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6-15 오후 9:54:10
지금 시각이 오후 6시 33분입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냈는 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낸 하루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기억을 되돌려 봅니다.
6월 14일 오후 1시 50분, 네 명의 청춘들은 전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화장실 냄새가 조금씩 풀풀 날리는 끄트머리 자리에 마주보고 앉아서 전주에 도착할 때까지 끝없이 수다를 떨었지요. 전주시외버스정류장 근처 식당에서 10분만에 비빔밥 한 그릇씩 뚝딱 해치우고 대둔산행 마지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슬슬 졸음이 몰려들더군요. 한숨 눈을 붙이는데, 갑자기 어떤 압박같은 게 느껴져서 눈을 떴더니, 아! 병풍처럼 펼쳐지는 산꼭대기의 바위들, 대둔산의 장중하고 수려한 모습이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한편으론, 아! 장난이 아니겠구나. 슬슬 산행의 부담이 압박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지요.
대둔산 입구의 <쌍둥이 민박>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주인이 오기도 전에 떡하니 널찍~한 방을 하나 잡아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시원~하게 세수하고 이불을 깔아놓고 누워서 뒹구는 맛은 그만이었습니다. 마치 제 집에라도 온 듯 편안했었지요. 허나 피끓는 네 청춘이 마냥 뒹굴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게다가 민박집 앞마당에서는 솥뚜껑 위 삼겹살이 지글거리며 유혹하고 있었지요.
평소 제 소원인 막걸리 한 잔! 을 외치며, 아그들을 재촉하여 밤길을 나섰습니다.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제법 환했는데 어느새 어둠이 깊이 깃들었더군요. 민박집에서 조금 올라오면 보이는 <전주할매식당>에서 할머니의 토속적인 손맛이 깃든 파전,도토리묵 등 토속 안주에 걸죽한 동동주 한 잔씩 걸치고 딱 기분좋을 만치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는 길은 왠지 행복했습니다. 뭐든 할 수 있을 듯 자유로운 기분에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밤이었습니다. 거기에 별까지 떠 있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흐린 날씨 탓에 별보기를 포기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을 위해서! (제 개인적으로는 "제발 내 옆으로 다가오지 말아죠~~!!"를 외치면서...ㅋㅋㅋ)
핸드폰 벨소리에 얼핏 잠이 깨었는데, 누군가 부스스 일어나서 씻으러 가더군요. '찐'이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일어나야 한다고 투덜대는 소리에 동감하면서 우린 채비를 서둘렀습니다. 5시 반에 이른 아침을 해치우고 몸을 "예열"시키기 위해서 커피 한 잔 들이키면서 일찌감치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른 산행이 좋은 이유, 매표소 그냥 통과의 자그마한 행복에 고무되어 힘차게 첫발을 내딛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새 땀이 솟아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지요.
