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26일 22:57 영등포역에서 출발
다소 피곤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시간의 활용면에서나, 비용면에서나 유용한 밤기차를 즐겨 타지만, 사실 밤기차에서 눈붙이기는 쉽지 않다. 집에서라면 잠들고도 남은 시간인데도 다들 가슴이 설레서 그런 걸까, 무슨 할 얘기들이 그렇게 많은지 두런두런 얘기들 주고받는 소리가 은근히 신경쓰이기 때문이다. 다소 감기기운이 있는 은선은 맥주 한 캔 하더니 윗도리를 덮어쓰고 일찌감치 잠이 들었고, 원진도 곧 잠이 든 것 같은데, 미혜와 난 앞자리에 앉은 할아버지들께서 얘기 나누는 소리에 잠들기가 쉽지 않다. 사실은 나도 미혜랑 얘기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참고 억지로 눈을 붙인다.
2004년 11월 27일 새벽 03:20 구례구역에 도착
생각보다 날씨가 춥지 않다. 숨 한번 들이켜고 역내 화장실로 가서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속을 녹이고, 지도를 보면서 어디를 갈 것인가 생각해보라고 했지만, 눈을 다시 붙일 장소도 시간도 마땅치 않은 그 새벽에 차라리 구례읍까지 걸어서 가자고 모두를 닦달하여 길을 나선다. 구례읍까지 6km남짓 되는 거리, 18번 국도를 걷는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때문에 주위가 환하다. 옛날 산길을 걷던 나그네에겐 이처럼 밝은 보름달의 빛이 정말 요긴했을게다. 읍내로 들어오면서 해장국집을 암만 찾아도 없어서 구례경찰서 앞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읍내를 빠져나온다. 서시교를 지나는데, 막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여 작은 내를 주홍빛으로 물들인다.

구례읍 서시교에서 바라보는 일출
서시교를 지나 19번 국도로 접어든다. 19번 국도의 갓길로 걸어가는데, 쌩하니 커다란 트럭이 지나간다. 길 옆에는 저만치 떨어져있는 둑이 있는데, 그에 가려 물줄기는 보이지 않는다. 저 둑에만 올라가면 볼 수 있을텐데.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둑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았다. 야호! 역시 한눈에 물줄기가 내려다보인다. 생각보다 폭이 넓지 않다. 섬진강이 맞나. 어쨌거나 우린 둑 위를 걷길 잘했다고 만족스러워하며 즐겁게 걷는다. 조금 걷다보니 곡성쪽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만난다. 드디어 섬진강이다.

섬진강 줄기를 내려보며 둑을 걷다
상하수도 사업소 옆을 지나 둑길은 끝이 난다. 다시 19번 국도 갓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조그만 정자가 보인다. 용호정이다. 경치도 괜찮고해서 잠시 쉬어가려는데, 서늘한 바람이 속속들이 파고들어 추워서 도저히 앉아있을 수가 없다. 지도를 보니, 근처에 운조루가 있다.
운조루(雲鳥樓)는 호남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원래는 1776년 무관 유이주(柳爾胄, 1726∼1797)가 지은 가옥의 사랑채를 일컫는 말이란다. 운조루의 운자는 구름, 조자는 새를 나타내는 것으로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뜻과 '구름 위를 새가 사는 빼어난'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고, 집터를 잡는 과정에서 돌거북이 출토되어 운조루의 터가 비기에서 말하는 금귀몰니의 명당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해석되기도 한단다. 주인어른의 말씀에 따르면 운조루의 대문에 걸려있는 뼈가 호랑이의 뼈란다. 유이주가 호랑이를 잡아 가죽은 임금에게 바치고 뼈는 대문에 걸어두었다는데, 이는 옛사람들이 잡귀가 함부러 침범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운조루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안채나 사랑채 곳곳에 보이는 창살이다. 특히 안채의 지붕아래에는 조그만 다락방같은 공간이 보이는데, 아마도 바깥출입을 할 수 없는 여인들을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쌀을 넣는 나무통이나 안채 마당에 있는 장독대, 운조루 밑의 마차바퀴가 특히 인상적이었지만, 전체적으론 다소 쓸쓸하고 쇠락한 느낌이다. 논산의 윤증고택에 비해 관리가 소홀한 느낌도 없지 않다. 관리나 보수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부의 부실한 보조를 탓하는 주인어른의 술에 취한 듯한 붉은 얼굴과 목소리가 왠지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운조루의 사랑채 입구

