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은 참 즐겁게 보냈다.
새로운 친구 말대로, 나이 먹어서 마음 맞는 사람 만나기도 힘들고 친구 되기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 좋은 친구가 한 명 생겼다. 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긴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친구가 되자고 들면 60된 할머니도 상관없는 그런 관계를 은근히 꿈꾸지 않았던가. 그 새로운 친구 진영이와 새벽 4시가 넘도록 술을 마셨다. 가벼운 맥주로 시작해서 노래방에서 열을 올린 후, 출출한 배와 가슴을 다시 따뜻한 정종대포와 오뎅국물로 채웠다. 매사에 뜨뜻미지근한 내가 화끈하면서도 분명한 그의 카리스마에 끌렸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새벽 4시 반, 새로운 친구를 택시태워 보내고, 다시 나 혼자서 술을 퍼마시기엔 뭣한 시간이어서, 10년 친구가 묵고 있다는 찜질방이 있는 서울역까지 한번 걸어보자 싶었다. 신발이 좀 불편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아주 차가운 날씨는 아니어서 걸을만 했다. 이대, 아현, 충정로를 지나 서울역 방향으로 걸어가니 가는 길 건너편 왼쪽으로 '실로암 불가마'라는 간판이 붙은 커다란 24시간 찜찔방 건물이 보였다. 분명 저기 있을 게야. 주위를 둘러봐도 그 건물 말고는 그럴싸한 찜질방이 보이지 않는다. 그 건물 근처 해장국집을 눈여겨 본 후 아파오기 시작하는 발바닥때문에 조심스레 걸어 서울역으로 갔다. 6시가 조금 지난 서울역에는 꽤 사람들이 많았다. 이른 새벽부터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 난 자리잡고 앉아서 친구에게 문자를 보낸 뒤 읽다 만 책을 펴들었다. 눈이 시큰거려 잠시 졸았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고? 나, 서울역이지. 오래 기다렸나. 아니, 30분쯤 됐어. 신촌에서 서울역까지 걸어왔거든. 정말이가? 지금 씻고 나갈께. 응, 도착하면 전화해.
가슴이 두근거렸다. 10년만에 만난 친구에게 많이 변한 내 모습을 보여줘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많이 실망할텐데. 그래도 왠지 그 친구에겐 내 모습을 보여줘 실망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한 느낌이 들어 친구에게 전화하려다가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그 친구가 보였다. 여전한 모습이었다. 살이 많이 쪘다는 친구의 농담을 슬쩍 받아 넘기고 웃었다. 친구의 유머감각이 여전했다. 10년을 훌쩍 넘긴 후에 다시 만나도 예전처럼 농담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행복해서 정말 많이 웃었다. 눈물이 나고 배가 아플 정도였다.
눈여겨 봐 뒀던 해장국집에서 멀겋지만 시원한 맛의 해장국을 걸치고, 조조할인되는 영화를 하나 보자면서 종로로 갔다. 웬걸, 8시 30분이 되었는데도 극장 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우린 탑골 공원 앞 버거킹에서 커피를 마시며 카페인을 충전했다. 서울극장에서 10시 30분 '나비효과'를 봤는데, 전날 밤을 샜던 터라 처음부분에서 깜빡 코를 골았다가 친구가 깨우는 것보다도 주인공의 아버지가 주인공의 목을 조르는 장면에서 엄청난 음향에 화들짝 놀라 잠을 깼다. 이번엔 내가 친구의 조는 모습을 잡아내려고 옆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열심히 영화에 집중한 표정이었다. 나는 신기했다. 그가 10년 전 모습 그대로 내 옆 있는 것 같아서. 친구랑 영화를 보고 인사동에서 점심을 먹고 정독도서관에 가서 200원자리 자판기 커피를 빼들고 잠시 벤치에 앉았는데 햇볕이 따뜻했다. 요즘 내게 따사로운 햇볕이 주는 감동은 매번 남다르게 느껴진다. 친구의 농담에 한참을 배꼽잡고 웃다가 도서관을 나와 삼청동길을 걷는다. 오래된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이쁘다. 발바닥에 불이 날 것 같아서 삼청공원의 벤치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며 막간을 이용해서 졸다가 북촌한옥마을의 어느 골목을 헤맨다.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라 한걸음 한걸음이 고통의 연속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그냥 그대로 보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 강남고속터미날에서 밥을 먹여 친구를 보내면서, 그를 멀리 떠나보내는 것도 아닌데, 이제 맘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을텐데, 이상하게도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10년 친구를 고속버스에 태워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실신할 것 같이 밀려오는 졸음과의 싸움의 연속이었지만,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여전한 10년 친구를 만나서 보냈던 행복한 시간들은 한동안 내 마음에 남아 살아갈 힘을 줄 것이다. 친구를 다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