그런 저와 찐과는 달리, '쑥 뜯는 처녀-일명 쑥처녀' 와 몇마디만 나누면 금방 신상정보를 캐내는 '조사관' 은 평소에 운동으로 축적된 체력을 자랑하며 저만치 앞서갔습니다. 가끔 '쑥처녀'가 쑥을 뜯느라 뒤로 쳐지기도 했지만요. ('찐'은 '쑥처녀'가,'쑥처녀','조사관'은 제가 개인적으로 아그들한테 붙인 별명입니다. 아그들이 즐거워하리라 믿습니다. ^^;;;)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이번 산행의 첫번째 인연이 된 6명의 남정네들을 만났습니다. 그 무리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아저씨, '빠삐용'표 줄무늬 바지를 입고 있어서 "성은 빠요, 이름은 삐용"이라 불리우게 된, 일명 '삐용 아저씨'는 처음에는 허리가 아프다며 느림보인 저와 '찐'보다도 뒤쳐져 계시더만, 대둔산의 하일라이트인 <금강구름다리>에 도착하자마자 숨가쁘게 꺼낸 말, "빨리 찍어!"라는 심상찮은 말을 필두로 걸죽~한 입담을 자랑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상인 <마천대>까지 거뜬하게 오르셨지요. 물론 허리엔 복대를 차고서 말입니다. ㅋㅋㅋ
대둔산의 명물인 <금강구름다리>와 <삼선철사다리>의 아찔한 스릴과 쾌감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깊은 계곡 사이에 걸쳐진, 공중에 뜬 <금강구름다리>에서 조금이라도 뛸라치면 다리의 흔들림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고 간담이 서늘해지지요. 거기다가 아래를 내려보게 되면, 감탄사는 저절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삼선철사다리>에서는 양 옆의 손잡이를 꼭 잡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앞서지 마세요. 아니, 팽팽한 긴장감을 맛보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제일 앞에 서세요. 가파르기 그지없는 좁은 철제사다리를 오르는데, 마치 하늘계단에 오르듯 앞은 아득히 멀기만 하고 아래는 까마득하며, 뒤따라 오는 사람들의 압박에 뒷골이 송연하여, 잠시 숨을 돌린다는 것조차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저 한없이 앞으로, 아니 위로만 올라야 하는 그 기분은, 정말 그만입니다. 그렇듯 힘들게 오른 후, 뒤돌아 저 먼 산과 계곡을 굽어보는 맛은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지요.
산행은 전체적으로 그리 힘들진 않았습니다. 완주쪽에서 동심바위와 금강구름다리를 거쳐 정상인 마천대까지 1.7km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다만 놓여있는 돌계단들이 삐죽하고 미끄러지기 쉬운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오를 때나 내려올 때 조심해야 되겠더군요.
정상인 <마천대>에 올라서 미리 준비해온 양갱이랑 과자 등을 먹으려니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집디다. '삐용'아저씨는 자기 일행과 함께 내려가자고 성화셨지요. 밥을 사주겠다는 둥, 차를 태워주겠다는 둥 열심히 설득을 하셨죠. 전 듣는 둥 마는 둥, 다른 분들께 논산이나 대전으로 내려가는 길을 열심히 물었지만, 차편이 마땅찮더라구요. 비도 오는데 모르는 길을 내려가는 것도 좀 걱정되구요.
결국은 올라온 길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물기 머금은 돌계단은 미끈거렸고, 다리도 아프고 해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기로 했지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는 것도 또 다른 맛이겠다 싶어서요. 올라올 때는 더딘 그 길이,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니 허망할 정도로 금방이었습니다.
결국 삐용아저씨 일행과 함께 XX황토방이란 곳에서 맛있는 점심을 배불리 먹고, 대전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곳까지 차도 얻어탔습니다. "정"이란 동호회의 일원이시라는 그분들을 만나게 되어서 어찌보면 행운이었지요. ^^
금산면의 그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 않고, 웬 봉고차가 하나 섰습니다. 처음엔 저희보고 네팔 사람이 아니냐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ㅋㅋㅋ 아니요, 저희는 토종 한국인인걸요.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으시길래, 대전역까지 간다고 했더니 고맙게도 태워 주시겠답니다. 아니, 이런 행운이! 저흰 얼씨구나하고 차에 올랐습니다. 차 안에는 몇 명의 네팔 남자분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젊은이는-저보다 나이가 어린- 한국어를 꽤 잘했습니다. 한국에 있은 지 3년 정도 됐다는 그 청년은 네팔에서는 대학생이었대요. 전공이 뭐냐니까 "수학"이랍니다. 오우! 저랑 같군요. 비록 제가 수학을 싫어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 청년의 영리해보이는 까만 눈동자가 기억에 남는군요. 아무튼 반가움에 이런 저런 얘기들을 주고 받으면서 우린 즐거웠습니다. 선교사를 하신다는 한 네팔 분은 정말 한국어가 능숙했습니다.