사랑채의 떨어진 문짝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안채 마당의 장독대

운조루 아래의 마치 바퀴

아궁이

운조루에서 내려다보는 마당 풍경
운조루 앞에서 피아골 연곡사로 가는 버스를 탄다. 거기에는 꼭 가기로 은선과 내가 미리 약속한 터였다. 새벽부터 계속해서 걸어서 다소 피곤했던 우리는 버스를 타자마자 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아래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거의 반쯤은 감겨진 눈으로 피아골의 계단식 논의 아름다움을 비몽사몽 감상하면서. 어느덧 매표소에 가까와졌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졸았다. 뭔 아가씨들이 그리도 정신을 못 차리오, 근데 어디 가오? 버스기사 아저씨의 목소리에 겨우 눈을 뜬다. 연곡사 가는데요, 그라믄 화엄사도 갔소, 표는 끊었소? 아니오. 그럼 저기 앞 매표소에서 한 사람당 3,200원 주고 표를 끊어야 하는데, 그랄라요? 그래야죠. 연곡사 말고 다른 데도 갈거요? 아니요. 그라믄 내가 매표소를 그냥 통과시켜 줄테니, 나한테 나중에 담배값이나 줄라요? 네. 우린 마치 007첩보작전이나 수행하듯 긴박하게, 자는 애도 깨워서 엎드려서 숨으라고 시키고, 버스는 매표소를 그대로 통과해서 달린다. 차비와 담배값을 드릴려고 했더니, 담배값은 옆으로 돌려서 달란다. 3,000원만 달라는 아저씨께 5,000원을 드리고 나오는데, 그래서는 안될 일이지만 왠지 기분이 뿌듯하고 모험이라도 한듯 신난다.
연곡사로 올라오는 길에 붉게 물든 단풍잎이 떨어진 모양이 마치 피가 뚝뚝 떨어진 것 같다. 너무도 고운 선명한 핏빛이다. 아저씨 말씀으론, 속설에 도선이 연곡사 뒤의 산의 모양이 제비가 날개를 펼친 형상의 명당이라 절을 세웠지만, 앞에 산이 하나 가로막고 있어 크지 못한단다. 과연 그 산때문에 답답한 감이 없지 않다. 계단을 올라 연곡사 대웅전 오른쪽 산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우리가 보기를 원했던 '동부도'가 있다. 실제로 보니, 과연 동부도는 아름다웠다. 섬세한 조각과 결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날아갈듯이 산뜻한 지붕돌, 상륜부의 가르빙가 조각 등, 그 동부도를 보다가 30미터쯤 윗쪽에 있는 북부도를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보기에도 한눈에 차이가 난다. 우리 주위엔 주황빛 깃털을 가진 아름다운 새 한쌍이 날아다닌다. 마치 우리 할머니가 나를 지켜주듯이.

연곡사 동부도
동부도 옆 부도비-거북의 날개가 이채롭다
연곡사 대웅전 앞마당의 단풍나무와 범종각
연곡사에서 나와 피아골로 향한다. 순전히 점심을 먹기 위해서다. 비수기라서 그런지 사람이라곤 우리뿐인 것 같다. 몇 군데를 들렀지만, 주인장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올라가서 어느 가정집 거실같은 곳에서 드디어 꿀맛같은 산채비빔밥을 먹고는, 커다란 거실창을 통해 한가득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아래 잠시 꿀맛같은 단잠을 즐긴다. 20여분 남짓한 시간이지만 몸이 녹아들듯 달콤하다. 매시간 30분에 출발한다는 버스를 타기 위해 허겁지겁 뛰어나와 다행히도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 연곡사 들어가는 길과 19번 국도가 만나는 삼거리에서 내려 강나루 휴게소에서 예쁜 커피잔에 나오는 300원짜리 커피를 마시며 잠시 행복해하다가, 다시 하동으로 가는 19번 국도로 접어든다.
도보여행의 철칙 중 하나가 차가 달리는 반대방향으로 차를 마주하고 걸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린 섬진강을 보고 싶어 차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 성수기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섬진강 건너편의 861번 도로로 걷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갓길의 폭이 넓지 않아 일렬로 걷다보니 대화를 나누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좋다. 이렇게 걷는 줄도 모르고 불편한 신발을 신고 온 은선이 고생이지만 누구보다 꿋꿋하게 잘 걷는다. 맨 뒤에서 그들을 보는 나는 마냥 뿌듯하다. 멀리 신기루처럼 남도대교가 보인다. 우리 저기서 일몰을 보자. 신기루같아요. 그리 멀지 않을 거야. 한발 한발 더디게 다가오는 대교에 올라도 해가 지는 곳은 멀다. 일몰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어디가야 일몰을 보지. 장관이라는 섬진강 일몰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화개장터를 지난다. 장날이 아니라서 그런지 초라한 규모다. 우린 그냥 지나친다. 이제 슬슬 잘 곳을 찾아야 하는데... 화개장터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오른쪽에 꽤 큰 모텔이 하나 나온다. 남도모텔이라나 뭐라나. 옆에 가든이랑 식당이 하나 있다. 지은 지 얼마되지 않은 듯 깨끗하지만, 어쩐지 모텔이라기보다는 황토방이나 콘도같다. 가운데 거실 같은 게 있고 그 거실엔 싱크대가 달려있다. 양 옆의 복도를 사이로 마주보는 방들이 놓여있다. 처음에 들어갔던 방엔 온기라곤 눈꼽만큼도 없이 썰렁해서 방을 바꿔야했지만, 3층엔 우리뿐이어서 우리가 온전히 세낸 듯한 느낌이다. 따뜻한 방으로 옮기고 난 뒤, 우린 허기진 배를 달래러 모텔 옆 식당으로 갔다. 무엇을 시킬까 잠시 고민하다가 참게탕 작은 것과 소주 한 병을 시켰는데, 이 참게탕이 꿀맛이다. 구수한 국물에 애들 표현을 빌리자면 대게보다 탱탱하고 고소한 겟살맛이란다. 비록 살은 얼마 없었지만. 원진과 나 둘이서 소주 한 병을 해치우고 난 얼큰해진 기분으로 잠시 밤바람을 쐰다. 동네 개들은 낯선 이들을 반기듯 혹은 경계하듯 짖어대고, 멀리 남도대교의 불빛은 반짝인다. 아...행복하다.
(두번째 이야기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