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17 오후 8:42:28

 그냥 걸었다.  아무런 감정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온몸을 맡기며, 그저 걸었다. 이제는 조금은 지친 걸까... 갑자기 걷는 게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을 한다. 자꾸 어딘가에 앉아서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연두빛 새잎들의 생생함에 가끔 미소 지으며...

 목포행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은 후, 처음으로 들른 곳은 해남 대흥사다. 작년 10월에 잠시 들렀을 때, 시간없음을 탓할 정도로 인상에 남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그때랑 좀 달랐다.  대흥사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로움이 한꺼풀 벗겨진 느낌이라고 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땐 늦은 오후였다.  해가 막 넘어가려고 할 즈음이었다.  산에 어둠이 슬며시 깔리면서 대흥사를 엷고 투명한 안개가 살포시 감싸듯, 내 맘도 그렇게 감쌌었나 보다.

 <잠시 비껴가는 이야기>

목포와 해남과 순천의 화장실을 섭렵하면서 느낀 점은, 해남은 읍이고 목포와 순천은 시인데, 버스터미날의 화장실 수준은 해남이 제일 좋다.  사실 목포와 순천은 들어가기가 좀 망설여질 정도다.  청소 상태도 불량하고, 인테리어도 오래되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거 죽어도 잘라내서 뒤에 붙여넣기가 안된다...ㅡㅡ;)

 낙안 읍성 마을에 내려서 처음엔 실망 비슷하게 했다.  조성된 지 얼마지나지 않은, 인공적인 공원같은 느낌이었다.  현대와 옛날이 공존하는...  성 안으로 들어가니까, 조금 달라졌지만...  대학 졸업여행대 제주도 민속마을을 가봤지만...여기 낙안은 좀 다른 느낌이다.  아마도 집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이겠지만, 뭐랄까...살아있는 느낌이다.  물론 사람이 살고 있음으로 해서 훼손되는 부분이 적지 않을 테지만. 제주도에선... 왠지 으스스하고 을씬년스런 기분이 들었더랬다.  지금 다시 간다면 그 느낌이 어떨까...

 낙안엔 곳곳에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강렬한 노란빛이 활력을 주는 듯하다.  생생한 연두빛에 붉은 자주빛 물결이 넘실거린다.  사고 싶었던 디카가 매진된 관계로 아쉽게도 이번만은 일회용 카메라에 의지해야 했지만, 나름대로 온갖 폼 잡아가며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주막 앞을 지나면서  파전 한 접시에 동동주 한 잔이 절실했지만, 나 혼자 먹기엔 다소 부담스럽고, 같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먹을만한 사람도 없으므로, 아쉽지만 발길을 돌릴 수 밖에.  문득 효연씨 생각이 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오늘따라 혼자 온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단체로 소풍 온 학생들이나 아줌마, 아저씨들로 가득하다.  난 운도 없다. ^^

여긴 생각보다 찜질방이나 24시간 사우나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내일은 아침일찍 선암사와 송광사에 들렀다가 남해로 가려고 한다. 피곤하다...

  
 1. 이수진(4/17,20:44): 으...정말 재미없는 얘기다. 내가 썼지만... ㅡㅡ;  
 2. 이효연(4/18,2:23): 긴 여정을 짠 것 같네요...잘 다녀오구요...전 그때가 구정연휴라 여행객이 없었던게 운이라면 운이었죠...나중에 무탄트의 여행기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겠죠?^^  
 3. 정수선(4/18,10:34): 선암사에 가시면 화장실을 꼭 들러보래요(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전 작년 여름 못들러봤지만.  
 4. 양만호(4/18,11:49): 부럽다, 그리고 재밌는 걸요. 그냥 걷고 싶은 날들입니다. 아무 목적도 없이, 아무 꿈도 없이..  
 5. 이화진(4/18,19:20): 나두나두 부럽당.. ^0^   
 6. 김성희(4/18,20:25): 남해 역시... 가는 곳마다 ... 절경이죠. 누군가는 그리스 해안이 부럽지 않더라고... 했어요.  
 7. 김진희(4/19,1:10): 오~언니! 나도 데려가줘요 ㅜ.- (마음을 꽉 채우는 그런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길 그리고 무사히 돌아오길!)  
 8. 백수연(4/19,1:49): 으으.. 셤공부때문에 정신없는데..T.T..언니 너무 부러워요~~  
 9. 김진희(4/19,4:30): 셤의 압박을 받고 있는 숨책인들! 하얀 밤들은 공불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요! 셤의 압박으로 밤새 뒤척이라고 있는 것 ㅋㅋ 마지막까지 홧팅!  
 10. 장석원(4/19,4:46): 부디 성불하시길~. 떡갈비가 좋은 식당에서 밥 잘 챙겨드시고요.   
 11. 유돈(4/20,11:34): 전 법주사의 그 날을 잊지 못하는데... -_-;;   
 
 
2003-04-21 오후 3:39:21 
  
숨책의 젊은 친구들이 머리가 하얘지도록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난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며 행복해하고 있었다고 하면, 다들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

 첫째날의 다소 시니컬한 기분을 만회하듯, 둘째날은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선암사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평일에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인적이 없어 한적하니 좋았다.  고승들의 부도 근처의 편백나무나 삼나무의 쭉쭉 뻗은 모습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참 물오른 연푸른 새잎들과 울창한 숲이 참 보기 좋다.    선암사라고 하면 으레 앞에 붙기 마련인 승선교(보물 제 400호)의 모습은 보수공사때문에 볼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선암사를 뒤덮고 있는 온갖 종류의 붉은 꽃들로 마음이 싱그러웠다. 붉은 피처럼 곳곳에 떨어져 있는 동백꽃, 푸른 잎과 어우러진 분홍빛 벚꽃과 영산홍 등 온통 붉은 꽃 천지였다.

 수선이가 선암사 가면 뒷간을 보고 오라고 답글에 썼듯이, 선암사의 뒷간은 정말 유쾌하기 그지없다. 자연발효식인데다가 앞이 뻥 뚤려서 바람이 잘 통하니 냄새가 안 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구멍으로 시원한 바깥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으며, 그 구멍이 허리에서 발끝까지 닿아 옷을 입고 벗을 때 조금 민망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유쾌하게 느껴진다.  새어 들어오는 빛때문에 쌓여있는 낙엽까지 보이는 널찍한 밑구멍도 재미있다. ^^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선암사 야생화 학습장은, 선암사 주위에 자생하는 야생화 들로 꾸며져 있으나, 지금은 관심 밖에서 다소 밀려난 듯하다.  그러나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편백나무숲의 울창함이 그 서운함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연인들이 선암사를 한바퀴 돌고 나서 쭈~~욱 뻗은 이 편백나무 숲 사이의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히면서 앞에 핀 야생화 꽃밭을 본다면 데이트코스로는 그만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길은, 두 개의 고개를 넘어가는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열심히 가면 3시간 정도면 가능하겠으나, 아침도 굶고 물 한모금 마시지 않은, 그리고 가방 속에 먹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나에겐 끝도 없는 길이었다.  게다가 그 길엔 나 혼자 뿐이었다.  그 시간 그 숲은 온전히 나를 위해 존재했다.  땀을 흘리며 산길을 오르다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숨이 턱하니 받칠 즈음에 근처 아무 돌위에 몸을 던지고 잠시 숨을 고르고 땀을 식히며 앉아 있으면, 세상에!  마약보다도 더 달콤하고 황홀한 세상이 나에게 밀려온다.  들리는 건 내 숨소리밖에 없는데, 그 숨소리마저 숲에 동화되고 나면, 천국의 소리같이 아름다운 새 울음소리에,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에, 어디선가 솔솔 미풍이 날아와 내 땀을 식혀주고, 하늘에선 꽃비가 나린다.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리요.  혼자 있는 그 길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정신없이 걸어가다가, 어디선가 전동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해서 날듯이 뛰어 내려갔더니, 아니나다를까 눈 앞에 보리밥집이 보인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가는 길 중간쯤 위치한 그 보리밥집에서 먹는 보리밥은 꿀맛이었다.  시장기가 반찬이라고 보리밥 한 그릇에 나물 반찬들을 뚝딱 해치웠다.  마지막에 숭늉까지...  음.... ^^

  송광사에 도착할 즈음엔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송광사를 제대로 볼 정신도 없었지만, 외인출입금지 구역이 많아 돌아볼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았다.   국보 제56호인 국사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263호 하사당 등 수많은 문화재를 놓치고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참으로 아쉽다.  (내가 제대로 찾아보질 못해서 그런가...ㅡㅡ;)

선암사가 꽃이 많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면, 송광사는 고려시대에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찰답게 남성적이고 웅장한 느낌에, 많은 건물들이 짜임새있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송광사에 비사리구시, 능견난사, 쌍향수 등 세가지 명물이 있다는데, 난 사천왕사 앞에 있는 커다란 비사리구시만 보았다. 으...그러고 보니 못본 게 넘 많다.  대체 뭐했나 몰라...   하사당의 굴뚝이 인상적이어서 멀리서 그 굴뚝만 열심히 찍다가 왔다.

