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올리는 옛 여행기들은 2002년부터 <숨어있는책>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개편되고 난 뒤 모두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 발견하고보니 그 기쁨이 만만치 않군요. 다시 보니 어색한 부분도 없잖아 있지만, 그 당시 사진기 하나 없이 두 발로만 돌아다니던 제겐 무엇보다 소중한 기록들입니다.  그 당시의 생생한 기억을 새롭게 갈무리 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하나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재미삼아 그때 제 글에 달아준 답글들도 그대로 올려봅니다. ^^;;

 


2002-05-25 오전 6:57:17 
  
차 시간표를 확인해 보느라고 잠시 pc방에 와 있다.  어젯밤 서울을 출발한 기차는 새벽 4시경 경주에 도착했다.  첫단추를 중요하다고 하는데,  난 기차에 몸을 실은 그 순간부터 다리를 내쪽으로 올리고 잠이 든 가족들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거꾸로 가는 기분은 오늘따라 이상했다.  다소 기분이 상했지만, 여행의 처음을 화만 내고 싶지는 않아서 참았다.

 새벽 4시의 경주 시내는, 생각보다 어둡지는 않았다.  그저 고요할 뿐.  4시 30분쯤 되니까 어슴프레 날이 밝아왔다.  경주시외버스터미날의 화장실에서 아침세수를 하고, 햇빛으로 나아가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화장을...ㅋㅋ) 집에서 준비해온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우고, 이제 불국사로 가려 한다.

 오늘의 내 여정은, 경화에게는 본의아니게 미안하게 됐지만, 남산이 아닌, 석굴암과 감포가는 길이 될 듯 싶다...

사족.  여자 혼자 보냈다고 걱정하는 사람, 이 글 보시고 걱정을 떨쳐버리길... ^^

 1. 이원진(5/25,9:35): 수진 언니 보고 싶어요 언제 오시려나  
 2. 유경화(5/25,11:33): 대체 모가 미안하단 말이죠? ^^ 저는 감은사지가 최고였다니깐요!! 하루에 감포와 석굴암을 뛰시려면 차시간을 잘 잡아야할텐데.. ^^  
 3. 유경화(5/25,11:35): 새벽기운 서린 고도를 낙낙히 산책하는 맛도 일품일텐데..으아 경주 정말 가고 시퍼진다~ 언니 조오켔따~~  
 4. 정주영(5/25,15:35): 드뎌 언니 여행을 갔구낭 
 
 


 2002-05-25 오후 6:39:41 
 
11번 버스를 타고 불국사에 간다.  내가 타고 난 다음에 웬 청년이 타는데 아무래도 일본사람인 것 같다. 불국사 가는 버스가 맞는지 묻는 것 같다.

경주 올 때마다 느끼는 사실이지만, 오늘도 느끼는 사실은, 경주 역에서 쭉 앞으로 뻗은 길, 거의 경주 시내라고 할 수 있는 그 곳은, 높은 건물이 없어서 그런지, 시골 읍내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는 거다. 그만큼 거의 변함이 없다는 얘기이겠지만, 그리고 경주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곤란한 점들도 많겠지만, 난 그래서 경주가 좋다.

사실 내가 오늘 새벽에 기차에서 내렸을 때 제일 먼저 내 코끝을 스치고 가는 경주의 향기는, 풀내음과 퇴비내음같은 것이었다.  그리운 냄새.

 불국사에 마지막으로 온 것이 7,8년 전쯤 되었을 거다.  역사나 문화재에 대한 안목은 여전히 형편없는 나이지만, 언제봐도 불국사는 아름답다.  뭐라고 해야할까, 화려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단순하지만도 않은, 그러면서도 위엄있는 아름다움, 회랑과 처마의 연결된 선의 날아갈 듯한 가뿐함,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은, 볼 때마다 느낌이 틀려지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아름다움.   사실 내 느낌을 뭐라고 얘기하기가 힘들다, 나의 언어적인 능력으로는...   그냥 즐겁고, 뿌듯하고, 애틋하다.

