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28일 아침
어젯밤 일찍 잠이 든 때문인지 일찍 눈이 뜨인다. 아직 모두들 잠이 덜 깬 사이, 사진기를 들고 아침 산책을 나선다. 해는 점점 떠올라 산을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모텔 뒷쪽에는 흑염소 한 마리가 나를 보더니 내쪽으로 오려고 몸부림치면서 매애~~ 애달프게 불러댄다. 길 건너편 산중턱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좋을 것 같아 올라갈 길을 찾는데, 어딘가에 묶여있지 않은 듯 보이는 개 한 마리가 뛰쳐나와서 정신없이 짖어대는 통에 그만 용기를 잃어버렸다. 난 개가 무섭다. 신선한 아침공기 들이마시며 땀이 조금 날듯말듯하게 걸어다니다가 방으로 들어가니 기분이 좋다. 애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씻고, 우린 어제 맛있게 저녁을 먹은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식사로 재첩정식을 시킨다. 따뜻한 햇살아래 약간 쌉싸름한 재첩국과 나물반찬들을 느긋하게 먹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난 견딜 수 없이 행복하다. 사랑이 무언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계가 어떤건지, 어떤 이야기를 나눠도 좋기만 하다.

모텔 뒤 전경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과 아침을 먹으면서
곧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아침 먹기 전 얘기한 대로 나와 원진만이 원래 마음먹은 대로 계속 걷기로 하고, 몸이 편찮은 남편이 걱정되는 미혜는 먼저 서울로 올라가고 어제 찬 바람 맞으며 무리한 결과(이건 나의 잘못이다. ㅜ.ㅜ) 악화된 감기로 몸이 아픈 은선은 일단 순천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아침을 먹고 난 후 짐을 꾸려 문을 나서자마자 하동으로 가는 버스가 한 대 오는 바람에 제대로 된 이별도 하지 못하고 둘을 보내려니 마음이 짠하다. 원진과 나는 다시 19번 국도로 돌아왔다. 햇살은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우릴 반긴다. 조금 걷다보니 길 옆으로 야생(?)차밭이 보이고, 밭을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숲 너머로 섬진강의 하얀 모래톱이 보인다. 대나무숲으로 난 길을 뚫고 지나가 하얀 모래 위에 우리의 발자국을 남긴다. 바로 앞에서 보는 섬진강물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깨끗하다. 모래가 투명하게 비칠 정도다. 물빛이 은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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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번 국도변에서 앞서가는 원진

섬진강 모래를 밟다

섬진강에 손을 담그는 원진

야생(?)차밭이라고 보기엔 너무 질서정연한가? ^^;;
헤헤헤이~~ 노래를 부르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가사를 제대로 아는 노래가 없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진작에 알아뒀어야 하지만, 어쨌거나 신나서 말처럼 뛰어다니고 싶은 기분이다. 어울리지도 않는 밤에 피는 장미~를 불러대며 걷다가 맘에 드는 풍경이 나오면 사진기를 들이대고, 그러다가 뒤쳐지면 훨씬 앞서 있는 원진을 따라잡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야 하지만, 그래도 말할 수 없이 자유로운 이 기분만은 어쩔 수가 없다. 평사리에 가까워오니, 아마도 드라마 <토지>를 찍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세트장이 숨겨진 보물처럼 대나무숲에 살짝 가려져 있다. 앗싸!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댄다. 원진을 비롯해서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나의 모델이다. 미혜와 은선도 같이 보면 좋았을 것을. 못내 아쉽다.

아마도 드라마 <토지> 세트장

초가집 앞에서 원진


초가집 옆 나룻배
셋트장을 지나니 섬진강변 바로 옆으로 둑이 하나 나 있다. 난 이 둑이 정말 사랑스럽다. 한 줄로 서서 걸어가야 하는 갓길과는 달리, 둑 위에서는 둘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도 괜찮을 만큼 넉넉하고 여유롭다. 둑 위에서 바라보는 섬진강의 경치에 감탄하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띠리리 전화가 온다. 미혜다. 너희 지금 둑길을 걷고 있지? 어? 어떻게 알았어? 나랑 은선이랑 하동으로 가면서 그 둑을 보고, 쟤들이 분명 저기를 걸어갈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너희 둘이 보이네. 지금 우린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고 있어. 순천행 버스가 파업으로 오후에 두 대밖에 없대. 기다리기엔 시간이 넘 많이 남아서 은선이보고 같이 올라가자고 했지. 잘했네. 너 혼자 보낼려니 마음이 좀 그랬는데. 근데 순천가는 버스가 1시 30분이랑 3시 30분에 있대. 늦지 않게 가라구. 오케이~ 땡큐~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우릴 지켜보는 이가 있다니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빙긋 웃으면서 원진이랑 둑 위를 걸어간다. 언니, 우리 나이 먹어도 이렇게 행복하게 다닐 수 있을까요. 그럼. 넌 할 수 있을 거야. 정말 행복하다, 그지? 이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둑 위에서 바라본 섬진강

재첩을 잡기 위한 그물인가...
19번 국도가 악양면 최참판댁으로 들어가는 길과 만나는 외둔삼거리를 지나면 왼쪽으론 악양의 드넓은 벌판이 훤하게 펼쳐지고, 오른쪽으론 섬진강변에 너무도 잘 정비되어 오히려 딱딱해 보이는 평사리공원이 자라잡고 있다. 아미산 자락 아래 드넓게 펼쳐지는 평야는 정말 시원하다 못해 악! 소리가 날만큼 아름답다. 막혀있던 가슴이 외둔삼거리를 지나는 순간 탁 트이는 기분이라고 할까. 순천행 버스의 파업으로 인해 쫓기는 시간만 아니었다면, 푹 쉬어가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맞닥뜨렸던, 사이좋게 나란이 서서 섬진강변을 바라보고 있던 비석의 주인공도 지금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악양의 아름다운 평야 - 사진에 그 넓음을 다 담지 못함이 안타깝다.
상행선의 시작인 순천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시간이 빠듯할 듯 싶어 하동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려고 뒤를 흘금거리지만 좀처럼 보이질 않고, 우린 아름다운 다리를 가진 마을, 미점리로 들어간다. 삼거리 앞 수퍼에서 군것질거리를 사들고 나오는 순간,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하동행 버스. 세워달라고 손을 흔들어봤지만 소용없다. 순천행 버스 시간에 맞추려면 저 버스를 꼭 타야하는데... 중국의 악양과 그 경치가 비슷하여 악양이라 이름붙였다는 악양면의 소상팔경 중 하나인 악양루가 길 건너편의 담 뒤로 보이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다. 히치하이킹이라도 하는 수밖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내밀어 흔드니, 봉고차 한 대가 선다. 하동요~ 감사합니다~ 숨 넘어갈 듯 정신없이 봉고차에 몸을 실고, 수퍼 옆에 외로이 앉아 계시는 할머니의 왠지모를 슬픔이 감도는 표정을 마음에 담는다.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여행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