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의 남친H와 부모님 이야기
Y의 남자친구 H는 짠돌이다. 학생 시절, 전철의 표를 집어넣는 게이트 중에서 프리하게 움직이는 데를 골라서 공짜로 타고 다니는 일이 허다했다고. 지금은 돈도 벌고 Y가 싫다고 해서 자제하고 있는 중이지만 옛날 버릇 어디가나. Y를 만나러 오는 날, Y가 나오는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한번씩 삑 소리가 난다고. 출발할 때 프리게이트를 이용한 게다. 둘이서 데이트하러 움직일 때에도 습관적으로 게이트의 돌아가는 부분을 슬쩍 밀어서 확인하고는, 봐라! 이거 프리다, 막 돌아간다,고 하면서 다 빠져나와서는 그래도 여친 눈치가 보이는지 마지막에 돌아서서 카드를 찍는단다. 여친이 무섭긴 하나 보다.
돌아서면 방금 있었던 일도 까먹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Y와 H 사이의 재미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지만, 아무튼 남친 H 못지 않게 알뜰살뜰하고 남 신세지기 싫어하는 Y, 데이트 비용도 정확하게 반반씩 부담하는데 하루 만원이다. 1인당 1만원. 두 사람이니 2만원의 돈으로 밥 먹고 영화보는 등의 그날 비용을 제하고 나면 모자라는 게 아니라 거의 매번 남는단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쓸 수 있지? 나도 펑펑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2만원으로 둘이서 밥 먹고 차 마시고 영화보는 게 가능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미치겠더라고. 그래서 Y에게 물었지. 언니, 돈암동에선 3천원짜리 밥도 많아요. 커피는 학교 안에 들어가서 자판기 커피 마시구요. 민들레영토가면 기본 입장료로 영화도 볼 수 있어요. 가끔 컵라면 사서 떡뽁이랑 먹을 때도 있구요. 햐! 그렇군. 정말 귀여운 알뜰살뜰 커플 아냐? ㅋㅋㅋ 아무튼 그렇게 해서 많이 남는 날은 7천원 정도가 남기도 하는데, 남은 돈은 '파리의 연인'에서 유명해진 바로 그 돼지저금통에 고스란히 담긴다고.
Y의 집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는 문제의 저금통. 평소에 과일을 무지 좋아하시는 Y의 어머니, 그날따라 돈은 한푼도 없는데(전편에서 얘기했다시피 Y집 살림은 온전히 Y의 몫이고 오로지 Y의 주머니에서만 돈이 나온다) 때마침 과일 장수 트럭이 소리를 질러대니까 과일이 너무너무 먹고 싶은 게야. 그래서 어머니의 눈에 띈 게 바로 그 저금통인 게지.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파리의 연인표 저금통은 물렁한 저금통이 아니거든. 표나지 않게 부수거나 우그러뜨려서 돈을 빼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그래도 너무나 과일이 사먹고 싶으신 어머니, 나중에 다시 채워 넣기로 하고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셔서 저금통에서 딱 12천원만 꺼내기로 했어. Y의 아버지, 과연 이 저금통에서 어떻게 돈을 꺼내신 걸까?
장소는 Y의 집. 사방이 고요한데 어디선가 뭔가 긁어대는 소리만 일정하게 들리고 있어. Y의 아버지, 누워서 뭔가를 하고 계시는데, 아! 의료용 핀셋으로 저금통의 지폐를 하나씩 꺼내시고 계시는군. 운좋게도 단번에 5천원짜리도 걸렸고. 해야할 일이 반은 줄어버린 거지. 그렇게 각고의 노력끝에 드디어 어머니의 소원-12천원어치 과일-이 이루어졌어. 딸과 장래 사위가 될지도 모르는 청년의 데이트 잔금이 들어있는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 사드신 과일 맛은 과연 어떨까?
그렇게 일은 저질렀는데, 빤한 살림에 저금통에 다시 채워넣을 만한 돈이 없다는 게 문제였지. 평소에 Y가 그 저금통에 든 돈이 얼마인지 십원짜리까지 다 알고 있으니 절대로 손대지 말라고 몇번이나 엄포를 놨으니, 언젠가는 뽀록날 일이 아니겠어? 결국 Y의 부모님은 Y에게 이실직고를 하시게 된 게야. Y, 한편으론 기막히고, 한편으론 그렇게 하셔야 했던 부모님이 안쓰러웠다고 하더군. 결국 12천원의 돈은 Y의 주머니에서 나와 다시 그 저금통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지. 안 넣으면 또 어떻냐구? 아니, H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게야? 프리게이트로 다니는 사람이믄 말 다한 거 아닌감. 평소 행동으로 유추해봤을 때, H 그동안 쓰고 남은 돈 다 기록해서 그 저금통에 들어있는 돈이 얼마인지 다 헤아리고 있을껄. 그럼~ 그러고도 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