>의 김상경이 생각나는 군요. 마치 무언가를 찾아, 혹은 인생의 참의미를 찾아 정처없이 떠나는, 헤매는 구도자가 된 기분입니다.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닙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걷고 또 걸었습니다. 전망대까진 30분정도 걸렸습니다. 아직 좀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매표소 아가씨가 없네요. 전망대 앞 벤치에 앉아서 멀리 바다를 바라봅니다. 올라오길 정말 잘했습니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처럼 가까이에 있는 작은 섬들이 안개 속에 어렴풋이 보입니다. 맑은 날에는 멀리 제주도까지 한눈에 들어 온다는데, 전 지금이 더 좋습니다. 역시 높은 곳에서 바다의 경치를 내려다 보는 것은 언제나처럼 말이 필요없습니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편안해집니다. 잠시 넋을 잃고 그저 먼 바다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 땅끝에 사람들은 어떤 심정으로 오는 것일까요. 무엇을 찾으러 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바다구경이나 하러 오는 것일까요. 왠지 저마다 하나씩 사연을 가지고 있을 법합니다만, 그건 그저 제 생각일 뿐이겠지요. 허허허
땅끝이라는 말은 왠지 저를 벼랑 끝까지 몰아가는 듯합니다. 모든 것이 예전같지 않으리란 생각이 드는군요. 여기를 떠나고 나면 몹시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특히 비 오는 바다가요.
오전 9:30 ~ 12:10 땅끝에서 광주로 가다 (버스비: 9,800원)
롯데리아에서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으면서 어디로 갈까 생각했습니다. 첨엔 담양 소쇄원과 화순 쪽을 돌려고 했는데요, 암만 생각해봐도 시간이 모자라겠더군요.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정한 곳이 훨씬 더 좋더군요.
일단 화순 운주사로 가기로 했습니다. 광주 광천터미날 앞에서 중장터로 가는 218번이나 318번 버스를 타면 되니까 비교적 편하더군요. 218번은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많으니, 꼭 중장터로 가는 걸 타야 하더군요.
12:55 ~ 14:15 광천터미날에서 화순 운주사로 가다
운주사로 넘어가는 길은 정말 말 그대로 시골길이었습니다. 소박한 풍경 그 자체였죠. 황금빛이 얼마나 예쁜지, 단풍이 미처 들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그 황홀한 금빛 들판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엘리너 파전의 <보리와 임금님>이 떠오르더군요. 그 황금빛 보리밭 말입니다. 아마 극중 '나'의 심정이 지금 제 심정 같겠죠. ^^
운주사로 들어가는 길은 비포장된 진흙길이었습니다. 비에 젖어 촉촉한 향기를 내뿜는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기분은 정말 상쾌했습니다. 절로 노래가 나올 듯 했지요. 운주사로 들어가는 길은 제 생각보다도 훨씬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아직 소박함이 남아 있는 모습이 좋았지요.
석불감 쌍배불좌상을 지나가는데, 한 아저씨가 말을 건넸습니다. 뭘 그리 열심히 적냐면서요. 순간 경계심이 발동된 저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지나갔지요. 근데 이 아저씨가 제가 가는 곳마다 쫓아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ㅡㅡ 도선국사가 운주사 천불천탑의 대공사를 감독했다고 하여 그렇게 불리우는 공사바위에 올랐습니다. 그 위에서 운주사 정경을 한 눈에 굽어볼 수 있었지요. 공사바위에는 말발굽 자국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아저씨 설명에 따르면 예전에 고승이(도선국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을 타고 이 바위에 올라 저 건너편 산까지 한숨에 뛰어넘었다지요. 공사바위를 내려와서도 아저씨는 저를 따라오셨습니다. 결국 제가 포기를 하고 아저씨 말씀을 들었지요.
운주사 와불은 도선국사가 하룻밤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와불을 일으키려다가 첫닭 우는 소리에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세계에서 유일한 좌상,입상 형식의 와불이라지요. 좌불은 가슴에 손을 모으고 있는 비로좌나불, 옆의 입상은 석가모니불, 그리고 그 조금 밑에 세워져 있는 머슴부처는 노사나불, 이렇게 해서 비로좌나불 중심의 삼불신앙을 보여준다고 하는데요. 좌불의 아랫쪽을 가만히 살펴보면 반쯤은 바위에서 좀 떨어져 있고, 반쯤은 붙어있더군요. 석공이 바위에서 떼어내서 세우려다가 만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요.
와불에서 오른쪽으로 좀 내려오다고 보면, 동그란 모양의 바위 일곱 개로 이루어진 칠성바위가 있습니다. 하늘의 북두칠성을 본따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아저씨 말씀으로는 북두칠성의 밝기에 따라 바위의 크기도 다르다네요. 어떤 이는 운주사의 탑과 불, 전 등이 놓여있는 위치가 하늘의 별자리를 본딴 것이라고 한다지만,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가 예전의 절터에서 몇번 옮겨져 새로 지은 것이라니, 그 설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흥미롭더군요.
운주사는 알려진 이름에 비하면 아직 개발이 덜 되어서 옛날의 소박한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맘에 들었습니다. 천상의 구름 속에 있는 듯한 향기를 간직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좋았습니다. 자기 고장(도암)의 운주사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한 아저씨의 설명도 인상에 남구요. ^^
이제 화순을 떠나, 광주를 떠나,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새벽 3시가 넘었군요. 집 앞 PC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문득 해남터미날에서 땅끝으로 떠날 때 친절하게 안내해주시던 백발의 아저씨 말씀이 떠오르는군요. 제가 해남에 다시 오고 싶다고 하니까, 5월말이나 지금쯤 오면 교통 편하고, 식당, 숙박하는 데도 어려움없이 대우받아서 좋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아마 다음주나 다다음주쯤 되면 이번 여행처럼 한적하고 여유로운 여행을 하긴 힘들테죠. 정말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해남은 마음이 맞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꼭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곳입니다. 다음엔 땅끝을 먼저 들렀다가, 대흥사 밑에서 하룻밤 머물고 이른 아침에 경내를 천천히 거닐면서 대둔산, 두륜산의 경치를 음미한다면... 상상만 해도 구름 속을 거닐 듯 황홀한 기분이 되는군요.
아무래도 몸살이 날 듯 싶습니다.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거의 앓다시피 했지요. 하지만, 열번 몸살이 난다고 해도 좋습니다. 다시 가고 싶어요.
1. 정수선(10/7,8:32): 주5일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그랬다면 언니따라 확~ 가버리는건데ㅠ.ㅠ
2. 오명희(10/7,10:0): 짧은 여정으로 좋은 여행을 하였군요. 그렇게 훌훌 떠날 수 있는 때가 좋은 때 입니다.
3. 백수연(10/9,2:45): 언니, 너무 부럽네요..^_^ 난 언제나 그렇게 훌쩍 떠나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