  그날 저녁엔 내내 비가 내렸다.  순천에서 자리를 옮겨 남해에 도착할 즈음엔 비가 절정에 달했다.  집에 있는 수많은 우산들을 두고서 새로이 우산을 사려니 무지 아까왔지만, 낯선 곳에서 저 혼자 비를 맞으며 다니는 궁상을 떨 자신이 더이상은 없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비싸지만 싸구려티가 팍팍 나는 우산을 사서 들고는,  비 오는 상주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열심히 걸어다녔다.

 남해군 상주면의 상주해수욕장은 생각보단 조그맣고 아담했다. 아마 인터넷에 나오는 사진들은 멀리서 찍어서 다들 멋있게 나온 걸거다.  안으로 폭 들어온 느낌이어서 확 트인 맛은 덜했지만, 밟히는 모래가 참 부드러웠다.  빗속을 뚫고 높이 치는 파도 소리 들으면서 미친 듯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안에서 뭘하는 지가 밖에서 훤히 내다보이는, 창이 넓은 여관에 방을 잡았다. 

  다음 날은 비가 그치길 기다리면서 아침부터 늑장을 부렸는데, 의외로 오전에 날씨가 정말 좋았다. 햇빛은 반짝거리고 전날 내린 비에 씻겨서 공기가 깨끗하고 시야가 확 트여서 출발할 때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물기를 살짝 머금은 풀잎들, 나뭇잎들은 더없이 싱그러웠다.  살랑살랑 바람은 딱 기분좋을 만치 불었다.   허나, 금산에 오르기 시작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부터 주위에는 엷은 안개같은 것이 끼기 시작하더니, 쌍홍문에 다다를 쯤에는 그 안개가 절정에 달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쌍홍문에서의 경치가 그만이었을텐데, 눈 앞에 송악인지 뭔지도 있었는데,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너무 안타까와서 그 안개비속에서 셔터를 눌러댔다. 

 금산 보리암에 오르는 방법은 대개 2가지 방법이 있다. 복곡주차장을 통해서 셔틀버스를 타고 제2주차장까지 와서 거기서부터 천천히 걸어오르기, 그리고 상주해수욕장 근처의 금산입구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밟으며 조금 고생해서 오르기.  난 후자를 택했는데, 고생은 좀 하더라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전날 고생한 전력이 있어서 그런지, 물이랑 먹을 것도 미리 준비하고, 계단을 오르는 것도 제법 익숙해져서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등산을 즐기거나 경치를 즐기고 싶으신 분들은, 복곡에서 올라오는 길보다도 이 금산입구에서 오르는 길을 권한다. 솔직히 복곡에서 오는 길은 좀 싱거웠다. ^^   날씨만 좋았다면, 금산 보리암에서 보는 경치가 끝내줬으리라. 

복곡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버스 시간표를 잘 알아둬야 기다리는 고생을 안한다.  복곡주차장에서 남해읍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1시와 4시에 있는데, 어중간하게 내려오면 하릴없이 배회하는 나같은 신세가 되기 쉽상이다.  하긴 자가용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문제 없겠지만... ^^

 원하는 만큼 돌아볼 만한 날씨가 못되어서 정말 아쉬웠다.  복곡주차장 근처에 저수지가 있어서 경치가 그럭저럭 볼만하다.

 금산에서 남해읍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창밖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경치가 끝내줬다.  남해는 섬치고는 농업이 잘 발달된 편이란다.  남해의 간척지와 바다 사이에는 뻘이 있어서 그 뻘이 완충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남해의 숲은 울창한 편이다.  물기를 머금어 촉촉한 들판과 숲들이 아름다왔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정말, 몇번씩이나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이럴 땐, 내 차가 없는 것이 한이다.  남자친구나 남편을 운전수로 두던지, 내가 직접 차를 몰고 다니면 좋은 점이, 원할 때 원하는 곳에 차를 세워두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난 면허증이 있어도 내가 운전하면 사고낼 것 같아서 평생 운전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맘 넓은 남자를 구해야겠다. ^^

  오랜만에 들리는 부산은 예전보다 많이 변한 것 같다.  그리고 다음엔 남해랑 외도를 묶어서 한번 돌아야겠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혼자 다니는 여행이 뿌듯하고 즐겁다.   수표를 내미니, 잔돈을 거슬러주겠다고 나한테 가게를 맡겨놓고 은행에 돈을 바꾸러 가는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으시던 수퍼 할머니, 금산 오르는 길에 손수 싸온 오이를 툭 잘라서 기꺼이 나눠주던 아가씨,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반갑다고 먹을 것을 더 얹어주시던 어느 분식집 아주머니, 길을 묻든 무엇을 묻든 항상 친절하게 답해주시는 여러 어르신들.  검게 탄 얼굴에 깊은 주름살이 정겹다.

  
 
 1. 김소영(4/21,23:46): 기사 딸린 자가용, 원츄~!  
 2. 아리영(4/22,21:30):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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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05 오후 9:56:56

여기는 해남입니다요.  
 으아아아...뻗겠슴다.  지금은 해남의 시외버스터미날 앞 PC방임다.  근데 이 놈의 인터넷이 어찌나 느린지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요. ^^

 날라리 회사원, 제가 또 떴습니다.   뭐, 명목은 그럴싸 했지요.  답사 할 일이 있었거든요.  진실은 놀러 온 거지만요.  근데 놀기는 커녕 고생만 죽어라 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왜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지만요, 정말 좋아요.  피곤해 죽을 것 같아도 말입니다. 아마 체질인가 봅니다. 하하하

 언제나처럼 밤기차 타는 걸 좋아하는 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10월 4일 금요일 밤 11시 34분발 광주행 기차를 탔습니다.  근데 지난번 경주여행때도 마주앉은 자리의 아저씨가 다리를 제쪽으로 올리는 바람에 거의 잠을 못 이뤘었는데, 이번에는 제 옆자리 건너편 아저씨가 술이 거하게 드셨는지 우렁찬 목소리로 밤새 떠드시는 겁니다.  이런... 아무래도 밤차와 저는 궁합이 너무너무 잘 맞나 봅니다. ㅡㅡ;

 10월 5일 새벽 4시 17분 광주역에 떨어졌습니다.

어쨌거나 자다 깬 몽롱한 정신을 좀 깨워야 겠기에 광주시의 새벽공기 맛도 볼겸, 일단 광주역 바깥으로 나갔죠.  안개짙은 어둠이 조용히 감싸고 있었습니다. 일단 기지개 한 판 하고 나서, 다시 역내 대합실에 자리를 잡았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열심히 궁리를 해야 하니까요. 대충 자료야 미리 뽑아 왔지만, 구체적인 시간표는 아직 정하지 않았거든요.  근데 어쩌다보니 원래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본의아니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의 남도답사 일번지의 코스와 어느 정도 비슷해지더군요.

일단 월출산 무위사를 가기로 했습니다.  친절한 택시 아저씨가 터미날까지 모셔다 주셨습니다. 오예!

오전 6:00 ~ 7:20    광주터미날에서 강진공용버스정류장으로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차비6,400원)

사실 졸려서 죽을 뻔 했지만, 광주에서 강진으로 넘어오는 길에 시뻘건 남도 황토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열심히 졸린 눈 비벼가며 잔뜩 부라리고 봤지만, 아닌지 맞는지 가물가물할 만큼 조그만 부분의 붉은 황토를 스치듯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남도의 풍경은, 참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었어요.  전체적인 느낌은 참 나즈막하다고나 할까요.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로 온 천지가 황금빛 물결에, 나즈막하고 동그스름한 언덕같은 산이 저멀리 보이고, 역시 나즈막한 집들과 전봇대들이 앙증맞게 정겹더라구요. 제가 알고있는 경상도의 들판과는 왠지 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길가엔 코스모스가 만발하여 산들거리고, 제가 듣고 있는 퉁소의 퉁명스럽지만 독특한 음색이 제가 보고 있는 풍경과 잘 어우러지는 듯한 느낌이 정말 좋았죠. 근데 월출산에 가까와 질수록 산이 조금씩 높아지고 공기도 차가워져서 시야가 흐릴 정도로 자욱한 안개가 밀려왔습니다.

