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9-23 오후 8:49:57
말로만 듣던 '엽기적인 그녀'를 제대로 본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동생이랑 보면서 진짜 엽기라고 연신 감탄하면서, 갑자기 나도 엽기적인 그녀가 되고 싶어졌다면 웬 노망이냐고 할까. 나이 들면서 점점 엉뚱한 일들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이 불끈 치솟는다면, 나의 삶이 무료해서일까.
그래서일까... 밤새 뒤척이며 잠 못 이루다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청량리역 앞에서 양수리방향으로 가는 8번, 166번 계열의 버스를 잡아타고, 능내역 정류장에서 내려서 건널목을 지나 오른쪽 길로 조금 걸어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난 언덕길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다산 정약용 유적지' 이정표가 나온다. 그 길로 쭉 내려가면 왼편으로 '다산 정약용 유적지'가 나오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란다. 인터넷에서는 연중무휴라고 하더니, 거짓말이다. (입장료는 무료이다)
'다산 정약용 유적지'는 정약용 생가와 묘 그리고 기념관, 문화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관 앞쪽에는 정약용의 저서 중에서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의 서문 등을 돌에, 목민심서 중에서 몇몇 구절을 뽑아 쭉 나열된 나무 기둥의 동판에 새겨 놓았다. 그 글들은 현대실학사에서 나온 <다산문학선집>,<다산논설선집>,<다산시 정선>, 창작과 비평사에서 박석무 편역으로 나온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추려낸 글들이란다. 집에 가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볼만한 글들이다.
어차피 유적지 구경이야 그른 일이고, 다산이 자주 올랐다고 하던 '수종사'에 가리라 맘 먹고, 다시 능내역 정류장 앞에서 양수리 방향의 버스를 타고 검문소 삼거리 앞에서 38번 버스나, 166-3번 버스를 타고 수종사 입구에서 내리면, 표지판으로는 2km라고 하는데, 오르막만 있는 산길을 걷는 것이 참말 죽을 지경이었지만, 입구에서 오르는데만 내 걸음으로 정말 천천히 헉헉대며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리니, 생각보다 멀지는 않은가보다. 때때로 울퉁불퉁한 산길에 잘 포장된 도로는 아니지만, 수종사 입구까지 차가 올라올 수 있으니, 차가 있고 오르막내리막 운전에 능숙한 사람들은 나처럼 미련떨지 말고 편하게 올라올 일이다. 난 비록 도 닦는 기분으로 올라왔지만... ^^
수종사에 올라 내려다보는 전망은 정말 끝내준다. 멀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가 한눈에 들어오고, 다산이 살았던 마재(마현)마을도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거북이 형상으로 바라 보이는 것이, 가슴이 탁 트이고 암만 봐도 싫증이 나질 않는다. 게다가 그 옆에 무료다실이 있어서 가족들이랑 경치를 감상하며 따뜻한 차 한 잔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난 혼자라서 머뭇거리며 밖에서 구경만 하다가 입맛만 다시고 내려왔다. ㅡㅡ
수종사는 세조 4년(1458년)에 왕명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세조가 그 근처를 지나다가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려서 찾아보니 나한 18상이 나왔다나. 그래서 그 나한 18상을 모시기 위해 절을 지었다고 한다. 대웅전을 지나 불이문을 넘어가면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세조가 절을 창건하면서 심은 나무라고 한는데, 나무의 뻗은 가지 모양이 웅장하다. 어쩐지 어두운 구석에 처박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좀 울적하다. 어떤 아줌마, 아저씨들이 밑에 떨어진 은행이나 주워볼까 두리번 거리지만, 벌써 발빠른 누군가가 다 쓸어갔나 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떨어진 것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제발 바라건대, 애꿎은 나무가지를 흔들거나 쳐서 떨어뜨리지만 말아 주옵소서.
내려오는 길의 경사가 오르막만큼이나 장난이 아니어서 행여나 성하지 못한 무릎의 통증이 재발할까봐 거의 엉금엉금, 조심조심, 왔다갔다 하면서, 때론 목을 빼고 뒤로 걸으면서 무사히 내려왔다.
근처에 '종합영화촬영소'가 있다는데, 시간 관계상 발길을 돌려 그냥 와버렸지만, 시간나는 사람은 거기도 한번쯤 들러 볼만한 일이다.
곳곳에 멋스럽게 지은 음식점들이 때때로 슬프다.
1. 이성규(9/23,22:10): 와우... 누나 좋았겠다..^^ 나중에 뵈요..^^
2. 김성희(9/23,23:32): 올 봄, 몸살 앓으며 올랐던 수종사 생각이 나는군요. 그 큰 은행나무도... 혼자 한 여행만큼... 오래 기억에 남을 일이 또 어딨을까요.
3. 무탄트(9/24,9:14): 그럼요. 혼자 한 여행이 오래 기억에 남죠. 그래서 올 가을에는 많이 다니려고 합니다. ^^
4. 이자은(9/24,9:54): 여행... 왜 저는 그게 안될까요... 언니, 메세지 고마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