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17 오후 8:42:28

 그냥 걸었다.  아무런 감정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온몸을 맡기며, 그저 걸었다. 이제는 조금은 지친 걸까... 갑자기 걷는 게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을 한다. 자꾸 어딘가에 앉아서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연두빛 새잎들의 생생함에 가끔 미소 지으며...

 목포행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은 후, 처음으로 들른 곳은 해남 대흥사다. 작년 10월에 잠시 들렀을 때, 시간없음을 탓할 정도로 인상에 남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그때랑 좀 달랐다.  대흥사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로움이 한꺼풀 벗겨진 느낌이라고 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땐 늦은 오후였다.  해가 막 넘어가려고 할 즈음이었다.  산에 어둠이 슬며시 깔리면서 대흥사를 엷고 투명한 안개가 살포시 감싸듯, 내 맘도 그렇게 감쌌었나 보다.

 <잠시 비껴가는 이야기>

목포와 해남과 순천의 화장실을 섭렵하면서 느낀 점은, 해남은 읍이고 목포와 순천은 시인데, 버스터미날의 화장실 수준은 해남이 제일 좋다.  사실 목포와 순천은 들어가기가 좀 망설여질 정도다.  청소 상태도 불량하고, 인테리어도 오래되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거 죽어도 잘라내서 뒤에 붙여넣기가 안된다...ㅡㅡ;)

 낙안 읍성 마을에 내려서 처음엔 실망 비슷하게 했다.  조성된 지 얼마지나지 않은, 인공적인 공원같은 느낌이었다.  현대와 옛날이 공존하는...  성 안으로 들어가니까, 조금 달라졌지만...  대학 졸업여행대 제주도 민속마을을 가봤지만...여기 낙안은 좀 다른 느낌이다.  아마도 집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이겠지만, 뭐랄까...살아있는 느낌이다.  물론 사람이 살고 있음으로 해서 훼손되는 부분이 적지 않을 테지만. 제주도에선... 왠지 으스스하고 을씬년스런 기분이 들었더랬다.  지금 다시 간다면 그 느낌이 어떨까...

 낙안엔 곳곳에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강렬한 노란빛이 활력을 주는 듯하다.  생생한 연두빛에 붉은 자주빛 물결이 넘실거린다.  사고 싶었던 디카가 매진된 관계로 아쉽게도 이번만은 일회용 카메라에 의지해야 했지만, 나름대로 온갖 폼 잡아가며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주막 앞을 지나면서  파전 한 접시에 동동주 한 잔이 절실했지만, 나 혼자 먹기엔 다소 부담스럽고, 같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먹을만한 사람도 없으므로, 아쉽지만 발길을 돌릴 수 밖에.  문득 효연씨 생각이 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오늘따라 혼자 온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단체로 소풍 온 학생들이나 아줌마, 아저씨들로 가득하다.  난 운도 없다. ^^

여긴 생각보다 찜질방이나 24시간 사우나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내일은 아침일찍 선암사와 송광사에 들렀다가 남해로 가려고 한다. 피곤하다...

  
 1. 이수진(4/17,20:44): 으...정말 재미없는 얘기다. 내가 썼지만... ㅡㅡ;  
 2. 이효연(4/18,2:23): 긴 여정을 짠 것 같네요...잘 다녀오구요...전 그때가 구정연휴라 여행객이 없었던게 운이라면 운이었죠...나중에 무탄트의 여행기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겠죠?^^  
 3. 정수선(4/18,10:34): 선암사에 가시면 화장실을 꼭 들러보래요(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전 작년 여름 못들러봤지만.  
 4. 양만호(4/18,11:49): 부럽다, 그리고 재밌는 걸요. 그냥 걷고 싶은 날들입니다. 아무 목적도 없이, 아무 꿈도 없이..  
 5. 이화진(4/18,19:20): 나두나두 부럽당.. ^0^   
 6. 김성희(4/18,20:25): 남해 역시... 가는 곳마다 ... 절경이죠. 누군가는 그리스 해안이 부럽지 않더라고... 했어요.  
 7. 김진희(4/19,1:10): 오~언니! 나도 데려가줘요 ㅜ.- (마음을 꽉 채우는 그런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길 그리고 무사히 돌아오길!)  
 8. 백수연(4/19,1:49): 으으.. 셤공부때문에 정신없는데..T.T..언니 너무 부러워요~~  
 9. 김진희(4/19,4:30): 셤의 압박을 받고 있는 숨책인들! 하얀 밤들은 공불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요! 셤의 압박으로 밤새 뒤척이라고 있는 것 ㅋㅋ 마지막까지 홧팅!  
 10. 장석원(4/19,4:46): 부디 성불하시길~. 떡갈비가 좋은 식당에서 밥 잘 챙겨드시고요.   
 11. 유돈(4/20,11:34): 전 법주사의 그 날을 잊지 못하는데... -_-;;   
 