 오전 8:38 ~ 9:00  강진에서 무위사로 가다 (군내버스 1,150원)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국보 제 13호라죠.  1983년 옥개부이상을 해체보수할 때 중앙간 종도리 장혀에서 "선덕오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 12년(1430년)에 건립된 것임이 밝혀졌다고 하는데요, 그런 역사적 사실은 별도로 하고 그냥 제가 받은 느낌은 참 소박하고 군더더기없는, 그렇지만 왠지 단아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홍준씨도 얘기하지만, 용마루의 직선을 살짝 둥글린 것이 단번에 눈에 들어오더군요. 슬며시 미소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제 마음을 끄는 것은, 거기서 나온 후불탱화들이었습니다.  극락보전의 정면에 있는 아미타여래와 지장,관음 두 협시보살의 벽화보다도 극락보전 앞 벽화보존각에 보관,전시되어 있는 "아미타여래내영도"와 "석가여래설법도"가 더 제 흥미를 끌었죠. 직접 가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미타여래의 내영도를 보면, 아미타여래 양 옆으로 8보살과 8비구(나한)이 구름위에서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는데요, 여래부터 보살,비구에 이르기까지 지그시 뜬 눈의 그 두터운 눈꺼풀과 도톰한 입술을 오그리고 있는 모양이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석가여래 설법도에서도 역시 그런 두터운 눈꺼풀로 지그시 내려다 보는, 그리고 오므리고 있는 입모양 뿐만 아니라 여래 오른쪽 보살 옆의 수염한 비구나, 여래 옆의 긴 흰눈썹의 늙은 비구의 입모양이나 표정 등이 제각각 특색있고 익살맞기까지 해서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지더군요.    휙휙 그려낸 너울과 옷자락이 멋있는 해수관음좌상도, 보살좌상도, 오불도, 그 외 훨훨 너울대는 옷자락으로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여러 모습의 비천선인도(이 비천선인도의 구름은 모두 길상무늬더군요) 등 총 29점이 유리장 안에 보관되어 있답니다. 저는 습기로 흐려진 유리창을 닦아내면서 열심히 들여다 봤습니다. ^^

 오전 10:20 ~ 10:50   무위사에서 강진으로 가다

강진에서 무위사로 들어갈 때와는 다른 길로 나왔는데요, 이 길이 정말 끝내줍니다. 무위사에 나오자마자 일단 오른쪽으로 푸른 태평양 설록차 밭이 펼쳐지구요, 왼쪽의 경포대 매표소를 지나서 월남사지 근처로 오게 되면, 빨갛게 익어가는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자그마한 감나무들과 나즈막한 돌담길의 마을이 얼마나 예쁘던지, 정말 맘 같아선 뛰어내리고 싶었죠.  제가 차만 있었어도 거기서 오래오래 즐겼을텐데, 정말 아쉬웠습니다.  얼핏 스치듯 보았지만 월남사자의 삼층석탑의 늘씬하고 준수한 모습은 왜 그리도 눈에 밟히는지... 흑흑

무위사 가실 분들은 영암쪽으로 오다가 왼쪽으로 무위사 가는 표지판을 절대로 지나치셔서 월남사지,경포대 방향으로 가시기를 정말 권해드립니다.  (유홍준씨도 얘기하시는 군요. 이건 정말이지 공감 또 공감합니다)

 오전 11:00    해태식당에서 퇴짜맞다

유홍준씨가 추천하길래, 모처럼 큰 맘 먹고 들어갔더니, 저 혼자라서 안된다는 군요.  2인이상이어야 된데요. 혼자 다니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뜻인가. (거기서 옆의 화경식당을 권하길래 거기서 백반정식을 청해 먹었지요. 역시 해물이 많이 나오더라구요. ^^ 가격은 7,000원)

 오전 11:45 ~ 12 :10   드디어 강진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다

이곳이 저의 원래 목표지였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흔적을 더듬어 보다, 뭐 대충 그런 의도였지요. ^^   다산 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첨엔 좀 헤맸습니다만, 방향감각은 나름대로 있는 저라서 옳게 찾아갔지요.^^;  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오래된 나무줄기가 멋스런 계단이 되어주고, 양 옆으로 대나무와 동백나무, 측백나무인지 편백나무인지 아무튼 쭉 뻗은 멋쟁이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꽤나 가파른 길이었습니다.  앞에 나무들로 꽉 막힌 조금은 답답한 그런 곳에, 다산초당과 동암, 서암 등이 세워져 있는데요, 지금의 다산 초당은 세월이 흐르고 무너져 폐가가 된 것을 1958년에 다산유적보존회가 현재의 5칸도리 단층기와집으로, 그 후에 동암과 서암을 다시 복원하였다지요.  아마 모르는 사람은 지금 이 다산초당을 보고, 다산이 참 복에 겨웠다고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산초당과 서암 사이에는 '정석'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초당과 동암 사이에는 '약전'이라는 작은 옹달샘(이건 저도 정확하게 보지 못했습니다)과, 연지석가산이, 그리고 초당 앞에는 다산이 솔방울을 지펴서 차를 끓여 마셨다던 넓적한 바위인 '다조'가 있습니다. 이렇게 4가지를 다산 4경이라고 한다네요. ^^ 아무튼 거긴 조금 답답했습니다만, 유배당한 선비가 틀여박혀서 책을 연구하고 쓰기에는 좋을 듯도 싶습니다.

거기의 하일라이트는 당연히 '천일각'이었습니다.  원래는 이 천일각이 없었다고 해요. 원래는 다산이 앉아서 형 정약전이나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앉아있곤 하던 언덕에, 후에 다산유적보존회에서 세운 것이라네요.  아무튼 덕분에 저는 신발 벗고 편하게 양반다리하고 앉아서 멀리 강진만을 내려다보면서 새소리, 바람소리 풍류를 즐겼답니다.  오늘따라 안개가 많이 껴서 멀리 강진만의 푸른 바다빛을 볼 수는 없었지만, 누런 들판의 여유로움과 바람결에 스치우는 나뭇잎들의 윙윙,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만끽하면서 시원하게 말이죠. 하하하 아마 저처럼 정약용도 시원한 풍광을 벗삼아 시름을 달랬겠죠.

 천일각 옆으로 백련사로 넘어가는 오솔길이 나오는데요, 인적이 드물긴 하지만 다산과 혜장선사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서 이 길을 걷는 상상을 하면서 걸으니 그렇게 무섭진 않았습니다.  여러 나무들과 친구하면서 말이죠. 그러다가 말이죠, 한참 산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벌이 윙윙, 파리가 쌩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헐떡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겁이 배밖에 나온 저라고 하더라도 조금 쫄았더랬습니다. 얼핏 들으니 꼭 멧돼지의 숨소리 같더라구요. (사실 멧돼지 숨소리를 실제로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  근데 알고 보니, 히히히, 전투긴지 뭔지가 저공비행하며 지나가는 소리였습니다. 

백련사로 넘어가는 그늘진 산길을 넘어 숲을 빠져나가면 그 순간 눈 앞에서 강진만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동시에 좌우로 동백림이 늘어서 있구요. 아마 봄에는 빨간 동백꽃으로 만발해서 정말 아름다울겁니다.  백련사 대웅전 옆의 배롱나무에는 꽃이 피었습니다.  배롱나무꽃이라고 하면 전 왜 <상도>가 생각나는지... ^^

만덕산 백련사를 뒤로 하고 강진만을 내려다 보면서 내려오는 길은 꽤 좋았습니다.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이 좀 재미를 덜하긴 했지만요.  내려오면서 뒤돌아 보는 만덕산은 꽤 풍치있어 보였습니다.  아무튼 두 팔 벌려 바람을 가득 안으며 진짜 한가롭고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면서 한참을 내려왔죠.  뭐, 정류장에서 좀 많이 기다리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옛날을 추억하면 한번쯤 해볼만한 경험이었습니다.

