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이틀 뒤에 죽는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에린이 물었다. (녹음기를 앞에 두고 얘기하려니 처음에는 좀 민망했지만 나중에는 별로 의식하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늘어놓게 되더만 ^^;)
아이리스, 처음엔 내 예상대로 여행갈거라고 하더니(나도 그랬거든) 이틀밖에 안 남았다고 하니까, 전에 호스피스 실습할때 입관체험하면서 유언장을 써봤으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연락해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다.
학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걸 모두 나눠주고, 밥을 맛있게 지어서 가족들이랑 먹겠다고 했다.
난, 먼저 짤막하게 유언장을 써서 내 돈은 가족들에게, 내 책들은 내 지인들에게 주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짧은 마음의 편지를 써서 부치고 남자랑 뜨거운 밤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고향에 내려가서 부모님 얼굴을 보고 나서 바다가 훤히 보이는 비싼 호텔 스위트룸에서 혼자서 죽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문제는 남자를 어떻게 구하느냐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온갖 생각이 난무하는 바람에 좀 흐지부지되긴 했다.
아이리스는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내가 죽고 난 다음의 문제에 대해선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리스는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미련도 무지 많이 남는다고 했다. 난 평소에 스스로 미련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뭐 별로 하고 싶은 것도 없고(에린이 지적한 바와 같이 평소 내 꿈이라던 세계일주를 눈앞에 두고서도) 미련도 별로 남지 않아서 내가 생각해도 그런 내 자신이 조금 의외였다. 물론 시간이 한달쯤 남아 있다면, 정리할 것 정리하고 낯선 나라로 여행을 떠났을 테지만. 난 내 죽음 뒤의 세상과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선 별 생각이 없다. 굳이 내 죽음에 대해서 알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보는 것은 정말 많이 고통스러울 것 같아 두렵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어쩌면 사는 방식과 닮아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아이리스는 평소 삶에 대해서 부단히 생각하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열정이 많은 사람이어서 죽을 때도 같을 것 같다. 반면에 난 평소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속세를 떠나지도 못한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별 야망없이 내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는 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딱히 미련두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남은 시간이 딱 이틀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 시간이 몇달이나 몇년이라면 나도 생에 대한 집착과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지금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내 목숨의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 시간이 다만 몇달이라도 된다면 난 내 주변을 정리하고 떠나고 싶다.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하다고 느끼며 남은 하루를 충실히 보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죽으면 비로소 내 나라로 되돌아와 불 속에서 한줌의 재로 태어나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내 나라 산천에 뿌려지고 싶다. 남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며 아파하지 않으면 좋겠다. 나 역시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괴로워하며 죽기는 싫다.
지금은 그렇듯 얘기하지만 정말 내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다면, 그때도 지금 마음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