 
2003-04-21 오후 3:39:21 
  
숨책의 젊은 친구들이 머리가 하얘지도록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난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며 행복해하고 있었다고 하면, 다들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

 첫째날의 다소 시니컬한 기분을 만회하듯, 둘째날은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선암사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평일에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인적이 없어 한적하니 좋았다.  고승들의 부도 근처의 편백나무나 삼나무의 쭉쭉 뻗은 모습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참 물오른 연푸른 새잎들과 울창한 숲이 참 보기 좋다.    선암사라고 하면 으레 앞에 붙기 마련인 승선교(보물 제 400호)의 모습은 보수공사때문에 볼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선암사를 뒤덮고 있는 온갖 종류의 붉은 꽃들로 마음이 싱그러웠다. 붉은 피처럼 곳곳에 떨어져 있는 동백꽃, 푸른 잎과 어우러진 분홍빛 벚꽃과 영산홍 등 온통 붉은 꽃 천지였다.

 수선이가 선암사 가면 뒷간을 보고 오라고 답글에 썼듯이, 선암사의 뒷간은 정말 유쾌하기 그지없다. 자연발효식인데다가 앞이 뻥 뚤려서 바람이 잘 통하니 냄새가 안 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구멍으로 시원한 바깥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으며, 그 구멍이 허리에서 발끝까지 닿아 옷을 입고 벗을 때 조금 민망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유쾌하게 느껴진다.  새어 들어오는 빛때문에 쌓여있는 낙엽까지 보이는 널찍한 밑구멍도 재미있다. ^^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선암사 야생화 학습장은, 선암사 주위에 자생하는 야생화 들로 꾸며져 있으나, 지금은 관심 밖에서 다소 밀려난 듯하다.  그러나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편백나무숲의 울창함이 그 서운함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연인들이 선암사를 한바퀴 돌고 나서 쭈~~욱 뻗은 이 편백나무 숲 사이의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히면서 앞에 핀 야생화 꽃밭을 본다면 데이트코스로는 그만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길은, 두 개의 고개를 넘어가는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열심히 가면 3시간 정도면 가능하겠으나, 아침도 굶고 물 한모금 마시지 않은, 그리고 가방 속에 먹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나에겐 끝도 없는 길이었다.  게다가 그 길엔 나 혼자 뿐이었다.  그 시간 그 숲은 온전히 나를 위해 존재했다.  땀을 흘리며 산길을 오르다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숨이 턱하니 받칠 즈음에 근처 아무 돌위에 몸을 던지고 잠시 숨을 고르고 땀을 식히며 앉아 있으면, 세상에!  마약보다도 더 달콤하고 황홀한 세상이 나에게 밀려온다.  들리는 건 내 숨소리밖에 없는데, 그 숨소리마저 숲에 동화되고 나면, 천국의 소리같이 아름다운 새 울음소리에,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에, 어디선가 솔솔 미풍이 날아와 내 땀을 식혀주고, 하늘에선 꽃비가 나린다.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리요.  혼자 있는 그 길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정신없이 걸어가다가, 어디선가 전동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해서 날듯이 뛰어 내려갔더니, 아니나다를까 눈 앞에 보리밥집이 보인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가는 길 중간쯤 위치한 그 보리밥집에서 먹는 보리밥은 꿀맛이었다.  시장기가 반찬이라고 보리밥 한 그릇에 나물 반찬들을 뚝딱 해치웠다.  마지막에 숭늉까지...  음.... ^^

  송광사에 도착할 즈음엔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송광사를 제대로 볼 정신도 없었지만, 외인출입금지 구역이 많아 돌아볼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았다.   국보 제56호인 국사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263호 하사당 등 수많은 문화재를 놓치고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참으로 아쉽다.  (내가 제대로 찾아보질 못해서 그런가...ㅡㅡ;)

선암사가 꽃이 많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면, 송광사는 고려시대에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찰답게 남성적이고 웅장한 느낌에, 많은 건물들이 짜임새있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송광사에 비사리구시, 능견난사, 쌍향수 등 세가지 명물이 있다는데, 난 사천왕사 앞에 있는 커다란 비사리구시만 보았다. 으...그러고 보니 못본 게 넘 많다.  대체 뭐했나 몰라...   하사당의 굴뚝이 인상적이어서 멀리서 그 굴뚝만 열심히 찍다가 왔다.