 문득 느낀 건데, 다산초당과 백련사 부근은 인가가 많지 않더라구요. 차도 그리 많이 다니는 길은 아니구요. 다산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외롭지 않았을까요.

오후 3:30 ~ 4:00  강진에서 해남으로 가다

오후 4:30 ~ 4:50  해남에서 대흥사로 가다

원래는 해남을 돌아볼 계획이 예정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다산초당에 백련사까지 다녀오니 시간이 좀 남더라구요. 그래서 가까운 해남을 좀 돌아보기로 했죠. 대흥사가 괜찮다길래 해남에서 대흥사로 갔습니다.  아!  정말 대흥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정말 후회할 뻔 했습니다. 모든 걸 다 집어치우고, 대흥사를 감싸고 있는 두륜산과 대둔산의 그 장엄함이라니...

대흥사 입구 주차장의 여러 유흥시설들은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만, 매표소에서 대흥사로 올라가는 길의 그 울창한 숲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운치있게 드리워서 시원한 그늘로 덮여진 그 길은 특히 사랑하는 연인들이 함께 걷는다면 더할 나위없는 멋진 길이지요.

그보다도 대흥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산의 경치는, 정말 폭 안기고 싶을 만치 멋진 남자의 품처럼 포근하고 웅장하고 시원하다 못해 제 입에서 서산대사가 '대흥'이라고 한 말에 정말 절로 맞장구를 치고 싶은 심정일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답답한 속이 탁 터지는 시원한 풍광, 상상이 되세요? 정말 직접 보지 않구선 알 수 없을 겁니다. 대흥사 가람 자체는 그리 매력적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만, 그 모든 걸 감싸고 장점으로 만들 만큼 멋진 풍경이었습니다.  정말 늦은 시간이 원통할 지경이었습니다.

저 혼자 보기엔 정말 아까와서 혼났습니다. 이번 겨울에 친구랑 다시 한번 꼭 들러야 겠습니다.

 대흥사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내려오다가 군밤 파는 아줌마의 꼬임에 넘어가 삼천원에 밤 한봉지 사고 해남읍까지 차를 빌려타고 돌아왔습니다. 원래는 땅끝까지 갔다가 광주에 가서 하룻밤 묵을 예정이었습니다만, 대둔산(엄밀히 따지자면 두륜산이지요) 대흥사에서의 마지막이 너무 압권이어서 기력을 잃어버리고 말았군요.

다행히도 이 좁은 해남 바닥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24시간 찜질방에 관한 정보를 군밤 아줌마에게서 전해듣고 오늘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예정입니다. 내일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땅끝으로 가볼까 합니다.

재미없이 긴 얘기 읽느라 고생하셨구요, 즐거운 밤, 포근한 밤 되세요.

해남에서 무탄트 이수진이었습니다.  ^^

 
 
 1. 김선미(10/5,22:35): 다산초당-백련사오솔길에한표!산행즐기는분은월출산권합니다.저는땅끝마을전망대꼭대기에혼자텐트치고잠을청한다음날바닷가바위에붙은정체모를해산물을따서날걸로먹었던기억이..(이런고전적인여행을..)어쨌든부럽습니다.  
 2. 성수선(10/6,2:11): 무탄트,멋있어요! 한비야 책을 읽고 있는 것 같네.해태 식당 얘기들으니깐, 아쉬워요,같이 갔음 좋았을껄...  
 3. 박은선(10/6,16:0): 저도 이번 여름에 무탄트님이 가셨던 길을 열심히 도보로 답사했었는데...기억이 새롭네요. 가을에 가보는 남도는 더 멋질것 같아요. 저는 지난 금-토 부안에 다녀왔답니다. 전북도 남도못지 않더군요. ^^  
 4. 백수연(10/6,18:49): fighting!! sister~~^_^  
 5. 유경화(10/6,21:54): 월출산은 좀 험합니다, 두륜산이 완만하고 정상에 바다가 보여서 더 좋다고 하시데요 전 월출산행에 지쳐서 두륜산은 포기했는데   
  6. 유경화(10/6,21:55): 해남 터미널 뒤쪽으로 있는 한국관이란 식당에서 오천원짜리 정식이 어찌나 거하게 나오던지 눈물 뿌렸던 기억도 나네요.. 흐흐흐 (언니 부러워~~~)  
 
 

2002-10-07 오전 3:11:03 
  
어제 몹시 피곤했음에도 찜질방에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주인아저씨가 깨워주셔서 새벽 5시 30분쯤 일어났는데도, 생각보다는 몸이 가뿐하더군요.  단, 넙적다리와 종아리에 알이 배서 아픈 것만 빼구요. 근데 눈을 뜨니 비가 퍼붓고 있더군요. 어쩌나 하면서도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빗줄기가 좀 약해지더군요.  모자를 뒤집어 쓰고 찜질방을 나와서 해남터미날로 갔습니다.

 4월 6일 오전 6:20 ~ 6:56  해남에서 땅끝으로 가다

해남터미날에서 첫차를 타고 땅끝으로 가는 길은 터미날의 백발 아저씨의 구수한 사투리만큼이나 정겨운 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군밤파는 아줌마의 말씀이 생각나는 군요.  해남은 전란도 비껴간 살기좋은 동네랍니다.  큰 비도, 큰 가뭄도, 큰 바람도 없는,그래서 해남에서 인물좋다는 남자들은 다들 한량이 된다는 군요. 반대로 여자들은 더욱 억척스러워지구요. ㅋㅋㅋ  군밤 아줌마가 가을만 되면 이상하게도 외로워져서 내내 음악을 달고 살게 된다고 하시던 말씀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네요. 아무래도 옆자리에 앉은 연인들 때문인가 보죠. 하하하 

제 옆자리에는 두 쌍의 연인들이 저마다 다정한 포즈-여자의 가슴쪽에 얼굴을 박고 엎어진 채로-로 잠이 들어 있습니다.  땅끝으로 가는 연인들입니다.

이른 아침, 어렴풋이 날이 밝아옵니다.  촉촉히 젖은 황금빛 들판이, 붉은 황토와 어우러져서 정말 멋지군요. 아! 바다가 보입니다.  

땅끝입니다. 생각보다 크질 않군요. 자동차도 실을 만큼 적당히 큰 배 몇 척이 부두에 묶여 있습니다. 폭풍주의보가 내려서 한동안은 출항할 수 없대요. 부두 끝에 조그만 등대가 보입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천천히 방파제를 걸어 갑니다. 조그만 등대에 의지해서 비를 피하면서 멀리 바다를 바라봅니다.  원장현의 "항아의 노래" 가락에 맞춰 엷은 잿빛 구름이 흘러갑니다. 파도도 춤추듯 넘실거리는 군요. 매번 들을 때마다 다른 느낌이었는데, 이 땅끝 남도의 바다와도 정말 잘 어울리는 음악입니다.  갑자기 춤을 추고 싶어져서 잠시 가락에 맞춰 흥을 내 움직여 봅니다.  다음에는 한국무용이라도 배워서 제대로 한번 춰보고 싶네요.  땅끝 파도 소리에 맞춰 말입니다.

옆에는 몇 분의 아저씨들이 바다낚시를 하고 계시고, 저는 비가 내리는 하얀 바다를 보고 있습니다.  비 오는 바다를 보는 게 제 조그만 소원 중 하나였지요. 10년 만에 소원 풀었습니다.  ^^  날이 좋고 사람이 많은 보통 때 왔더라면 오히려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슬비 내리는 한적한 부둣가를 혼자 걷는 운치를 언제 또 맛보겠습니까. 하하하

 극동식당이라는 곳에서 게와 새우, 조개 등 해물이 잔뜩 들어간 짭조롬하고 시원구수한 '해물된장찌개'로 아침 속을 달래고, 빗속을 뚫고 전망대까지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알이 배어 아픈 다리를 끌고 잘도 다니는 군요.  하지만, 땅끝까지 와서 왠지 그냥 가기가 서운했습니다.  한 맺힌 듯한 대금소리를 벗삼아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혼자 걷고 있으려니, 문득 <젊은 날의 초상>의 정보석이나, <생활의 발견>의 김상경이 생각나는 군요. 마치 무언가를 찾아, 혹은 인생의 참의미를 찾아 정처없이 떠나는, 헤매는 구도자가 된 기분입니다.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닙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걷고 또 걸었습니다. 전망대까진 30분정도 걸렸습니다.  아직 좀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매표소 아가씨가 없네요. 전망대 앞 벤치에 앉아서 멀리 바다를 바라봅니다. 올라오길 정말 잘했습니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처럼 가까이에 있는 작은 섬들이 안개 속에 어렴풋이 보입니다.  맑은 날에는 멀리 제주도까지 한눈에 들어 온다는데, 전 지금이 더 좋습니다.  역시 높은 곳에서 바다의 경치를 내려다 보는 것은 언제나처럼 말이 필요없습니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편안해집니다.  잠시 넋을 잃고 그저 먼 바다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 땅끝에 사람들은 어떤 심정으로 오는 것일까요. 무엇을 찾으러 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바다구경이나 하러 오는 것일까요. 왠지 저마다 하나씩 사연을 가지고 있을 법합니다만, 그건 그저 제 생각일 뿐이겠지요. 허허허 

 땅끝이라는 말은 왠지 저를 벼랑 끝까지 몰아가는 듯합니다.  모든 것이 예전같지 않으리란 생각이 드는군요.  여기를 떠나고 나면 몹시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특히 비 오는 바다가요.

