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동생 Y.
참 괜찮은 친구다. 가끔 가슴이 철렁할 정도의 농담을 잘하지만 유머감각 있고, 알뜰하며, 부지런하다. 그녀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며 좋은 딸이다. 아니 좋은 딸이었다. 대학교도 부모님 손 빌리지 않고 장학금에 대출금 받아 다니면서 아르바이트해서 생활비에 보탰다. 졸업하고 나서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하다가 울 회사에 들어와서 받은 월급 족족 부모님의 생활비와 사업자금으로 바치다시피 했다. 그녀 이제 30대를 바라보는 시점에 이르고 보니, 가지고 있는 게 하나도 없어 결혼도 감히 꿈꾸지 못한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그녀에겐 오빠도 여동생도 있지만, 오빠는 나가서 집과 담 쌓고 산지 오래고, 여동생도 운좋게(내가 보기엔 운이 많이 따른 것 같다) 공무원 시험에 붙어서 집과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변두리로 발령받아 부모님과는 일찌감치 멀어지는 행운을 얻었건만, 그녀만은 여전히 부모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올해까지만이라고 약속과 다짐을 받아냈건만, 그녀의 부모님 밑빠진 독에 여전히 물붓기하듯 미련을 못 버리시고 그녀에게 1년만 더,라고 말씀하신다. 그녀의 오빠, 동생에겐 한 말씀도 안하시면서, 그들이 싫어요라고 말하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오직 그녀만을 붙잡고 늘어지고 오직 그녀에게만 희생할 것을 강요하신다. 그녀, 이제 지칠 대로 지쳤다.
그녀의 오빠, 일찌감치 집을 나가 살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부모님이 아프시다거나 급한 일이 있어도 나 몰라라 한 적도 많았다. 다 나중에 잘 모시기 위해서라지만, 지금도 그렇게 나몰라라 하는데 나중에라고 잘 헤아릴까. 그동안 그는 집안의 형식적인 맏이였을 뿐, 실질적인 가장 노릇은 그녀가 다 했다. 그동안 그녀, 오빠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왔다.
그녀의 여동생, 그녀에겐 유일무이하다시피 소중한 피붙이이자 친구였다. 그 동생이 학교를 휴학하고 혹은 졸업하고 놀면서 공무원 시험준비할 때, 그녀 용돈 쥐어주며 뒷바라지 했다. 가끔 구박하기도 했다지만, 내가 보기엔 정말 좋은 언니였다. 동생 운이 좋게도(내가 보기엔 피터지게 공부한 것 같지도 않은데, 과거운이라는 게 있긴 있나보다) 공무원 시험에 떡하니 붙어서 이제 아무 걱정없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동안 어쩌면 언니의 갖은 스트레스를 받아주느라 나름대로 힘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결과가 좋으니 무슨 상관이랴. 게다가 동생은 직장 핑계삼아 집을 떠나고 부모님을 떠나고 언니를 떠나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리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셈치고 살 수도 있겠지.
이제 문제는 그녀다. 그녀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녀의 부모님께 매여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우면 고민하고 발 동동 굴리는 사람도 그녀뿐이었고, 그녀의 부모님 그녀에게 모든 걸 맡기시고 한편으론 안쓰러워하면서도 돌아서면 아무 생각없이 그녀를 의지했다. 몸이 아프면 투정부릴 데도 그녀밖에 없었으며, 그녀가 그렇게 잘하다가 조금만 못해도 금방 서운해했다. 자식은 오직 그녀밖에 없는 듯, 다른 자식이 그들에게 못하든 잘하든 상관없이, 오직 그녀의 행동만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그녀, 이제 3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앞이 깜깜해졌다. 회사는 어려워져서 오늘내일 하고, 재수없는 부장때문에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며, 그녀의 부모님이 하신 원래 약속대로라면 올해까지만 견디면 된다라는 희망마저 물 건너 가버렸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빠진 듯 그렇게 막막한 느낌인 것이다. 지금까지 쌓여왔던 부모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이 갑자기 봇물 터진 듯 견딜 수 없어진, 정말 지칠대로 지쳐버린 그녀는, 이제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 어차피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회사, 진작에 접어버리고 싶었던 회사를 그만두고 차라리 백수가 되어 보란 듯이, 이제 나 능력없으니 더이상 제게 기대지도 바라지도 마세요, 라고 몸으로 말하고 싶다는, 말해야만 할 것 같다는 그녀. 부모의 내리 사랑만이 전부가 아니고 자식된 도리도 중요하단 걸 알지만, 그리고 그녀가 없는 빈 자리가 나에게 줄 허전함과 그 여파를 알지만, 그녀를 옆에서 쭉 지켜봐 온 나로선 그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기에 나 역시 마음으로 그녀를 보낼 준비를 해야겠다. 어찌 됐던 그녀가 택한 방법이 결과적으로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게 되기를 정말 마음으로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