  그날 저녁엔 내내 비가 내렸다.  순천에서 자리를 옮겨 남해에 도착할 즈음엔 비가 절정에 달했다.  집에 있는 수많은 우산들을 두고서 새로이 우산을 사려니 무지 아까왔지만, 낯선 곳에서 저 혼자 비를 맞으며 다니는 궁상을 떨 자신이 더이상은 없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비싸지만 싸구려티가 팍팍 나는 우산을 사서 들고는,  비 오는 상주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열심히 걸어다녔다.

 남해군 상주면의 상주해수욕장은 생각보단 조그맣고 아담했다. 아마 인터넷에 나오는 사진들은 멀리서 찍어서 다들 멋있게 나온 걸거다.  안으로 폭 들어온 느낌이어서 확 트인 맛은 덜했지만, 밟히는 모래가 참 부드러웠다.  빗속을 뚫고 높이 치는 파도 소리 들으면서 미친 듯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안에서 뭘하는 지가 밖에서 훤히 내다보이는, 창이 넓은 여관에 방을 잡았다. 

  다음 날은 비가 그치길 기다리면서 아침부터 늑장을 부렸는데, 의외로 오전에 날씨가 정말 좋았다. 햇빛은 반짝거리고 전날 내린 비에 씻겨서 공기가 깨끗하고 시야가 확 트여서 출발할 때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물기를 살짝 머금은 풀잎들, 나뭇잎들은 더없이 싱그러웠다.  살랑살랑 바람은 딱 기분좋을 만치 불었다.   허나, 금산에 오르기 시작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부터 주위에는 엷은 안개같은 것이 끼기 시작하더니, 쌍홍문에 다다를 쯤에는 그 안개가 절정에 달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쌍홍문에서의 경치가 그만이었을텐데, 눈 앞에 송악인지 뭔지도 있었는데,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너무 안타까와서 그 안개비속에서 셔터를 눌러댔다. 

 금산 보리암에 오르는 방법은 대개 2가지 방법이 있다. 복곡주차장을 통해서 셔틀버스를 타고 제2주차장까지 와서 거기서부터 천천히 걸어오르기, 그리고 상주해수욕장 근처의 금산입구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밟으며 조금 고생해서 오르기.  난 후자를 택했는데, 고생은 좀 하더라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전날 고생한 전력이 있어서 그런지, 물이랑 먹을 것도 미리 준비하고, 계단을 오르는 것도 제법 익숙해져서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등산을 즐기거나 경치를 즐기고 싶으신 분들은, 복곡에서 올라오는 길보다도 이 금산입구에서 오르는 길을 권한다. 솔직히 복곡에서 오는 길은 좀 싱거웠다. ^^   날씨만 좋았다면, 금산 보리암에서 보는 경치가 끝내줬으리라. 

복곡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버스 시간표를 잘 알아둬야 기다리는 고생을 안한다.  복곡주차장에서 남해읍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1시와 4시에 있는데, 어중간하게 내려오면 하릴없이 배회하는 나같은 신세가 되기 쉽상이다.  하긴 자가용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문제 없겠지만... ^^

 원하는 만큼 돌아볼 만한 날씨가 못되어서 정말 아쉬웠다.  복곡주차장 근처에 저수지가 있어서 경치가 그럭저럭 볼만하다.

 금산에서 남해읍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창밖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경치가 끝내줬다.  남해는 섬치고는 농업이 잘 발달된 편이란다.  남해의 간척지와 바다 사이에는 뻘이 있어서 그 뻘이 완충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남해의 숲은 울창한 편이다.  물기를 머금어 촉촉한 들판과 숲들이 아름다왔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정말, 몇번씩이나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이럴 땐, 내 차가 없는 것이 한이다.  남자친구나 남편을 운전수로 두던지, 내가 직접 차를 몰고 다니면 좋은 점이, 원할 때 원하는 곳에 차를 세워두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난 면허증이 있어도 내가 운전하면 사고낼 것 같아서 평생 운전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맘 넓은 남자를 구해야겠다. ^^

  오랜만에 들리는 부산은 예전보다 많이 변한 것 같다.  그리고 다음엔 남해랑 외도를 묶어서 한번 돌아야겠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혼자 다니는 여행이 뿌듯하고 즐겁다.   수표를 내미니, 잔돈을 거슬러주겠다고 나한테 가게를 맡겨놓고 은행에 돈을 바꾸러 가는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으시던 수퍼 할머니, 금산 오르는 길에 손수 싸온 오이를 툭 잘라서 기꺼이 나눠주던 아가씨,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반갑다고 먹을 것을 더 얹어주시던 어느 분식집 아주머니, 길을 묻든 무엇을 묻든 항상 친절하게 답해주시는 여러 어르신들.  검게 탄 얼굴에 깊은 주름살이 정겹다.

  
 
 1. 김소영(4/21,23:46): 기사 딸린 자가용, 원츄~!  
 2. 아리영(4/22,21:30):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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