 오전 9:30 ~ 12:10  땅끝에서 광주로 가다 (버스비: 9,800원)

롯데리아에서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으면서 어디로 갈까 생각했습니다. 첨엔 담양 소쇄원과 화순 쪽을 돌려고 했는데요, 암만 생각해봐도 시간이 모자라겠더군요.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정한 곳이 훨씬 더 좋더군요.

일단 화순 운주사로 가기로 했습니다.  광주 광천터미날 앞에서 중장터로 가는 218번이나 318번 버스를 타면 되니까 비교적 편하더군요.  218번은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많으니, 꼭 중장터로 가는 걸 타야 하더군요.

 12:55 ~ 14:15   광천터미날에서 화순 운주사로 가다

운주사로 넘어가는 길은 정말 말 그대로 시골길이었습니다.  소박한 풍경 그 자체였죠.  황금빛이 얼마나 예쁜지, 단풍이 미처 들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그 황홀한 금빛 들판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엘리너 파전의 <보리와 임금님>이 떠오르더군요.  그 황금빛 보리밭 말입니다.  아마 극중 '나'의 심정이 지금 제 심정 같겠죠. ^^

 운주사로 들어가는 길은 비포장된 진흙길이었습니다.  비에 젖어 촉촉한 향기를 내뿜는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기분은 정말 상쾌했습니다. 절로 노래가 나올 듯 했지요. 운주사로 들어가는 길은 제 생각보다도 훨씬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아직 소박함이 남아 있는 모습이 좋았지요. 

석불감 쌍배불좌상을 지나가는데, 한 아저씨가 말을 건넸습니다. 뭘 그리 열심히 적냐면서요. 순간 경계심이 발동된 저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지나갔지요.  근데 이 아저씨가 제가 가는 곳마다 쫓아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ㅡㅡ  도선국사가 운주사 천불천탑의 대공사를 감독했다고 하여 그렇게 불리우는 공사바위에 올랐습니다.  그 위에서 운주사 정경을 한 눈에 굽어볼 수 있었지요. 공사바위에는 말발굽 자국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아저씨 설명에 따르면 예전에 고승이(도선국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을 타고 이 바위에 올라 저 건너편 산까지 한숨에 뛰어넘었다지요. 공사바위를 내려와서도 아저씨는 저를 따라오셨습니다. 결국 제가 포기를 하고 아저씨 말씀을 들었지요.

운주사 와불은 도선국사가 하룻밤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와불을 일으키려다가 첫닭 우는 소리에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세계에서 유일한 좌상,입상 형식의 와불이라지요. 좌불은 가슴에 손을 모으고 있는 비로좌나불, 옆의 입상은 석가모니불, 그리고 그 조금 밑에 세워져 있는 머슴부처는 노사나불, 이렇게 해서 비로좌나불 중심의 삼불신앙을 보여준다고 하는데요. 좌불의 아랫쪽을 가만히 살펴보면 반쯤은 바위에서 좀 떨어져 있고, 반쯤은 붙어있더군요. 석공이 바위에서 떼어내서 세우려다가 만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요.

와불에서 오른쪽으로 좀 내려오다고 보면, 동그란 모양의 바위 일곱 개로 이루어진 칠성바위가 있습니다.  하늘의 북두칠성을 본따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아저씨 말씀으로는 북두칠성의 밝기에 따라 바위의 크기도 다르다네요.  어떤 이는 운주사의 탑과 불, 전 등이 놓여있는 위치가 하늘의 별자리를 본딴 것이라고 한다지만,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가 예전의 절터에서 몇번 옮겨져 새로 지은 것이라니, 그 설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흥미롭더군요.

운주사는 알려진 이름에 비하면 아직 개발이 덜 되어서 옛날의 소박한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맘에 들었습니다.   천상의 구름 속에 있는 듯한 향기를 간직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좋았습니다. 자기 고장(도암)의 운주사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한 아저씨의 설명도 인상에 남구요. ^^

 이제 화순을 떠나, 광주를 떠나,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새벽 3시가 넘었군요. 집 앞 PC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문득 해남터미날에서 땅끝으로 떠날 때 친절하게 안내해주시던 백발의 아저씨 말씀이 떠오르는군요. 제가 해남에 다시 오고 싶다고 하니까, 5월말이나 지금쯤 오면 교통 편하고, 식당, 숙박하는 데도 어려움없이 대우받아서 좋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아마 다음주나 다다음주쯤 되면 이번 여행처럼 한적하고 여유로운 여행을 하긴 힘들테죠.  정말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해남은 마음이 맞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꼭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곳입니다.  다음엔 땅끝을 먼저 들렀다가, 대흥사 밑에서 하룻밤 머물고 이른 아침에 경내를 천천히 거닐면서 대둔산, 두륜산의 경치를 음미한다면... 상상만 해도 구름 속을 거닐 듯 황홀한 기분이 되는군요. 

 아무래도 몸살이 날 듯 싶습니다.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거의 앓다시피 했지요.  하지만, 열번 몸살이 난다고 해도 좋습니다.  다시 가고 싶어요.

 
 
 1. 정수선(10/7,8:32): 주5일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그랬다면 언니따라 확~ 가버리는건데ㅠ.ㅠ  
 2. 오명희(10/7,10:0): 짧은 여정으로 좋은 여행을 하였군요. 그렇게 훌훌 떠날 수 있는 때가 좋은 때 입니다.  
 3. 백수연(10/9,2:45): 언니, 너무 부럽네요..^_^ 난 언제나 그렇게 훌쩍 떠나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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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23 오후 8:49:57 
  
말로만 듣던 '엽기적인 그녀'를 제대로 본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동생이랑 보면서 진짜 엽기라고 연신 감탄하면서, 갑자기 나도 엽기적인 그녀가 되고 싶어졌다면 웬 노망이냐고 할까. 나이 들면서 점점 엉뚱한 일들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이 불끈 치솟는다면, 나의 삶이 무료해서일까.

 그래서일까...  밤새 뒤척이며 잠 못 이루다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청량리역 앞에서 양수리방향으로 가는 8번, 166번 계열의 버스를 잡아타고, 능내역 정류장에서 내려서 건널목을 지나 오른쪽 길로 조금 걸어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난 언덕길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다산 정약용 유적지' 이정표가 나온다. 그 길로 쭉 내려가면 왼편으로 '다산 정약용 유적지'가 나오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란다.   인터넷에서는 연중무휴라고 하더니, 거짓말이다. (입장료는 무료이다)

'다산 정약용 유적지'는 정약용 생가와 묘 그리고 기념관, 문화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관 앞쪽에는 정약용의 저서 중에서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의 서문 등을 돌에, 목민심서 중에서 몇몇 구절을 뽑아 쭉 나열된 나무 기둥의 동판에 새겨 놓았다. 그 글들은 현대실학사에서 나온 <다산문학선집>,<다산논설선집>,<다산시 정선>, 창작과 비평사에서 박석무 편역으로 나온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추려낸 글들이란다. 집에 가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볼만한 글들이다.