 애들이 수학여행을 왔나보다. 조용한 경내가 금새 시끌벅적해졌다.  이제 난 그마저도 아이들 다움인 것 같아서 좋다. 사이비 불교신자인 나는 불전마다 돌면서 조촐한 시주를 하고 삼배를 올린다. 대단한 믿음은 아니니, 전통 문화재 혹은 그 문화재를 만든 옛 사람에 대한 공경심이라고 해둘까...

 지금 시간 8시 50분, 불국사 경내를 거의 다 돌고 일주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가야지. 어떻게 석굴암으로 갈까...  등산로를 따라 갈까, 셔틀버스를 타고 갈까.   결국 셔틀버스를 타고 석굴암에 왔다.

토함산 거의 정상에 있는 석굴암은 주차장에서 보는 전경이 경주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듯 확 트이고 시원하다.  일단, 석굴암부터 구경해야지.  어? 꽤 걸어 들어가야 하네. 그래도 시멘트 길이 아니고 흙길이라서, 그리고 연두빛 싱그러운 나뭇잎들이 뜨거운 햇빛을 잘 가려주니 마냥 좋다.

 석굴암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실망이다. 처음엔 그랬다.  유리창 너머로 거의 본존불의 모습만 제대로 볼 수 있었으니까. 석벽의 다른 상들은 유리창에 반사되는 빛 때문에 뚜렷이 보기가 힘들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거의 입구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아놓았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규모도 작은 것 같아 보였다. 유리창 밖에서 보기엔...    유리창 안에는 큰스님과 두 보살이 오후 불공을 드리고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 본존불의 얼굴과 자태를 보고 있는 순간, 주루룩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대체 뭔가. 억누를 수가 없다.  슬픈 생각을 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갑자기 봇물 터지듯 감당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진다.  울음을 겨우 삼키며 눈물을 펑펑 흘리며, 잠시 불전 밖으로 나갔다.  누가 볼까 부끄럽다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눈물만 난다. 그때,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내 곁을 맴돈다. 나를 위로해 주려고 어느 영혼이 나비로 화해서 내 곁을 맴도는 것 같다. 누굴까. 당황스럽지만, 낯설지는 않은, 참 이상한 느낌이다.  

석굴암 불사 주위를 둘러싸고 많은 푸른 나뭇잎들 사이에서 유독 띄는 저 선명한 붉은 빛의 단풍나뭇잎은... 너무 선명해서 핏빛같다.  가을도 아닌데, 저렇게 붉은 단풍은 첨 보았다. 가을에도 보기 힘들만큼 붉은 색이다.   석굴암으로 들어오는 길 주변의 연두빛 나뭇잎들은 햇빛 사이로 반짝 빛나고 있다.

 불국사 올 때도 같이 왔던 그 일본인과 또 한 명의 건축과 출신이라는 청년과 석굴암까지 같이 와서 같이 떠난다. 끝까지 같이 가나 싶었는데, 불국사 앞에서 헤어진다. 나는 11번을 타고 보문단지로, 그들은 10번을 타고.

 졸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엑스포 공원이다. 공원정류장 간판에 150번 버스 노선이 그려져 있길래 급하게 내렸다. 곧 150번 버스가 왔지만, 나를 미처 못 봤는지 그냥 지나친다. 그런데, 어라!  이 놈의 버스가 1시간이 넘도록 오질 않고 있네. 심심함을 견디다 못해, 혹시나 싶어 집에서 가지고 온 십자수 세트를 꺼내놓고 오랜만에 손을 놀리면서도, 내 시선은 여전히 버스가 오는 길을 향해 있다.  1시간이 지나서야 그 놈의 150번 버스가 왔다.   150번 버스는 감은사지 절터와 문무대왕 수중릉까지 가는 유일한 버스이다. 역시나 졸다보니 감은사지 절터에서 내리지 못하고, 그나마 다행히도 문무왕릉 앞에서 내린다.