기꺼이 마음좋게 대전역까지 태워 주신 그 분들 덕분에, 우린 정말 편안하고 빠르게 올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던지. 게다가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서 대전역 앞의 재고서적이나 헌책을 파는 서점(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군요)에서 책구경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어딜가나 숨책인은 어쩔 수가 없군요. ^^
두 인연 덕분에 편안하고 행복하게 대전역으로 온 우리는, 또 운좋게도 대전에서 서울로 가는 좌석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한 자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요. 또 인연이 되었던지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면서 유심히 봐둔 양복입은 한 귀여운 총각이, 창가쪽의 자신 자리를 기꺼이 양보해 주었습니다. 처음엔 (제가) 음료수라도 내밀면서 감사를 위장한 '관심'을 표하려 했지만, 피곤함에 우리는 이내 곯아 떨어졌습니다. ㅋㅋㅋ
지금 생각해보면 유래없이 맛있게 배불리 먹고, 재미있고 편안했던 이번 여행은 세 인연들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여행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이렇듯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여행을 멈출 수 없는 것 같아요. 이렇듯 오늘은 행운이 끊이질 않아서 마치 한여름밤의 꿈을 꾼 듯한 기분입니다. ^^
아! 이번 여행에서 전 정말 마음에 드는 수확을 하나 거두었는데요, 삐용아저씨 일행 중에서 처음엔 강력반 형사처럼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귀여운 구석이 있던 우체부 아저씨가 사주신 "등긁개"입니다. 전부터 하나 장만하고 싶었는데, 암만 봐도 정말 맘에 들어요. 이모저모 쓸모도 많구요. 삐용아저씨가 부인에게 줄 선물을 하나 추천하라고 했을 때, 전 이 "등긁개"가 맘에 든다고 해서 늙은이같다고 핀잔을 들었지만 말입니다. ^^
여러 가지 재밌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만, 제 기억력으로는 무리로군요. 아그들이 저의 모자람을 보충하여 거시기 재밌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
1. 백수연(6/16,1:0): 아아.. 너무 부러워요..-_-.. 담엔 꼭 가보리라. 특히 그 구름다리!!!....꼭 타봐야징
2. 오명희(6/16,9:4): 아내에게 등긁개를 사다주면 남편에게 서운함을 느꼈을 겁니다. 이건 기혼과 미혼이 느끼는 차이 일까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3. 임정연(6/17,13:38): 아 저도 놀러가고 싶네요 ^^
4. 찐(6/17,14:11): 생각나는 게 많아요! 밤에 잘때 언니 옆에 딱붙어 괴롭히기. 진짜 맛있던 전주할매식당 된장국. 삐용아저씨.네팔청년들. 잊을 수 없는 삼선계단과 구름다리에서의 짜릿한 두려움!! 아아아-
5. 엘프(6/17,19:46): 비오는 날 죽음을 각오하고 월출산 올랐다가 후유증에 대둔산은 포기해야 했던 아픔이 있죠.. 좋았겠다~ =)
6. 미단(6/18,16:57): 네팔이 아니라 태국입니다.
12. 찐(6/18,21:20): 아냐 네팔이잖아. 내가 인도 오른쪽 위에 있는 거 맞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인도 왼쪽엔 파키스탄이죠 라고도 물었고. 그렇다고 말하는 거 같이 들었잖냐. 그때 히말라야산이랑 라마단 얘기도 했쥐 ^^
13. 찐(6/18,22:35): http://file.barunson.com/upfile/card/cedc33.swf?a=1 당근! 당근! 당근! 당그은~썽! 이젠 인터넷첫화면으로ㅋㅋ i^^i
14. 무탄트(6/19,9:27): 맞어. 네팔이랬어...내가 세계지도까지 꺼낸다는 둥 했잖우. 네팔은 힌두교가 많다고 했던 것도 같은데...파키스탄은 이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