 어차피 유적지 구경이야 그른 일이고, 다산이 자주 올랐다고 하던 '수종사'에 가리라 맘 먹고, 다시 능내역 정류장 앞에서 양수리 방향의 버스를 타고 검문소 삼거리 앞에서 38번 버스나, 166-3번 버스를 타고 수종사 입구에서 내리면, 표지판으로는 2km라고 하는데, 오르막만 있는 산길을 걷는 것이 참말 죽을 지경이었지만, 입구에서 오르는데만 내 걸음으로 정말 천천히 헉헉대며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리니, 생각보다 멀지는 않은가보다.  때때로 울퉁불퉁한 산길에 잘 포장된 도로는 아니지만, 수종사 입구까지 차가 올라올 수 있으니, 차가 있고 오르막내리막 운전에 능숙한 사람들은 나처럼 미련떨지 말고 편하게 올라올 일이다. 난 비록 도 닦는 기분으로 올라왔지만... ^^

수종사에 올라 내려다보는 전망은 정말 끝내준다. 멀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가 한눈에 들어오고, 다산이 살았던 마재(마현)마을도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거북이 형상으로 바라 보이는 것이, 가슴이 탁 트이고 암만 봐도 싫증이 나질 않는다. 게다가 그 옆에 무료다실이 있어서 가족들이랑 경치를 감상하며 따뜻한 차 한 잔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난 혼자라서 머뭇거리며 밖에서 구경만 하다가 입맛만 다시고 내려왔다. ㅡㅡ

수종사는 세조 4년(1458년)에 왕명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세조가 그 근처를 지나다가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려서 찾아보니 나한 18상이 나왔다나. 그래서 그 나한 18상을 모시기 위해 절을 지었다고 한다. 대웅전을 지나 불이문을 넘어가면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세조가 절을 창건하면서 심은 나무라고 한는데, 나무의 뻗은 가지 모양이 웅장하다.  어쩐지 어두운 구석에 처박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좀 울적하다.  어떤 아줌마, 아저씨들이 밑에 떨어진 은행이나 주워볼까 두리번 거리지만, 벌써 발빠른 누군가가 다 쓸어갔나 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떨어진 것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제발 바라건대, 애꿎은 나무가지를 흔들거나 쳐서 떨어뜨리지만 말아 주옵소서.

내려오는 길의 경사가 오르막만큼이나 장난이 아니어서 행여나 성하지 못한 무릎의 통증이 재발할까봐 거의 엉금엉금, 조심조심, 왔다갔다 하면서, 때론 목을 빼고 뒤로 걸으면서 무사히 내려왔다.

 근처에 '종합영화촬영소'가 있다는데, 시간 관계상 발길을 돌려 그냥 와버렸지만, 시간나는 사람은 거기도 한번쯤 들러 볼만한 일이다.

곳곳에 멋스럽게 지은 음식점들이 때때로 슬프다.

 
 
 1. 이성규(9/23,22:10): 와우... 누나 좋았겠다..^^ 나중에 뵈요..^^  
 2. 김성희(9/23,23:32): 올 봄, 몸살 앓으며 올랐던 수종사 생각이 나는군요. 그 큰 은행나무도... 혼자 한 여행만큼... 오래 기억에 남을 일이 또 어딨을까요.  
 3. 무탄트(9/24,9:14): 그럼요. 혼자 한 여행이 오래 기억에 남죠. 그래서 올 가을에는 많이 다니려고 합니다. ^^  
 4. 이자은(9/24,9:54): 여행... 왜 저는 그게 안될까요... 언니, 메세지 고마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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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올리는 옛 여행기들은 2002년부터 <숨어있는책>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개편되고 난 뒤 모두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 발견하고보니 그 기쁨이 만만치 않군요. 다시 보니 어색한 부분도 없잖아 있지만, 그 당시 사진기 하나 없이 두 발로만 돌아다니던 제겐 무엇보다 소중한 기록들입니다.  그 당시의 생생한 기억을 새롭게 갈무리 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하나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재미삼아 그때 제 글에 달아준 답글들도 그대로 올려봅니다. ^^;;

 


2002-05-25 오전 6:57:17 
  
차 시간표를 확인해 보느라고 잠시 pc방에 와 있다.  어젯밤 서울을 출발한 기차는 새벽 4시경 경주에 도착했다.  첫단추를 중요하다고 하는데,  난 기차에 몸을 실은 그 순간부터 다리를 내쪽으로 올리고 잠이 든 가족들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거꾸로 가는 기분은 오늘따라 이상했다.  다소 기분이 상했지만, 여행의 처음을 화만 내고 싶지는 않아서 참았다.

 새벽 4시의 경주 시내는, 생각보다 어둡지는 않았다.  그저 고요할 뿐.  4시 30분쯤 되니까 어슴프레 날이 밝아왔다.  경주시외버스터미날의 화장실에서 아침세수를 하고, 햇빛으로 나아가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화장을...ㅋㅋ) 집에서 준비해온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우고, 이제 불국사로 가려 한다.

 오늘의 내 여정은, 경화에게는 본의아니게 미안하게 됐지만, 남산이 아닌, 석굴암과 감포가는 길이 될 듯 싶다...

사족.  여자 혼자 보냈다고 걱정하는 사람, 이 글 보시고 걱정을 떨쳐버리길... ^^

 1. 이원진(5/25,9:35): 수진 언니 보고 싶어요 언제 오시려나  
 2. 유경화(5/25,11:33): 대체 모가 미안하단 말이죠? ^^ 저는 감은사지가 최고였다니깐요!! 하루에 감포와 석굴암을 뛰시려면 차시간을 잘 잡아야할텐데.. ^^  
 3. 유경화(5/25,11:35): 새벽기운 서린 고도를 낙낙히 산책하는 맛도 일품일텐데..으아 경주 정말 가고 시퍼진다~ 언니 조오켔따~~  
 4. 정주영(5/25,15:35): 드뎌 언니 여행을 갔구낭 
 
 


 2002-05-25 오후 6:39:41 
 
11번 버스를 타고 불국사에 간다.  내가 타고 난 다음에 웬 청년이 타는데 아무래도 일본사람인 것 같다. 불국사 가는 버스가 맞는지 묻는 것 같다.

경주 올 때마다 느끼는 사실이지만, 오늘도 느끼는 사실은, 경주 역에서 쭉 앞으로 뻗은 길, 거의 경주 시내라고 할 수 있는 그 곳은, 높은 건물이 없어서 그런지, 시골 읍내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는 거다. 그만큼 거의 변함이 없다는 얘기이겠지만, 그리고 경주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곤란한 점들도 많겠지만, 난 그래서 경주가 좋다.

사실 내가 오늘 새벽에 기차에서 내렸을 때 제일 먼저 내 코끝을 스치고 가는 경주의 향기는, 풀내음과 퇴비내음같은 것이었다.  그리운 냄새.

 불국사에 마지막으로 온 것이 7,8년 전쯤 되었을 거다.  역사나 문화재에 대한 안목은 여전히 형편없는 나이지만, 언제봐도 불국사는 아름답다.  뭐라고 해야할까, 화려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단순하지만도 않은, 그러면서도 위엄있는 아름다움, 회랑과 처마의 연결된 선의 날아갈 듯한 가뿐함,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은, 볼 때마다 느낌이 틀려지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아름다움.   사실 내 느낌을 뭐라고 얘기하기가 힘들다, 나의 언어적인 능력으로는...   그냥 즐겁고, 뿌듯하고, 애틋하다.

 애들이 수학여행을 왔나보다. 조용한 경내가 금새 시끌벅적해졌다.  이제 난 그마저도 아이들 다움인 것 같아서 좋다. 사이비 불교신자인 나는 불전마다 돌면서 조촐한 시주를 하고 삼배를 올린다. 대단한 믿음은 아니니, 전통 문화재 혹은 그 문화재를 만든 옛 사람에 대한 공경심이라고 해둘까...

 지금 시간 8시 50분, 불국사 경내를 거의 다 돌고 일주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가야지. 어떻게 석굴암으로 갈까...  등산로를 따라 갈까, 셔틀버스를 타고 갈까.   결국 셔틀버스를 타고 석굴암에 왔다.

토함산 거의 정상에 있는 석굴암은 주차장에서 보는 전경이 경주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듯 확 트이고 시원하다.  일단, 석굴암부터 구경해야지.  어? 꽤 걸어 들어가야 하네. 그래도 시멘트 길이 아니고 흙길이라서, 그리고 연두빛 싱그러운 나뭇잎들이 뜨거운 햇빛을 잘 가려주니 마냥 좋다.