'봉길 해수욕장' 의 '봉길슈퍼'에서 우유랑 생수를 사서, 미친 듯이 남은 샌드위치로 배고픔을 달랜다. 이제 좀 제 정신이 든다. 살 것 같다.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듯한 새로운 기분이다. 배부른 만족감에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백사장을 걸아다닌다.  백사보다는 자갈이 더 많다. 푸른 바다가 눈 앞에 있고,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수중릉도 눈 앞에 있고, 뜨거운 햇볕을 적당히 무마시켜 줄 만큼 서늘하고 기분좋은 바람이 부는 바닷가를 혼자서 실실 웃으며 걸어다닌다. 서늘한 소나무 그늘에 있는 의자를 운좋게 발견하고 앉아서,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나, 단체로 온 젊은이, 중년 아줌마, 아저씨들의 즐겁게 배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아까전까지만 해도 억누를 수 없는 슬픔과 눈물로 가득차 있던 내 마음이 따스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평온하다. 평화롭다.

 한참을 바닷바람 맞으며 푸른 바다를 정신없이 보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추스리고, 감은사지까지 쭈삣쭈삣 걸어간다. 다리를 건너자, 감은사지 3층 석탑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까이 가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그 규모가 웅장하고 커서 놀랍다. 수풀과 어우러진 삼층석탑의 모습은 흥망성쇠의 부질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넋을 잃고 잠시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사실 마음은 반쯤 150번 버스가 오나 안오나에 가 있었다.  젠장, 그놈의 버스때문에 1시간 기다린 전적은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구만.

그래도 꽤 제 나름의 정취에 취해있다가 내려올 무렵, 저 멀리서 150번 버스가 오는게 보인다. 뛰어라!!!!  정말 열나게 뛰었다.  너무 열심히 뛰는 모습이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도 안쓰러웠던지, 웃으며 기다려주신다.  고맙습니다!!!  이번엔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다.  역시 변함없이 그 틈새를 노리고 꾸벅꾸벅 졸다가 때마침 경주역에서 정신차려 내렸다.

 아! 이제 어디로 가야하지.  잘 때가 없다.  정말로 경찰서에 가서 유치장에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할까, 아니면 24시간 찜질방에 가서 밤을 샐까.  근데 찜질방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알아 보려면 pc방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눈에 띄질 않네. 젊은 남학생에서 물어서 이곳을 찾았다. 다행히 근처에 찜질방에 하나쯤 있을 것 같은데, 첨이라서 좀 망설여지기도 한다. 아니닷!  일단은 전화해보는 거야. 안되면 여관엘 가면 되지. 여관에 가서 혼자 자는 게 첨도 아니면서 새삼스레 뭘...

 오늘의 일과는 대충 끝났다. 오늘의 마지막은 내가 잘 곳을 정하는 것이다. 그저께도 어제도 잠 못 이뤘던 여파가 오늘에서야 나를 붙잡고 빨리 쉬게 해달라고 성화를 부린다. 나는 이제 자러 가야겠다. 아니다, 일단 방을 잡아 놓고, 배를 채우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근처를 산책이나 해야겠다.

오늘은 꿈도 없이 자겠지.

 1. 송수철(5/25,21:9): 경주가 변하지 않는 다는 말은 글쎄요...  
 2. 송수철(5/25,21:9): 시내는 아직 고만고만한데, 경주 북쪽으로는 아파트들이 쑥쑥 올라간답니다..  
 3. 송수철(5/25,21:11): 11번 버스를 타면 통일전 인근도 너무 좋답니다. 임업시험장, 서출지.. 불국사보다 더 아름다운 곳인데.  
 4. 송수철(5/25,21:12): 서출지에 연꽃 피는 모습이 얼마나 좋은지. 다음에 경주 오시면 밤에 돌아다니는 것도 정말 좋을 거에요 ^^  
 5. 이수진(5/26,22:39): 네, 그래요. 저도 불국사 갈때는 꼭 11번 버스를 타고 가는데, 그 가는 길이 더 좋더라구요. 그리고 이번엔 아쉽게도 밤에 돌아다니지 못한 것이 안그래도 맘에 걸리는군요. ^^ 담엔 꼭 한번 밤의 산책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2002-05-27 오전 12:30:32 

송수철씨가 올리신 글을 읽다 보니, 역시 잠시 동안 머무는 나같은 뜨내기는 경주의 진정한 모습을 못보고 지나치기 쉬울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오늘 집으로 오면서도 내내 아쉬웠던 것이, 어제 잠잘 곳을 정하지 못한 탓에 감히 실행하지 못한 경주의 밤 산책이었다. 사실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아무 여관이나 방 잡아놓고, 저녁 시간 후의 산책을 즐겼을 것이다.  밤이란 분위기는 묘하게도 사람을 설레게 하는 유혹적인 면이 있다.  그것도 낯선 곳에서의 밤이라면 더더욱.  묘하게 자유롭고 스릴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