 석굴암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실망이다. 처음엔 그랬다.  유리창 너머로 거의 본존불의 모습만 제대로 볼 수 있었으니까. 석벽의 다른 상들은 유리창에 반사되는 빛 때문에 뚜렷이 보기가 힘들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거의 입구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아놓았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규모도 작은 것 같아 보였다. 유리창 밖에서 보기엔...    유리창 안에는 큰스님과 두 보살이 오후 불공을 드리고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 본존불의 얼굴과 자태를 보고 있는 순간, 주루룩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대체 뭔가. 억누를 수가 없다.  슬픈 생각을 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갑자기 봇물 터지듯 감당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진다.  울음을 겨우 삼키며 눈물을 펑펑 흘리며, 잠시 불전 밖으로 나갔다.  누가 볼까 부끄럽다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눈물만 난다. 그때,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내 곁을 맴돈다. 나를 위로해 주려고 어느 영혼이 나비로 화해서 내 곁을 맴도는 것 같다. 누굴까. 당황스럽지만, 낯설지는 않은, 참 이상한 느낌이다.  

석굴암 불사 주위를 둘러싸고 많은 푸른 나뭇잎들 사이에서 유독 띄는 저 선명한 붉은 빛의 단풍나뭇잎은... 너무 선명해서 핏빛같다.  가을도 아닌데, 저렇게 붉은 단풍은 첨 보았다. 가을에도 보기 힘들만큼 붉은 색이다.   석굴암으로 들어오는 길 주변의 연두빛 나뭇잎들은 햇빛 사이로 반짝 빛나고 있다.

 불국사 올 때도 같이 왔던 그 일본인과 또 한 명의 건축과 출신이라는 청년과 석굴암까지 같이 와서 같이 떠난다. 끝까지 같이 가나 싶었는데, 불국사 앞에서 헤어진다. 나는 11번을 타고 보문단지로, 그들은 10번을 타고.

 졸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엑스포 공원이다. 공원정류장 간판에 150번 버스 노선이 그려져 있길래 급하게 내렸다. 곧 150번 버스가 왔지만, 나를 미처 못 봤는지 그냥 지나친다. 그런데, 어라!  이 놈의 버스가 1시간이 넘도록 오질 않고 있네. 심심함을 견디다 못해, 혹시나 싶어 집에서 가지고 온 십자수 세트를 꺼내놓고 오랜만에 손을 놀리면서도, 내 시선은 여전히 버스가 오는 길을 향해 있다.  1시간이 지나서야 그 놈의 150번 버스가 왔다.   150번 버스는 감은사지 절터와 문무대왕 수중릉까지 가는 유일한 버스이다. 역시나 졸다보니 감은사지 절터에서 내리지 못하고, 그나마 다행히도 문무왕릉 앞에서 내린다.

'봉길 해수욕장' 의 '봉길슈퍼'에서 우유랑 생수를 사서, 미친 듯이 남은 샌드위치로 배고픔을 달랜다. 이제 좀 제 정신이 든다. 살 것 같다.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듯한 새로운 기분이다. 배부른 만족감에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백사장을 걸아다닌다.  백사보다는 자갈이 더 많다. 푸른 바다가 눈 앞에 있고,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수중릉도 눈 앞에 있고, 뜨거운 햇볕을 적당히 무마시켜 줄 만큼 서늘하고 기분좋은 바람이 부는 바닷가를 혼자서 실실 웃으며 걸어다닌다. 서늘한 소나무 그늘에 있는 의자를 운좋게 발견하고 앉아서,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나, 단체로 온 젊은이, 중년 아줌마, 아저씨들의 즐겁게 배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아까전까지만 해도 억누를 수 없는 슬픔과 눈물로 가득차 있던 내 마음이 따스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평온하다. 평화롭다.

 한참을 바닷바람 맞으며 푸른 바다를 정신없이 보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추스리고, 감은사지까지 쭈삣쭈삣 걸어간다. 다리를 건너자, 감은사지 3층 석탑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까이 가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그 규모가 웅장하고 커서 놀랍다. 수풀과 어우러진 삼층석탑의 모습은 흥망성쇠의 부질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넋을 잃고 잠시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사실 마음은 반쯤 150번 버스가 오나 안오나에 가 있었다.  젠장, 그놈의 버스때문에 1시간 기다린 전적은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구만.

그래도 꽤 제 나름의 정취에 취해있다가 내려올 무렵, 저 멀리서 150번 버스가 오는게 보인다. 뛰어라!!!!  정말 열나게 뛰었다.  너무 열심히 뛰는 모습이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도 안쓰러웠던지, 웃으며 기다려주신다.  고맙습니다!!!  이번엔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다.  역시 변함없이 그 틈새를 노리고 꾸벅꾸벅 졸다가 때마침 경주역에서 정신차려 내렸다.

 아! 이제 어디로 가야하지.  잘 때가 없다.  정말로 경찰서에 가서 유치장에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할까, 아니면 24시간 찜질방에 가서 밤을 샐까.  근데 찜질방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알아 보려면 pc방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눈에 띄질 않네. 젊은 남학생에서 물어서 이곳을 찾았다. 다행히 근처에 찜질방에 하나쯤 있을 것 같은데, 첨이라서 좀 망설여지기도 한다. 아니닷!  일단은 전화해보는 거야. 안되면 여관엘 가면 되지. 여관에 가서 혼자 자는 게 첨도 아니면서 새삼스레 뭘...

 오늘의 일과는 대충 끝났다. 오늘의 마지막은 내가 잘 곳을 정하는 것이다. 그저께도 어제도 잠 못 이뤘던 여파가 오늘에서야 나를 붙잡고 빨리 쉬게 해달라고 성화를 부린다. 나는 이제 자러 가야겠다. 아니다, 일단 방을 잡아 놓고, 배를 채우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근처를 산책이나 해야겠다.

오늘은 꿈도 없이 자겠지.

 1. 송수철(5/25,21:9): 경주가 변하지 않는 다는 말은 글쎄요...  
 2. 송수철(5/25,21:9): 시내는 아직 고만고만한데, 경주 북쪽으로는 아파트들이 쑥쑥 올라간답니다..  
 3. 송수철(5/25,21:11): 11번 버스를 타면 통일전 인근도 너무 좋답니다. 임업시험장, 서출지.. 불국사보다 더 아름다운 곳인데.  
 4. 송수철(5/25,21:12): 서출지에 연꽃 피는 모습이 얼마나 좋은지. 다음에 경주 오시면 밤에 돌아다니는 것도 정말 좋을 거에요 ^^  
 5. 이수진(5/26,22:39): 네, 그래요. 저도 불국사 갈때는 꼭 11번 버스를 타고 가는데, 그 가는 길이 더 좋더라구요. 그리고 이번엔 아쉽게도 밤에 돌아다니지 못한 것이 안그래도 맘에 걸리는군요. ^^ 담엔 꼭 한번 밤의 산책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2002-05-27 오전 12:30:32 

송수철씨가 올리신 글을 읽다 보니, 역시 잠시 동안 머무는 나같은 뜨내기는 경주의 진정한 모습을 못보고 지나치기 쉬울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오늘 집으로 오면서도 내내 아쉬웠던 것이, 어제 잠잘 곳을 정하지 못한 탓에 감히 실행하지 못한 경주의 밤 산책이었다. 사실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아무 여관이나 방 잡아놓고, 저녁 시간 후의 산책을 즐겼을 것이다.  밤이란 분위기는 묘하게도 사람을 설레게 하는 유혹적인 면이 있다.  그것도 낯선 곳에서의 밤이라면 더더욱.  묘하게 자유롭고 스릴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