 몇 년 전 부여나 안동 여행 때도 그랬지만, 여자 혼자의 몸으로 여행하는 것에 불편한 점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잠잘 만한 곳을 찾는 것이다. 전에는 여러 여관이나 모텔을 발품팔아 찾아다니면서, 혼자라고 몇 천원 더 깎아서 묵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기억마저 재밌고 좋은 추억거리다- 이번엔 기왕에야 여관에선 자지 않겠다고 맘 먹었고, 경주 시내엔 민박집에 많지 않다는, 그 중에서도 내가 찜해논 한 민박집엔 방이 없다길래,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일단 문명의 이기인 영화를 보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영화시작시간인 11시 20분까지 극장 휴게실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시작 몇 분 전에야 겨우 잠이 깨서 캔커피를 사면서 매점 아줌마에게 근처에 찜질방에 없냐고 물었더니, 역시 아저씨들보다는 아줌마들의 정보통-그 중에서 찜질방이나 사우나 같은 것에 대한-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서, 결국은 '합동 양조장' 근처에 있다는 찜질방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택시를 잡아타고 '동광 게르마늄 찜질방'에 도착한 것이 1시 30분 경. 태어나서 처음으로 '찜질방'이라는 곳에 가 본 나는, 모든 게 마냥 낯설어서, 카운트를 보고 있는 잘생긴 젊은이에게 이것저것 자꾸만 귀찮게 물어대고, 이곳저곳 기웃거려댔다. 일단, 목욕탕에서 묵은 때를 벗겨내고, 개운한 기분으로 게르마늄 방에 들어갔다. 언제나 성질이 급하고 참을성이 부족한 나는 얼마 견디지도 못하고 뛰쳐 나와 버렸지만, 그래도 왠지 개운하고 공돈 생긴 듯 뿌듯한 기분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때론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다. 처음엔 나처럼 낯선 곳에 와서 여관비를 아낄려는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근처에 집이 있는 사람, 술 마시고 친구들과 함께 들어오는 젊은이들, 사랑하는 연인들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구석에 있는 좁고 길다란 나무 의자에 누워 잠을 청했는데, 다행히도 한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

 5월 26일 오전 5시 30분, 생각보다 일찍 잠이 깼다. 다시 한번 게르마늄 찜질을 시도하고, 잠시 땀을 뺀 후에 단장을 하고, 그 곳을 나서 팔우정 해장국 골목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런데 이 해장국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뼈다구 해장국이 아니라, 멸치다시 우려낸 듯한 물에, 채썬 묵, 콩나물, 신김치, 그리고 주인아줌마 말씀에 따르면 모나물이라는 해초가 들어간 것인데, 그 맛이 다소 시큼털털하면서 시원했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

 다음 코스는 영주 부석사였다. 사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원래 가려고 의도했던 곳이다. 예전에 혼자 안동이랑 영주를 돌아다닐 때도 들렀는데, 그 때의 좋은 느낌과 어떤 책을 읽다가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서 이번에 꼭 가기로 맘 먹었더랬다. 경주에서 영주로 가는 9시발 통일호는, 안 들리는 역이 거의 없고, 한번 들리면 5분이상 머물러 있거나, 어떨 땐 내가 뛰는 것보다 더 늦게 달리거나 종종 멈춰 서 있기도 하는, 마치 예전의 비둘기호를 연상케하는 재밌는 기차였다. 

영주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부석사 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도착하니,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었다. 메마른 먼지 휘날리며 뛰어 내려오는 어린아이들. 아이들은 어딜 가든 재밌는 놀이거리를 발견해서 재밌게 노는 법을 안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절이 많지만, 전망이 좋은 절을 손꼽으라면 나는 기꺼이 예산 수덕사와 이곳 부석사를 손꼽을 것이다. 다른 건물들과는 약간 방향이 어긋나게 서있는 무량수전의 육중한 지붕을 받치고 있는 배흘림기둥이나,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하지만 날아갈 듯 사뿐히 들어올린 팔작지붕 끝의 곡선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무량수전의 본존불 소조여래좌상의 앉은 방향도 다른 절의 본존불과는 달리 동쪽을 향해 있고, 본전의 뒷쪽에 문이 나 있거나 창살 있는 바람구멍 같은 창이 있는 것 등도 다른 절의 본전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조사당의 옆면 또한 요즘의 절 건축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소박하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오늘 어렴풋이 들은 희끗한 머리의 멋진 노신사님의 설명을 빌자면, 날씬한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름다운 처녀같대나... ^^  무량수전 앞의 석등 또한 예전에는 미처 몰랐지만, 윗부분의 팔면 중, 구멍이 있는 한 면 건너 네 면에, 세련된 솜씨로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보면 볼수록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부석사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전망의 위치는 조사당 올라가는 길목의 부석사 삼층석탑의 약간 뒷편이다. 그 곳에서 보면 무량수전의 지붕의 아름다운 곡선이나, 약간 방향이 어긋나 있는 다른 건물들의 연결된 지붕 곡선의 날아갈 듯한 아름다움과 조화되는, 눈 앞에 펼쳐지는 푸르른 자연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가 않다. (왜 방향이 어긋나 있는지 그 이유를 전에 들은 적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난다) 역시 무량수전 앞의 안양루에서 보는 전망도 말할 것도 없다.  천국이 따로 없다.  그 곳에서 하염없이 있어도 좋을 듯 싶을 정도다. 그리고 오늘은 사람들이 많아서 조용히 아름다움을 만끽할 기회를 놓친 대신에, 다른 여러 가지 재밌는 얘기들을 듣게 되서 좋았는데, 그 중 하나는, 그걸 포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안양루의 지붕 밑 층층히 겹쳐진 포 사이의 형상이 어떨 땐 부처님으로 보이기도 한단다. 그러고 보니 아랫쪽의 박물관 앞에서 올려다 본 안양루의 앞쪽의 여섯 구멍과 뒷쪽 다섯 구멍이 어쩐지 부처님의 앉은 형상같다. 그리고 어느 아줌마의 설명에 의하면, 부석사 절 터 아래의 지반을 조사해보니, 용의 꼬리처럼 길고 꾸불하게 바위가 묻혀 있더라나 뭐라나.   보면 볼수록, 그리고 하나씩 알아 가는 기쁨은, 나에게 우리 절의 건축 양식과 그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은 열망같은 것을 불러 일으킨다.

 여행이라는 것에서, 항상 뭔가를 얻거나 깨닫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끔은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여행에서의 여러 기억들은 살아가면서 좋은 추억거리, 때론 살아가는 조그만 힘이 될 수도 있다. 혼자서 하는 여행은 더더욱 그렇다.  여럿이 하는 여행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겠지만. 여행을 하면서 우리 자연과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것도 좋지만, 여러 사람들의 삶을 스치듯 조금씩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나에게 찜질방에 어디에 있는지 손수 적어주시면서까지 기꺼이 알려주신 친절한 영화관 매점 아줌마의 기쁜 표정이나,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같이 가는 인연이 된 일본 청년과 우리 청년은 어디서 뭘 하면서 밤을 보냈을까 하는 호기심과, 감은사지 절터에서 뛰어내려오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던 버스운전기사 아저씨의 웃는 얼굴과,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산을 오르는 어린 아이들의 열심인 표정과, 어디서든 재밌게 노는 법을 터득할 줄 아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모습과, 불편하신 몸으로도 누구의 손을 빌리지 않고 부석사 계단을 하나 둘 밟아 오르는, 어느 지긋하게 나이드신 할머니의 떨리는 손끝에서 우러나는 기도의 힘,

이런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이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1. 오명희(5/27,9:11): 좋은 여행을 하였군요. 사람들을 만날때 살가운 말씨며, 표정이 눈에 보이는듯 하는군요.ㅎㅎ  
 2. 장찬영(5/27,9:13): 영주 부석사 너무 좋죠? 저는 부석사에서 하루밤 묵었었답니다. 부석사 밥도 맛있어요.  
 3. 이원진(5/27,20:20): 수진 언니 청계천에서 경주 이야기 책 샀어요. 만나면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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