 몇 년 전 부여나 안동 여행 때도 그랬지만, 여자 혼자의 몸으로 여행하는 것에 불편한 점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잠잘 만한 곳을 찾는 것이다. 전에는 여러 여관이나 모텔을 발품팔아 찾아다니면서, 혼자라고 몇 천원 더 깎아서 묵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기억마저 재밌고 좋은 추억거리다- 이번엔 기왕에야 여관에선 자지 않겠다고 맘 먹었고, 경주 시내엔 민박집에 많지 않다는, 그 중에서도 내가 찜해논 한 민박집엔 방이 없다길래,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일단 문명의 이기인 영화를 보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영화시작시간인 11시 20분까지 극장 휴게실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시작 몇 분 전에야 겨우 잠이 깨서 캔커피를 사면서 매점 아줌마에게 근처에 찜질방에 없냐고 물었더니, 역시 아저씨들보다는 아줌마들의 정보통-그 중에서 찜질방이나 사우나 같은 것에 대한-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서, 결국은 '합동 양조장' 근처에 있다는 찜질방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택시를 잡아타고 '동광 게르마늄 찜질방'에 도착한 것이 1시 30분 경. 태어나서 처음으로 '찜질방'이라는 곳에 가 본 나는, 모든 게 마냥 낯설어서, 카운트를 보고 있는 잘생긴 젊은이에게 이것저것 자꾸만 귀찮게 물어대고, 이곳저곳 기웃거려댔다. 일단, 목욕탕에서 묵은 때를 벗겨내고, 개운한 기분으로 게르마늄 방에 들어갔다. 언제나 성질이 급하고 참을성이 부족한 나는 얼마 견디지도 못하고 뛰쳐 나와 버렸지만, 그래도 왠지 개운하고 공돈 생긴 듯 뿌듯한 기분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때론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다. 처음엔 나처럼 낯선 곳에 와서 여관비를 아낄려는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근처에 집이 있는 사람, 술 마시고 친구들과 함께 들어오는 젊은이들, 사랑하는 연인들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구석에 있는 좁고 길다란 나무 의자에 누워 잠을 청했는데, 다행히도 한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

 5월 26일 오전 5시 30분, 생각보다 일찍 잠이 깼다. 다시 한번 게르마늄 찜질을 시도하고, 잠시 땀을 뺀 후에 단장을 하고, 그 곳을 나서 팔우정 해장국 골목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런데 이 해장국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뼈다구 해장국이 아니라, 멸치다시 우려낸 듯한 물에, 채썬 묵, 콩나물, 신김치, 그리고 주인아줌마 말씀에 따르면 모나물이라는 해초가 들어간 것인데, 그 맛이 다소 시큼털털하면서 시원했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

 다음 코스는 영주 부석사였다. 사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원래 가려고 의도했던 곳이다. 예전에 혼자 안동이랑 영주를 돌아다닐 때도 들렀는데, 그 때의 좋은 느낌과 어떤 책을 읽다가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서 이번에 꼭 가기로 맘 먹었더랬다. 경주에서 영주로 가는 9시발 통일호는, 안 들리는 역이 거의 없고, 한번 들리면 5분이상 머물러 있거나, 어떨 땐 내가 뛰는 것보다 더 늦게 달리거나 종종 멈춰 서 있기도 하는, 마치 예전의 비둘기호를 연상케하는 재밌는 기차였다. 

영주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부석사 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도착하니,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었다. 메마른 먼지 휘날리며 뛰어 내려오는 어린아이들. 아이들은 어딜 가든 재밌는 놀이거리를 발견해서 재밌게 노는 법을 안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절이 많지만, 전망이 좋은 절을 손꼽으라면 나는 기꺼이 예산 수덕사와 이곳 부석사를 손꼽을 것이다. 다른 건물들과는 약간 방향이 어긋나게 서있는 무량수전의 육중한 지붕을 받치고 있는 배흘림기둥이나,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하지만 날아갈 듯 사뿐히 들어올린 팔작지붕 끝의 곡선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무량수전의 본존불 소조여래좌상의 앉은 방향도 다른 절의 본존불과는 달리 동쪽을 향해 있고, 본전의 뒷쪽에 문이 나 있거나 창살 있는 바람구멍 같은 창이 있는 것 등도 다른 절의 본전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조사당의 옆면 또한 요즘의 절 건축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소박하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오늘 어렴풋이 들은 희끗한 머리의 멋진 노신사님의 설명을 빌자면, 날씬한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름다운 처녀같대나... ^^  무량수전 앞의 석등 또한 예전에는 미처 몰랐지만, 윗부분의 팔면 중, 구멍이 있는 한 면 건너 네 면에, 세련된 솜씨로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보면 볼수록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부석사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전망의 위치는 조사당 올라가는 길목의 부석사 삼층석탑의 약간 뒷편이다. 그 곳에서 보면 무량수전의 지붕의 아름다운 곡선이나, 약간 방향이 어긋나 있는 다른 건물들의 연결된 지붕 곡선의 날아갈 듯한 아름다움과 조화되는, 눈 앞에 펼쳐지는 푸르른 자연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가 않다. (왜 방향이 어긋나 있는지 그 이유를 전에 들은 적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난다) 역시 무량수전 앞의 안양루에서 보는 전망도 말할 것도 없다.  천국이 따로 없다.  그 곳에서 하염없이 있어도 좋을 듯 싶을 정도다. 그리고 오늘은 사람들이 많아서 조용히 아름다움을 만끽할 기회를 놓친 대신에, 다른 여러 가지 재밌는 얘기들을 듣게 되서 좋았는데, 그 중 하나는, 그걸 포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안양루의 지붕 밑 층층히 겹쳐진 포 사이의 형상이 어떨 땐 부처님으로 보이기도 한단다. 그러고 보니 아랫쪽의 박물관 앞에서 올려다 본 안양루의 앞쪽의 여섯 구멍과 뒷쪽 다섯 구멍이 어쩐지 부처님의 앉은 형상같다. 그리고 어느 아줌마의 설명에 의하면, 부석사 절 터 아래의 지반을 조사해보니, 용의 꼬리처럼 길고 꾸불하게 바위가 묻혀 있더라나 뭐라나.   보면 볼수록, 그리고 하나씩 알아 가는 기쁨은, 나에게 우리 절의 건축 양식과 그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은 열망같은 것을 불러 일으킨다.

 여행이라는 것에서, 항상 뭔가를 얻거나 깨닫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끔은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여행에서의 여러 기억들은 살아가면서 좋은 추억거리, 때론 살아가는 조그만 힘이 될 수도 있다. 혼자서 하는 여행은 더더욱 그렇다.  여럿이 하는 여행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겠지만. 여행을 하면서 우리 자연과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것도 좋지만, 여러 사람들의 삶을 스치듯 조금씩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나에게 찜질방에 어디에 있는지 손수 적어주시면서까지 기꺼이 알려주신 친절한 영화관 매점 아줌마의 기쁜 표정이나,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같이 가는 인연이 된 일본 청년과 우리 청년은 어디서 뭘 하면서 밤을 보냈을까 하는 호기심과, 감은사지 절터에서 뛰어내려오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던 버스운전기사 아저씨의 웃는 얼굴과,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산을 오르는 어린 아이들의 열심인 표정과, 어디서든 재밌게 노는 법을 터득할 줄 아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모습과, 불편하신 몸으로도 누구의 손을 빌리지 않고 부석사 계단을 하나 둘 밟아 오르는, 어느 지긋하게 나이드신 할머니의 떨리는 손끝에서 우러나는 기도의 힘,

이런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이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1. 오명희(5/27,9:11): 좋은 여행을 하였군요. 사람들을 만날때 살가운 말씨며, 표정이 눈에 보이는듯 하는군요.ㅎㅎ  
 2. 장찬영(5/27,9:13): 영주 부석사 너무 좋죠? 저는 부석사에서 하루밤 묵었었답니다. 부석사 밥도 맛있어요.  
 3. 이원진(5/27,20:20): 수진 언니 청계천에서 경주 이야기 책 샀어요. 만나면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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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라고 볼 수가 있지.

요즘 날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 달라는 사람. 그럴 땐 속으로 이렇게 얘기하지.

- 물론 주고 싶지. 하지만 없는 걸 어쩌나. 배째라 그래.

혹은 이런저런 서류들로 그럴싸하게 포장해야하는 일들을 얼른 해달라고 독촉하는 사람.

- AC~~, XX X, 제대로 인수인계나 해주고 가던지. 아님 잠적이나 말던지. 젠장

 

눈물 대신 욕으로 도배하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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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11-16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신애하고도 세 번, 만날때마다 누나 걱정했는데 얘기도 못 들어봤네... 조만간 우리의 가증깜찍귀여운 배신자 커플도 풀릴 테니까, 그때 같이 심도깊은 얘기를 나눠 보아요. 그리고, 같이 웃자구요. 조금이라도 마음 풀리도록. ^_^o-

무탄트 2004-11-1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 네 말에 이미 마음 풀렸는걸. 일이 닥치면 또 욕을 해대겠지만. 어떻게든 견뎌내겠지. 정말 이제 가증깜찍귀여운 배신자 커플들을 볼 날도 머지않았군. 그때 보자구. 소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